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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의 정파

지평선의순례자 2008. 7. 18. 14:44

시아의 정파

출처 이란 알아가기..^^ | 기대
원문 http://blog.naver.com/yht0427/140010681496

 

 

이슬람의 분파들을 종교에서 파생된 종파라고 부르기보다 정파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 이유는 초기 이슬람은 중동 사회의 종교적 기능만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사회 통합적 부분들까지 담당했고, 더구나 종교적 교리보다 정치적 신념이나 후계자의 문제로 갈라진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수니와 시아의 분파도 누구를 칼리프로 세우느냐, 즉 정치적 후계자 문제에서 파생되었고, 시아 이슬람의 대표적 분파들인 열두이맘파와 자이드파 그리고 이스마일파도 그와 동일선상에서 발생되었다. 이들은 정치적 노선의 차이뿐 아니라 시아이슬람의 가장 큰 특징인 선지자 가문인 알리의 가계에서 어느 대까지 신성한 이맘으로 인정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어 명확한 구분을 보여준다.

 

먼저 열두 이맘파에서 믿고 있는 12대의 이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서로 이맘으로 인정하는 가계가 달라지면서 파생되었다. 12대를 거치는 이맘의 가계에서 4번째 이맘까지 인정하고 다섯 번째에서 달라지는 것이 자이드파이고 6대 이맘까지 함께 신성시하고 7번째 이맘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이스마일 파이다.

 

제1대 이맘, 알리 이븐 아부 탈립

제2대 이맘, 하신 이븐 알리

제3대 이맘, 후세인 이븐 알리

제4대 이맘, 알리 자인 알 아비딘

제5대 이맘, 무하마드 알 바킬          -> 제5대 이맘, 자이드 빈 알리 (자이드파)

제6대 이맘, 잘팔 알 사딕

제7대 이맘, 무사 알 카짐                 -> 제7대 이맘, 이스마일 (이스마일파)

제8대 이맘, 알리 알 리다

제9대 이맘, 무하마드 알 자와드

제10대 이맘, 알리 알 하디

제11대 이맘, 하산 알 아스카리

제12대 이맘, 무하마드 알 문타자르 (알 마흐디)

 

위와 같이 12대를 거치면서 시아의 신성한 이맘들의 족보가 완성되었고, 12번째 이맘은 현재 숨어 있는 상태이고, 마지막 심판의 날에 다시 나타나 세상을 이슬람의 세상으로 바꾸어 놓을 구세주이다.

 

1. 12이맘파 -Twelve Imam Shiism

 

칼리파를 알리의 가문에 되돌려주려는 운동으로써 시작된 시아이슬람은 곧 독특하고 구별되는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앞의 카르발라 사건을 통해 언급한 대로 우마이야조의 알리 가문에 대한 박해는 알리의 아들인 하산과 후세인을 죽이는데 그치지 않았다. 시아파 전승에 따르면 후세인의 아들과 손자도 독살 당했으며 그 후 몇 세대나 이 박해가 계속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시아파의 핵심은 이러한 정치적 책략의 희생자들을 반신격화 된 순교자로 만드는 데 있었다. 특히 열두 이맘파는 알리로부터 시작되는 12대에 걸친 그의 후손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보여준다. 수니 이슬람에서 단순한 예배인도자의 의미인 이맘을 그들에게 붙이며 훨씬 격이 높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19세기 시아의 한 학자는 이들 이맘들은 인간적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어떤 예언자 보다 흠이 없고 완벽하며 죄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의 의미를 이맘에게 그대로 이용하고 있으며, 메카를 순례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맘들의 무덤이나 그의 친척들의 무덤까지도 신성시하고 순례한다.

 

12이맘의 큰 특징은 마지막 이맘의 재림과 심판이다. 어려서 사라진 열두번째 이맘이 숨은 이맘으로 은둔생활을 하다가 마지막 심판의 날에 나타나 세상을 심판한다는 사상이다. 특이한 점은 예수도 함께 내려와 12번째 마지막 이맘인 마흐디의 조력자로 활동한다는 이론이다.

 

이 열두 이맘파는 시아 이슬람의 가장 큰 분파이다. 현재 시아 이슬람의 85%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란 인구의 90%가, 이라크 인구의 60%가 열두 이맘파이다. 과거 후세인 정권에서는 소외받는 다수였지만 2005년 이라크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새로운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의 시아파가 이란과 손을 잡을 것을 우려하고 있다. 또한 레바논에서도 30% 이상이 열두이맘파이다. 하지만 그들은 레바논 빈곤층의 대명사로 분류되고 있다.

 

2. 자이드파- Zaydism

 

자이드파는 열두 이맘 가운데 후세인의 아들인 알리 자인 알 아비딘 즉 4대 이맘까지 인정하고 5대 이맘은 무하마드 알 바킬이 아닌 그의 형제인 자이드 이븐 알리를 마지막 이맘으로 인정하고 숭배한다. 이들 알리로부터 내려오는 다섯 이맘에게는 특별히 마술적 능력이 주어 졌다 믿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다섯 이맘파’라고도 불렀다.

 

후세인의 손자인 자이드는 무하마드의 혈통을 중요시 여겼다. 무하마드의 딸인 파티마와 조카인 알리의 혈통에서만 이맘이 나온다는 지금 열두 이맘에서도 인정하는 신학적 교리가 이때부터 생기기 시작하였다. 또한 자이드는 알리 이외에 어떤 칼리프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합법적 칼리프가 아닌 찬탈자로 간주되었다. 그는 후세인처럼 비합법적 정권을 혁명으로 뒤엎는 것이 이맘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반란을 일으키다가 이라크 쿠파 근처에서 전사한다.

 

자이드파의 교리는 알리 이후 모든 칼리파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수니와 차이가 거의 없다. 비록 이맘 즉 칼리파는 하싼이나 후세인의 자손 가운데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들의 이맘은 완전무결성이나 인간과 신 사이의 중재적 기능을 지녔다고 보지 않아 단순히 왕이나 최고 종교지도자에 불과하다. 시아파로 분류하지만 시아와 수니의 중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9세기말경부터 최근까지 자이드파는 남부아라비아의 예멘지방을 지배했으나 그 인구의 다수는 수니무슬림으로 남아 있다. 자이드파의 이맘이 예멘을 1000년이나 지배했으나 1962년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쫓겨나고 이 나라는 공화국이 되었다.

 

3. 이스마일파 - Ismailism

 

제 4대 이맘의 사후 계승권 문제로 자이드파가 생성된 후 제 6대 이맘 사후 계승권 분쟁이 다시 일어난다. 제6 대 이맘 자파르 알 사딕이 죽고(A.D 765) 나서 장남인 이스마일이 술을 마신다고 비난하면서 대다수의 시아 무슬림은 7대 이맘으로 작은 아들인 무사 알 카짐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가 진정한 이맘이 아니라 형인 이스마엘을 이맘으로 추종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은 이스마엘에게 계시의 신성한 능력이 있다고 믿기 시작하였고, 이스마일의 집안에서 ‘숨은 이맘’(시아 이슬람의 구세주)이 나온다고 선언하면서 계승권 수호 투쟁을 지속하였다. 이들을 이스마엘파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다른 말로 일곱 이맘파라고도 불린다.

 

이들은 이 계승권 투쟁 과정에서 이슬람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켰으며, 역동적인 선교 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다. 또한 그들은 시아파를 통합적 교의로 이끌었다. 특히 이란에서 발생한 마니교에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적 의례에서 이원론적인 사항을 많이 도입했다. 이스마일파는 글자 그대로를 믿는 대중에게는 초보적 신조만을 포교했으나 무하마드가 받는 계시의 표면적 의미 속을 뚫고 들어가 진정한 내적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정밀한 해석을 통해 포교했다.

 

또한 조용히 상황에 순응하여 지내려는 열두이맘파와 달리 이스마일파는 압바시야 칼리파를 반대해서 격렬한 선전투쟁을 진전시켜 이 칼리파들을 타도하려 했다. 이들의 영향력은 상당하였다. 이스마일 사망 후 100년경인 9세기 말에 그들은 압바시야조가 쇠약해가는 틈을 이용하여 이라크에서 농민과 도시노동자의 불만을 선동하여 맹렬한 투쟁을 벌였다. 함단 카르마트(Hamdan Qarmat)의 지도 아래 까르마트(Qarmathian) 공화국을 세워서 11세기까지 이라크뿐만 아니라 예멘과 바레인에 영향을 끼쳤다.

 

이스마일파의 가장 큰 성공은 AD 909년에 자신을 ‘숨은 이맘’으로 선언한 우바이 둘라 알 마흐디(909-934)에 의해 이집트에 세워진 파티마 왕조이다. 이 왕국은 후에 튀니지의 시실리섬에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969년에 그들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옛 수도 푸스타트 근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그 이름을 까이라(al-Qahirah 승리자)라 하니 곧 오늘날의 카이로의 시작이다. 카이로는 곧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고 이 새로운 수도에서 파티마조는 아즈하르(al-Azhar)성원을 건립하여 커다란 도서관을 운영했다. 이 성원은 곧 신학의 배움터가 되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알려지고 있다.

 

파티마 왕국은11세기 초에 국력이 전성기에 이르러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도 병합하고 이라크의 압바시야조 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11세기 말에 내분이 일어났고 더구나 셀죽 터키의 침입과 십자군원정 등으로 국력은 쇠잔했다. 그 후 파티마조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어 카이로 근교에만 그 권위가 미치다가 1171년에 아이유브조의 살라 알 딘(1138-1193)이 카이로를 점령하여 이 조를 멸망시킨 뒤 이스마일파를 억압하고 수니이슬람을 다시 이집트와 시리아의 국교로 회복시켰다.

 

그러나 이스마일파는 파티마조의 종말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Assassin의 어원이 되는 암살단파로 명맥이 이어졌다. 이스마일파의 한 페르시아인 지도자는 11세기 말에 파티마조와 결별을 선언하고 카스피아해 남쪽 산속에 추종자와 함께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그들이 바로 암살단파이다. 이들은 대마초를 복용함으로써 천당의 쾌락을 미리 맛보게 되고 임무수행에 있어서는 초인간적 용기를 갖게 된다고 보았다는데 대마초를 뜻하는 아랍어 al-hashishin에서 유래하여 십자군을 통해 유럽으로 흘러들어가 assassin이라는 단어가 형성되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들이 대마초를 복용했다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치적 살인을 감행했다는 사실은 확실한 것으로 증명했다. 암살은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 의례적 행동이어서 가해자는 항상 단검을 사용하였고 도피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으며 암살대상자는 대체로 고위직의 인사였다. 최초의 희생자는 셀죽조의 술탄 말리크샤(1072-1092)의 재상으로 유명한 니잠 알 물크(1091 죽음)였다. 암살단파는 셀죽조가 12세기에 들어와 쇠약해지는 틈을 이용하여 페르시아의 변방지역과 서부 시리아의 산악지역에 새로운 요새를 만들었다. 십자군이 두려워한 것은 시리아의 암살단파와 그 우두머리인 '산속의 쉐이크(sheikh al-jabal)'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