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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인 (3대이맘)-시아의 가장 중요한 인물

지평선의순례자 2008. 7. 18. 15:33

후세인 (3대이맘)-시아의 가장 중요한 인물

출처 이란 알아가기..^^ | 기대
원문 http://blog.naver.com/yht0427/140005162090

 

수니와 시아의 이슬람 원리주의 이론가들은 예언자 무하마드를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투쟁한 정의로운 혁명가로 묘사하였다. 반면에 일반 대중 이슬람에서 예언자는 신의 시련이나 최후심판의 날 그리고 일상생활의 위기의 순간에 무슬림을 위해 중재하는 전형적인 영묘한 존재로 묘사되었다. 시아 12이맘파의 이맘 후세인에 대한 해석도 원리주의 시각과 대중주의 시각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대중적 시아 사상에서 이맘 후세인은 신 이전의 중재자로서 죄를 용서할 수 있고 천당으로 가도록 허락할 수 있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카르발라에서 후세인이 순교한 것을 애도하는 것은 그의 중재를 얻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후세인의 고통을 묘사하는 추도 의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비극에 대한 단순한 감정적 반응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것도 우는 사람에게 현세와 내세에서 혜택을 부여하기 위해 고안된 의식의 한 행위였다. 또한 아슈라 날에 검정색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행하는 자기 수난 행위도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카르발라에 관한 구절들을 암송하면서 체인으로 자신의 등을 매질하거나 거친 야자열매로 자신의 가슴을 연타하였다. 이들은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고통에 동참하면서 카르발라 당시 그를 지원하지 못했던 쿠파 사람들의 죄를 상징적으로 속죄하고 참회하였다.

 

후세인에 대한 애도와 함께 시아는 그가 쿠파인들을 도와준 대가로 선물을 바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선물은 다른 이맘들에게도 바쳐진다. 메리 헤그랜드 Mary Hegland는 아편 밀수 혐의로 투옥되었던 한 시골 출신 이란인의 경우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밀수업자는 이맘 후세인에게 자신의 석방을 간청하였다. 그는 만약 이맘 후세인이 그렇게만 해준다면, 카르발라 대학살의 달인 무하르람 달에 이맘 후세인을 위해 세 끼의 밥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헤그랜드는 아편 밀수업자의 간청에서 나타난 대로 후세인과 일반 신자 사이의 관계는 이 세상 어느 곳이나 존재하는 부유하고 강력한 유력인사와 시골 사람과의 전형적인 관계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이란의 경우든 이란 이외의 경우든 일반 대중들은 강력한 후원자에게 선물이나 충성의 맹세를 하며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약자들이 이득을 얻기 위해 강력한 후원자에게 환심을 사려는 노력은, 특히 시골의 경우에,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1960년대와 70년대에 아야툴라 호메이니와 알리 샤리아티는 순교자들 중 순교자인 이맘 후세인을 억압받은 자들을 구하기 위해 압제자들에 대항한 혁명가로 묘사하였다. 이들은 진실한 무슬림이라면 이맘 후세인의 중재를 수동적이고 간접적으로 구하기보다 그의 혁명 정신을 적극적으로 본받고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면, 무하르람 달 시작 일 주일 전 그리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수립 3달 전인 1978년 11월 23일 아야툴라 호메이니는 아슈라를 즈음하여 이란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는 지금 위대한 영웅심과 자기희생의 달인 무하르람을 맞이하고 있다. 이 달에 인간의 순수한 피는 무력에 대항해 승리했으며, 진리는 거짓을 영원히 비난하였고, 모든 압제자와 악마 같은 권력자의 이마에 치욕의 낙인을 찍었다. 역사를 통해 무하르람 달은 다음 세대들에게 무력에 대항한 승리의 길을 가르쳐 주었고, 막강한 권력도 진리에 의해 패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시켜 주었다. 또한 무하르람 달에 무슬림들의 지도자인 이맘 후세인은 역사의 모든 압제자들에 대항하여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호메이니는 샤에 대항한 자신의 투쟁을 야지드에 대항한 이맘 후세인의 투쟁과 견주었다. 아울러 그는 백성들이 이맘 후세인의 순교를 수동적으로 애도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모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이맘 후세인의 순교에 대한 그의 해석은 시아 이맘들을 혁명적 지도자로 간주한 샤리아티의 해석과 일맥상통하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샤리아티의 사상은 호메이니의 사상보다 더 급진적이고 파격적이었다.

 

후세인의 순교에 대한 행동주의적·혁명주의적 해석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맘이라는 용어의 해설에서 이미 고찰했듯이, 종교적 상징들은 역사의 다양한 과정에서 등장하여 다양하고 광범위한 의미를 제시해 주었다. 호메이니는 대중들의 상상 속에 명시된 카르발라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잠재되어 있는 의미를 강조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카르발라의 신화적 의미를 강조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 1905-11년의 이란 헌법 혁명 기간 동안 한 저명한 아야툴라는 그 당시 이란을 통치했던 까자르(Qajar) 정권을 이맘 후세인과 그의 추종자들을 살해했던 우마이야조에 비유하였다. 1960년대 이란의 초등학교 5, 6학년 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었다. "이맘 후세인은 억압과 불의를 용인하지 않았다. 카르발라에서의 그의 순교는 폭정에 대항한 저항의 한 본보기였다." 또한 반정부 데모와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1963년 무하르람 달에 후세인과 추종자들의 고통을 추모하는 많은 관행적 설교들은 후세인이 야지드의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듯이 샤의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후세인의 순교에 관한 이야기 자체만으로 시아가 전제 정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카르발라 대학살 사건이 일어난 후 1,300년 이상 동안 시아, 특히 12이맘파는 어떤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그 정권을 항상 피동적으로 인정하였다. 단지 사회적·정치적 상황이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도록 유도했기 때문에 카르발라 신화의 혁명적 해석이 정치적으로 유효적절하게 적용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