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드의 저항운동
출처 : 너! 딱 찍혔어~ | 찰칵
원문 : http://blog.naver.com/mj1126_/120011992366
▶터키 쿠르드족의 저항운동
저항운동의 역사
1차대전 이후 1920년에 체결된 세브르(Sevres) 조약에서는 터키 동남부 쿠르드인의 자치권 보장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터키-쿠르드 연합군의 터키 독립전쟁 승리 이후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1923년 로잔 조약 체결 이후 쿠르디스탄은 결국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소련 등 5개국으로 구획됐다.
이것은 쿠르드인의 투쟁을 가속화시켰으며, '조국 갖기 운동'은 1939년까지는 매우 격렬하게 광범위한 투쟁으로 나타나게 된다. 1938년까지 25차례의 봉기가 일어나는데 그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1925년 2월 낙쉬반디(Naqshibandi) 수피 종파의 지도자인 쉐이크 사이드(Sheikh Said)에 의한 반란이었다. 이것은 대규모의 조직적이고 종교적 목표의식에서 출발된 저항운동이었다. 점차 쉐이크 사이드 반란이 확산되어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면서 터키 정부의 커다란 위협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터키 정부의 엄청난 반란진압으로 쉐이크 사이드가 처형되고 많은 쿠르드인이 학살됐다.
따라서 이 사건 이후 쿠르드 민족주의를 마비시키고자 하는 조치들이 케말 아타투르크에 의해 이루어졌다. 모든 투르크 의식과 집회가 금지되고 민속의상 착용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강력한 탄압 하에서 자연히 쿠르드 민족운동은 정체기를 맞았으나 1927년에 이르러 쿠르드 민족조직은 코이분(Khoybun)(4)이라는 단체로 통합됐다. 그러나 이란과 터키는 합동으로 쿠르드 반란을 진압하게 되고 코이분 활동도 감소하게 된다.
1937년 중반까지 터키 정부는 쿠르드인 거주지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치권 확보를 위해 쿠르디스탄 전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강제이주로 인해 쿠르드의 민족적 연계는 단절됐다. 이러한 강압 정책은 쿠르드족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켜 1937년 세이드 레자(Seyid Reza)의 반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이것은 시리아 쿠르드족의 가담으로 더욱 확대됐다.
쿠르드족의 반란은 1938년을 고비로 소강되는데 터키 동부에서 석유가 발견되지 않자 석유이권에 대한 외세의 간섭이 줄어들고, 터키 정부가 동부지역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5년 쉐이크 사이드의 반란으로 본격화된 투르크 저항은 1938년까지 약 100만에 달하는 쿠르드인의 사망과 강제 이주를 촉발하게 됐다. 이후 쿠르드 반군들은 무장이 해제됐고, 쿠르드의 부족 중심 체계가 와해되기 시작했다. 쿠르드 민족주의자들도 무장 방식을 지양하고, 이념투쟁과 민주정치의 명목 하에 쿠르드 민족의 실리를 취하는 현실적 노선의 채택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는 극심한 동화의 시기였다. 민속의상과 쿠르드어 사용이 통제되고, 쿠르디스탄에서도 터키어가 강제로 공용어로 결정됐다. 쿠르드식 칭호가 사라지고, 지방의 부족장인 쿠르드 쉐이크들은 축출되어 주민들과 격리됐다. 또한 주민의 대규모 이주를 통해 쿠르드인의 근원지를 근원적으로 변화시켜버렸다. '쿠르드'란 용어 자체의 언급이 금해졌고, 쿠르드인들은 공식적으로 '모국어를 잃어버린 산악인'으로 표현됐다. 이로써 쿠르드인들의 민족적 정통성과 문화적 주체성은 터키 내부에서 공식적으로 소멸됐다.
공화당 일당체제가 종식되고 1950년 이후 다당제가 도입되면서, '동부지역의 유권자' 개념 때문에 쿠르드 민족주의 운동은 정치권 내에서 제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1960년대 들어 정치적으로는 다당제가 도입되고, 사상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같은 좌파이념이 팽배해졌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쿠르드 문제제기와 함께 출판물이 증가하게 되며, 터키어-쿠르드어 공용 잡지는 1980년까지 출판과 폐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1960년대의 쿠르드 정체성 운동은 정치권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라크 쿠르드족이 무스타파 바르자니(Mustafa Barzani)의 지도하에 쿠르드 자치운동을 시작하자, 1965년 터키 쿠르드족에게 자그을 주게 된다. 1961년 압둘라 외쿠텐(Abdullah Okten)에 의해 조직된 '터키쿠르드민주당(T-KDP)'의 본격적인 활동을 고무시켰다.
1967년과 1968년에는 경제개발과 교육기회 증대, 의료시설 확충 등을 요구하며 동부의 디야르바크르와 실반 등지에서 집단시위가 잇달았다. 1969년에는 이스탄불, 앙카라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쿠르트 엘리트들이 최초의 합법적 쿠르드 조직인 '동부혁명문화협회(DDKO)'를 창설했다. 정치적으로는 쿠르드족의 자치와 분리를, 이념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제창했다.
1970년대 터키를 주도했던 데니즈 게즈미쉬(Deniz Gezmis) 마히르 자얀(Mahir Cayan)은 '터키인민해방정당-전선(THKP-C)'과 '터키인민해방군(THKO)'을 각각 조직했으며 이들은 대표적인 마르크스계열의 급진좌파였다. 1970년대를 통해 적어도 20개 이상의 지하조직이 주로 자얀을 추종하며 창궐했다. 또 다른 좌파조직은 '마르크스-레닌계 터키공산당'의 틀 속에서 생성된 '터키 노동자-농민 해방군(TIKKO)'이었다. 이 조직은 수많은 투쟁과 무장테러에 가담했으며, 대 터키 테러 활동에 가장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70년대 터키 내 극단적인 정치혼란과 경제적 악화는 쿠르드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자신들의 Identity를 확인하고 제한된 목표설정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쿠르드 지하세력들은 두 가지의 다른 노선을 추구했는데, 하나는 기존 좌파정당의 체제 속으로 스며들어 제한적인 민족투쟁을 지속하는 세력이며, 또 다른 하나는 독자적으로 비합법적인 투르드 정당을 조직하여 조직적 투쟁을 하려는 급진적인 행동세력이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까지도 터키 내에서 노선갈등과 쿠르드 단체끼리의 대결을 조장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4) 1차 세계대전 중에 해외에 망명 중인 쿠르드 지식인들에 의해 결성되어, 쿠르드인 다수지역의 자치를 위해 투쟁했던 조직.
▶PKK의 등장
PKK(5)의 태동은 1974년 혁명 청년단(DEV-GENC)에 가담한 압둘란 외잘란과 그의 쿠르드 동료들의 저항운동으로 볼 수 있으나 공식적인 설립은 1978년 11월 27일 터키 쿠르디스탄의 상징적인 수도인 디야르바크르에서였다. 그러나 1980년 혁명 이후 PKK는 세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다. 이들은 쿠르디스탄의 독립이라는 목적 하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PKK의 지하활동은 1970년대 터키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에 편승하여 터키 국민들에게 극도의 위압감을 주게 되나, 그들의 폭력적 방법과 비인도적 인명살상 방식에는 대다수 터키 쿠르드인들은 반감을 갖고 있다.
1980년 군부 쿠데타 이후 PKK는 보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투쟁의 형식을 전환한다. 첫째 단계는 전략적 방어기(1990~1995)로, 지하 무장공격을 통한 기습공격과 터키의 체제혼란 시기이고, 둘째 단계는 군사적 평형기(1995~2000)로, PKK의 자유지대를 설정하여 터키 내부의 모든 좌파 무장 세력들과 연대하여 대규모 군사봉기를 획책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단계는 적극적 공격기(2000~)로, 2000년 이후 터키 동남부에서의 민중봉기를 통한 쿠르디스탄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쿠르디스탄해방연대(HRK)'의 창설을 공표하고 터키 군부와의 전면적인 게릴라전에 돌입했다.
PKK는 아르메니아의 대 터키 투쟁단체인 ASALA와도 연대하며 효과적이고 총체적인 '기습-잠복'이라는 산악 게릴라전을 계속 펼치고 있다. 1990년부터는 이스라엘에서의 팔레스타인 봉기, 즉 Intifadah 방식을 도입하여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외부세계에 쿠르드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PKK는 폭력투쟁을 한층 강화하고 있으며 터키와 거의 전면전 상황에 돌입해 있다. 1994년에서 1995년에는 대도시에서 극단적인 방법으로 쿠르드 민족 문제를 부각시키려고 하며, 터키 동부의 일정지역에서 소위 그들의 '해방지역 회복'을 기대하고 있다.
10년간 쿠르드와의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의 숫자는 무려 14000명(TDN, 1994. 12. 27)에 이르며, PKK에 희생당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터키 쿠르드인이라는 것이다. 동족상잔의 문제가 터키 쿠르드 민족문제가 안고 있는 또 다른 비극인 것이다.
PKK가 터키 내에서 효과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배경은 외부로부터의 엄청난 물량지원과 함께 쿠르드 지역 내부의 동조와 지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에는 쿠르디스탄의 험준한 지형뿐만 아니라, 쿠르드 지역을 경원시하고 무차별 소탕을 하고 있는 터키 정부의 무절제한 정책도 동조하고 있다.
(5) 쿠르드 노동당, Partia Karkaren Kurdistan
▶현재의 상황
ㄱ. 총체적 동화의 전개
터키 당국이 쿠르드족에게 가지는 기본 정책은 '쿠르드 정체성의 부정과 터키화'이다. 터키 공화국이 '케말리즘'을 새로운 국가이념으로 정하고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해 나가면서, 쿠르드어 뿐만 아니라 종교적 의례와 전통적인 복식에 대한 제한도 병행했다. '터키=쿠르드 동일체 원칙'은 일제시대 '내선일체'와 유사한 형태이다. 박해와 차별의 강화를 통한 쿠르드인의 터키화는 공화국 초기부터 전 분야에 걸쳐 체계적이고 총체적으로 전개됐다.
ㄴ. 언어 동화
언어는 한 민족의 존재를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에 문화동화정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다. 공화국 초기 터키어를 사용하는 쿠르드인이 불과 3~4%에 불과한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언어말살 정책은 쿠르드 정체성을 와해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쿠르드 지역에 대한 터키화의 초보적인 단계는 초중고의 설립을 통한 터키어 및 터키화 교육이었다. 1928년에 일어난 문자혁명으로 터키의 전반적인 문맹률 감소에 기여했으나 터키인만을 위한 교육편중으로 쿠르드인의 교육여건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ㄷ. 강제 이주와 인구 분산
1932년에는 쿠르드 이주법이 제정되어 전체인구의 5% 한도 내에서 쿠르드인의 터키 정착지역 강제이주가 시작됐다. 1930년대에 실시된 이 계획은 지금까지도 부분적으로 계속되고 있으며, 접경도로의 건설에 쿠르드 노동력이 강제 동원되고 그들이 닦아놓은 도로에 의해 이라크와 이란과의 접경지대는 더욱 효과적으로 통제될 수 있었다.
ㄹ. 출판과 학문의 관제화
쿠르드어 저술과 출판, 방송도 철저히 봉쇄되고, 외국에서의 쿠르드어로 출판 제작된 잡지나 신문, 테이프 등의 국내 반입이 금지됐다. 전통적인 노래와 민속, 설화나 영웅담은 터키화됐고, 쿠르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는 극히 미미한 편이며, 1970년까지 '터키=쿠르드' 통합 이론에 저촉되는 저술의 출판은 금지됐다.
ㅁ. 종파적 이질감
터키 쿠르드족은 종파적으로 이슬람교의 정통파인 수니파에 속하고, 그 중에서도 샤피 계통이 주를 이룬다. 종파를 중시하지 않는 이슬람의 보편성과 국제적인 성격상 종파적 대립으로 인한 갈등과 충돌은 미미한 편이다. 다만 이슬람 신비주의를 따르는 수피파와 4대 칼리프 알리를 추종하는 시아파 계통의 알레비파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신앙과 관습에 대한 우월성 및 집착 때문에 종종 터키인들과 심각한 마찰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슬람 내에서의 종파적 다양성과 미세한 신앙 관습의 차이를 극복하고 이슬람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민족적 이질감을 녹여 '터키=쿠르드 통합'을 꾀하고자 하는 논의가 터키 이슬람주의자들의 주된 목표이다.
ㅂ. 경제적 불균형
터키에서도 쿠르드 지역은 가장 낙후된 곳이다. 병원과 교육기관 같은 시설도 턱없이 부족하고, 실업률은 국가 전체 평균을 웃돈다. 쿠르드인들의 터키어 문맹률은 80%에 달하고 있으며 마을의 대부분이 전기, 상수도, 도로의 혜택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사회간접시설과 복지시설이 터키인 지역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지역갈등과, 1차 산물을 헐값에 팔아 비싼 공산품을 구입해야 하는 경제구조의 극심한 왜곡이 쿠르드인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주요인이다.
ㅅ. 정치·군사적 박해
쿠르드인들은 터키 공화국 헌법에 의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노조나 단체, 정당을 결성할 수 없다. 또한 형법 141조와 142조에 의거하여 터키의 법질서를 파괴하거나 정치적 안정을 위협하는 자에게는 5년에서 15년에 달하는 중형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쿠르드 무장 세력과 지하 조직들은 이 법에 의해 가혹한 처벌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ㅇ. 와해된 동족 질서
절대다수의 많은 쿠르드인들이 터키인으로 터키사회의 완전한 일원으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또한 쿠르디스탄의 자치와 독립을 위한 방법론과 노선의 차이는 현저하여 쿠르드 정치 조직간의 갈등과 반목도 심각하다. PKK, KDP, PUK 등의 서로간의 갈등과 주도권 장악 문제 역시 많은 위험을 안고 있다.
▶이란 쿠르드족의 저항운동과 대 쿠르드 정책
이란 쿠르드족의 개관
이란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은 이라크나 터키의 쿠르드족보다 탄압의 강도는 약했으나, 마찬가지로 분리주의 운동은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이란의 쿠르드족은 이란인들과 언어적·문화적 유사성을 더 많이 공유하고 있어서인지 이란 정부는 그들에게 문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으로 인해 오늘날의 쿠르드족은 이란으로부터의 분리·독립보다는 오히려 동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란의 경우 많은 소수민족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독립에 대한 기타의 소수민족들의 반응을 고려해 더욱 쿠르드의 독립을 저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 정부는 항상 쿠르드족을 '순수 이란인'이라 주장하며 쿠르드인과 이란인의 구분을 회피한다. 또한 인구 구성에 대한 공식통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인구 파악이 불가능하다. 쿠르드족은 이란 인구 6천만 명 중 1천만 명 이상이 자신들이라 주장하나, 이란정부는 사실을 왜곡 축소하는 실정이다. 이것은 이란 내 쿠르드인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된다.
심코의 봉기와 레쟈 샤의 대 쿠르드 정책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이란령 쿠르드 지역은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군의 전투장이 됐으며, 1차 대전 작전에 쿠르드, 아르메니아, 아시리아, 터키, 이란, 아랍인 등의 갈등 속 상호공존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오스만 술탄은 연합군에 대항하여 대 이슬람 성전을 호소하며 무슬림 쿠르드족으로부터의 지원을 유도했다. 쿠르드족과 아르메니아 소수민족 사이의 배타적 종교관계(6)를 이용한 술탄은 쿠르드족을 제 1차 세계대전에 동원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민족감정을 약화시키려 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오스만제국의 붕괴를 계기로 쿠르드족은 그 지역에 있는 각국 정부에 대항하여 격렬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그 중 쿠르디스탄 북부의 Sahkak 쿠르드 종족의 부족장 심코(Ismail Agha Simko)는 1918년 여름부터 1922년까지 우르미예(Urmieh) 호수 서부 및 남부 전 지역을 장악하고 자치정부를 수립했다. 그는 모든 쿠르드 종족의 독립을 부르짖었으며 영토를 계속 확장해나갔으나 아제르인과 쿠르드인 사이의 불화를 증폭시키는 문제를 야기했다. 그러나 결국 심코의 봉기는 레자 칸에 의해 수습되고 1930년 심코는 전사한다.
심코의 봉기는 이란에 독립된 자치지역을 설립하려는 최초의 중요한 시도였으나 초기의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쿠르드 국가를 세우지 못했다. 그 원인은 첫째, 쿠르드 민족의 정체성이라는 명확한 이데올로기가 결핍된 상태에서 개인적 야망과 외부의 희미한 민족주의 조류를 타고 봉기했으며, 둘째, 조직적으로 지원해 줄 정당이나 현대적 의미의 행정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비 쿠르드 부족뿐만 아니라 쿠르드 부족들간의 파벌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1920년대 민족국가 형성과정에서 이란 정부가 중앙집권화 정책에 따라 소수민족의 분리주의 운동을 강력히 억제한 것에 기인한다.
이란 전 지역에 걸쳐 심코와 다른 부족 지도자들에 대한 레쟈 샤(7) 군대의 승리로 많은 소수민족 집단에 대한 새로운 억압과 탄압이 시작됐다. '국민계도위원회'라는 기구에 의해 모든 언론매체를 통제하면서 쿠르드족 등 소수민족의 인종적 정체성과 문화적 동질성을 말살하려 했다. 또한 교육, 출판, 그리고 대중 연설에서의 쿠르드어 사용이 금지됐고 쿠르드 전통 민속의상 착용이 금지됐다. 더불어 근대화 추진에서 쿠르드 지역은 제외되어 낙후된 곳으로 남아있게 된다.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
1941년 2차 세계대전 중 레쟈 샤 중앙정부의 붕괴에 편승한 쿠르드 민족 독립운동의 절정은 1946년 이란에서의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 창설이라고 할 수 있다. 마하바드 공화국은 쿠르드 민족주의의 중요한 상징이다. 이 공화국의 창설을 계기로 쿠르드인들은 그들 자신의 모국으로서 국가의식을 완전히 자각하며 실질적인 쿠르드 민족의 자결권과 자주권을 1년 남짓 갖게 된다.
당시 신생국 이란, 이라크, 터키의 민족주의 강화정책과 강대국 영·소·불의 대중동 제국주의 정책에 따라, 쿠르드족은 자신이 거주하는 이들 중동 각국에 동화될 것인가 아니면 파멸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었다. 이러한 위기감 속에서 창설된 쿠르드 공화국은 치명적인 민족생존의 위협에 대한 자위적인 유일한 대응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영소 연합군의 점령에 의한 힘의 공백기를 이용해 1942년에 '쿠르디스탄 부흥위원회(Komala-e Zhaian-e Kurdistan)'라는 결사체를 설립하고 약칭해서 코말라(Komala)라고 불렀다. 후에 코말라는 소련과 더욱 긴밀한 유대관계 속에서 지원을 받게 된다.
쿠르드 민주당(KDP)와 마하마드 공화국
소련의 대 이란 침투 및 압력 정책의 도구는 이란 좌익세력 민중전선 투데당과 이란 내의 소수민족들의 분리 독립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소련은 코말라와 아제르바이잔 민주당(Democrat Party of Azerbaizan)을 연계시켜 쿠르드-아제르 분리주의 운동을 강화시켜 대 이란 압력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코말라와 아제르바이잔 민주당의 적대관계를 감지하고 있던 소련은 쿠르드-아제를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기존의 코말라 조직을 해체시키고 새로운 쿠르드 신당을 창당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1945년 9월 새로 창당된 쿠르드 민주당 KDP(Kurdish Democratic Party)인 것이다. KDP는 미국식 모델에 기초한 민주주의라는 당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소련에 의해 조정되는 KDP는 코말라의 민주주의적 의사구조 결정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이 곧 밝혀졌다. 코말라가 자유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삼는 반면, KDP는 카지 무함마드 중심의 1인 독재 권위주의적 체제로 판명됐다. 결국 카지 무함마드를 대통령으로 1946년 1월 22일 정식으로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The Kurdish Republic of Mahabad)이 선포됐다. 그러나 이란의 유엔과 미국을 통한 대내외적인 양면 외교전략으로 결국 1946년 5월 9일 소련군은 이란 북부지역에서 완전히 철수 완료했다. 마침내 쿠르드 공화국은 1946년 12월 17일 붕괴되고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이미 며칠 전에 패망했던 것이다.
이란 군부는 마하바드 국가의 과거 흔적을 모두 지우기 위해 쿠르드어 사용금지, 쿠르드어 인쇄기 폐기, 쿠르드 서적 소각, 민중교육 등을 금지하고 사회간접시설들도 파괴시켜 쿠르드민족이 재흥할 잠재력의 근원을 모두 제거하려 했다. 공화국 붕괴의 결정적 요인은 그동안 국가를 갖지 못한 경험으로 국가운영의 미숙, 외세 특히 소련에 의존한 카지 무함마드 정부의 사상노선에 대한 동족들의 의구심, 국익에 따른 소련의 대 쿠르드족 이용과 배반, 아제르바이잔과 연합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이란 정부에 대한 위기감 조성, 사병을 거느린 봉건적인 각 부족장들과 도시 출신 엘리트 쿠르드 지도자간의 갈등, 이슬람 종파에 따른 쿠르드 동족간의 비협조, 그리고 쿠르드족의 민족국가 의식의 결핍 등이다.
팔레비 독재정치와 쿠르드 민족주의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의 멸망 이후 샤는 자국의 여러 소수민족의 무장해제 및 중앙집권화 강화정책에 따라 정치적 탄압을 시작했다. 1949년 2월 4일 테헤란 대학에서 샤 암살미수사건을 계기로 수백 명의 KDP 무장독립군과 그 동조자를 체포 구금했다. 그 후 1951년 모사데그(Mossadegh) 수상의 민족주의에 기초한 자유선거를 통한 민족주의적 이상에 고무된 쿠르드 지식인들과 샤 정권하에서 불법화된 KDP당원들은 은밀히 정치무대로 복귀했다.
反샤 정책노선을 취하며 1953년 8월19일 쿠르드족이 지지하던 모사데그 정권은 영국과 미국의 CIA의 지원을 받는 샤 왕당파의 쿠데타에 의해 붕괴됨으로써 이 정권하에서 그들의 권리를 찾으려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따라 1956년 KDP는 비밀회동을 갖고 사회주의 강령을 채택했던 것이다.
샤 정권은 군사력에 의한 무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및 경제적 보상을 통해 선별적으로 쿠르드족 지도자들에게 회유정책을 구사했다. 쿠르드족의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샤는 학교의 정규과목에서 쿠르드어를 제외시키고 민족 언어 말살정책을 시도했다.
한편 이란정부는 이라크 정권을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이라크의 민족지도자 물라 무스타파 바르자니와 쿠르드 전사 Peshmergas에게 원조를 해주게 된다. 그러나 물라 무스타파의 샤 정권 및 외세에 대한 의존정책, 더 나아가서 공조정책은 결국 쿠르드 민족운동에 역기능적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 혁명과 호메이니의 대 쿠르드 정책
이슬람 공화국을 탄생시킨 이슬람 혁명에 편승하여 쿠르드 민족주의는 1946년 마하바드 공화국 시대보다 훨씬 더 정치적으로 활성화 및 조직화되어 자치권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게 된다. 그러나 쿠르드족의 자치권 획득 희망은 강력한 중앙집권의 이슬람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 Khomeini)에 의해 깨지고 만다. 그는 이란에서 쿠르드민족 자치권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1979년 4월 후세이니는 호메이니에게 쿠르디스탄의 자치권과 이에 대한 헌법 초안의 수용을 요구했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쿠르드족의 자치권 요구는 이슬람 공화국에 대항하는 막시스트 사주에 의한 음모라고 주장하고 1979년 봄과 여름동안 쿠르드와 이란 정부 사이에 빈번한 충돌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이슬람 혁명정권은 KDP 지도자들과 협상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5가지 계획안을 제시했으나 요구를 거부당했다.
KDP의 민족주의 운동
이란 쿠르드 민주당 KDP 사무총장이 된 가셈로우(Abdul Rahman Ghassemlou)는 마하바드 공화국 멸망 이후 지하화 된 KDP를 합법적인 쿠르드 정치조직체로 재편하여 대중정당으로 변모시켰다. 가셈로우는 1973년부터 암살당한 1989년까지 KDP를 이끌었다. KDP는 국가 형태와 새로 제정될 신헌법에 쿠르드 민족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내용이 포함되도록 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1979년 6월 18일 KDP가 주장했던 쿠르드 자치권의 요구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1980년 9월 22일 이라크의 대 이란 침공시 KDP는 사담 후세인 정권으로부터 병참 및 군사지원을 받으려 했다. 이것은 이란 영토통합을 지지한다는 가셈로우의 주장과 배치되는 행위로서 KDP의 많은 당원들이 그의 신뢰성에 의문을 갖고 정치적으로 내분을 일으켰다. 1988년 이라크의 쿠르드족 마을 비인도 공격을 계기로 가셈로우는 바그다드 정권과 단교했다. 가셈로우가 1989년 7월 13일 저격당하고 KDP는 마르크스 노선을 따르는 코말라의 재등장을 막지 못했고, 쿠르드 민족세력의 힘이 결집될 수 없을 정도로 국내외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가셈로우 사망 후 신임 사무총장으로 Sadeq Sharafkandi가 선임되나 그 역시 1992년 7월 17일 암살당한다.
Komala와 민족주의 운동
이란 KDP는 교사, 상인, 공무원 등 도시 중산층 및 지식인 계층에 기반을 둔 반면, Komala는 쿠르드 지역의 하층 노동자 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코말라의 기원은 사회주의자인 Sharifzadeh, Sulayman, Abdullah Moini에 의해 조직됐다. 테헤란과 타브리즈에 있는 일단의 쿠르드 대학생들이 여기에 고무되어 1969년 쿠르드 및 이란의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지하혁명조직 기구로 코말라를 결성한 것이다. KDP와 같은 쿠르드 조직이 과거 역사와 투쟁에 대한 심리적 연대를 통해 민족성을 강화하려 했던 것에 비해, 코말라는 정치교육을 중점적으로 실시하고 지방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계급의식 및 게릴라전 원리를 가르쳐서 민중의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삼고자 했다.
초기 코말라는 쿠르드 소수민족 문제를 넘어서서 초민족적 기구로 발전하는 가운데 당원수의 확장을 위한 노력에 성공했으나, 이란의 쿠르드 민족 전체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는 할 수 없었다. 코말라는 자체 내분 및 KDP와의 많은 갈등에도 불구하고 쿠르드 민족의 자치권과 민족주의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향후 이란에 대항한 무장투쟁도 계속할 것으로 생각된다.
(7) 레자 칸은 1921년 2월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이란 군 총사령관 겸 국방상이 됐다. 그는 소수민족 진압작전에 착수하여 국가 기강을 확립하며 1925년에는 팔레비 왕조의 초대 군주 레쟈 샤(Reza Shah)로 등극했다.
(6) 쿠르드족은 수니 무슬림이며, 아르메니아인은 기독교인이다.
▶이라크 쿠르드족의 저항운동과 대 쿠르드 정책
이라크 쿠르드 저항운동의 개관
이라크에서 쿠르드 운동이 지역적인 개념을 갖게 된 것은 1916년 아랍 봉기 때부터이며, 이라크 쿠르드 족은 1920년 세브르 조약에 의해 오스만 터키 제국에서 영국의 위임통치로 설정된 협정구역인 이라크에 잘려진 산악지대에 거주하고 있다. 터키, 이란, 이라크의 3국에 접경된 완충지대로서 국경지대 역할을 해왔으며, 실질적인 쿠르드족 저항운동은 국경지역 지방도시와 마을지역으로 제한되어 있다. 특히 모술과 키르쿠크 유전 지역은 경제 이권 문제로 이라크 정부와 쿠르드족 간의 의견충돌을 불러일으키는 정치문제이다.
쿠르드족은 이라크 통일에 크게 기여해 왔다. 16세기부터 오스만 터키제국에서 페르시아 제국과의 완충지대까지 자치 환경을 누리고 있던 쿠르드족은 19세기에 오스만 술탄이 직접 통치하자 쿠르드인이 이에 저항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쿠르드족 저항운동의 시발이었다. 오스만 터키에서부터 뿌리를 가진 쿠르드족 분리주의 운동은 이라크 내에서도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소수민족 문제이다. 1천 8백만 명의 이라크 인구 중 쿠르드인은 4백만 명에 해당되며 지리적으로 1/3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영국의 위임통치하에서 쿠르드인들은 준 자치적인 삶을 누리고 국가건설의 희망을 안고 있었다. 또한 영국은 쿠르드 지역에서 쿠르드어 사용, 교육언어로 쿠르드어 인정, 쿠르드 지역행정어로 쿠르드어 인정 등을 이라크가 받아들이도록 정치적 압력을 행사했다.(8) 그러나 1932년 이라크의 독립 후 이라크는 쿠르드족에게 지역적으로 준 자치적 환경을 허용했으나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쿠르드 운동에 대해 강경정책을 취하고 있다.
바르자니 쿠르드 족의 저항운동
1930년대 중반부터 도시지역에도 쿠르드 저항조직이 바르자니 세력의 민족투쟁에 영향을 받아 조직되기 시작했다. 이라크 쿠르드 무장 세력인 무스타파 알바르자니와 도시지식층과 중산층 중심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세력을 이끌고 있는 '함자 압달라(Hamza Abdalla)'와 제휴하여 1946년 8월 독자적인 이라크 KDP를 창당했다. 쿠르드족의 저항운동은 정당의 성격을 가진 쿠르드 민주당(KDP)(9)과 쿠르드 애국동맹(PUK)(10)으로 나뉜다. 특히 바르자니 세력은 봉건주의 환경의 충성심이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탈리바니가 주장하는 사회주의와 토지개혁을 반대하고 있다.
무스타파 알 자르바니가 쿠르드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했던 1979년까지는 탈라바니의 PUK 세력은 바르자니 세력의 영향력 밑에서 저항운동을 해왔다. 그러나 무스타파 알바르자니 사후 독자적으로 도시 중심의 파업 또는 사보타지 등 테러 중심전략과 군사전략을 병행한 쿠르드 저항운동을 이끌고 있다. 1958년 이후부터 1979년 운명할 때까지 무스타파 알 바르자니에 의한 쿠르드 봉기는 쉴 새 없이 계속됐고, 그는 이라크의 쿠르드족 정신적인 지도자가 됐다. 이라크의 바아쓰 정권은 같은 사회주의 이념으로 사회주의 정책과 토지개혁 정책으로 이념적으로 같은 노선인 탈리바니의 PUK 세력을 지원하여 쿠르드족을 분열시키고 있다.
1979년 무스타파 사후 이라크의 KDP 저항세력은 무스타파의 아들인 마수드 형제(Massud: 동생은 Idris)가 이끄는 KDP 세력과 1975년 6월 잘랄 탈라비니가 조직한 쿠르드 애국동맹(The Patriotic Union of Kurdistan; PUK) 세력이 중심이 되고 있다.
걸프 전쟁과 쿠르드족 저항운동
이라크 정부는 이라크 영토 내의 일부에서 살고 있는 이라크 국민으로서 쿠르드 자치를 인정한다는 원칙하에서 쿠르드족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반면, 쿠르드족은 민족투쟁 과정을 통해 정치 경험을 배우면서 점진적으로 독립된 국가 건설을 위한 쿠르드 민족 분리주의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후세인 대통령은 쿠르드족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만이 이라크의 안정과 발전을 위하는 정책으로 쿠르드 문제를 제일 정책으로 결정했다.
이라크는 이란과의 지역전쟁을 하면서 국내에서는 북부 지역의 쿠르드족들과 계속 싸울 수밖에 없었다. 쿠르드족은 바르자니 시대를 종언하고 도시 혁신 세력인 탈리바니가 이끄는 PUK 세력의 쿠르드 저항시대를 시작했다. 그러나 보수 세력인 KDP는 PUK가 독자적으로 세력이 신장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이란-이라크 종전과 사암 후세인 정권의 대 쿠르드 강경책으로 쿠르드족의 저항운동은 새로운 재난의 시대를 맞이했다. 쿠르드 봉기는 1991년 3월 걸프전쟁에서 패한 이라크 정부에 대한 쿠르드 민족의 선전포고인 제 2의 전쟁이었다. 걸프전 패배 1주일 만에 바르자니 쿠르드인들이 이라크에 귀환하여 Ranya 지방 도시에서 봉기를 시작하여 단기간 내 전 쿠르드 지역으로 확산됐으며, 쿠르드인들은 쿠르드 전 지역의 95%를 장악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991년 4월 11일 한달만에 쿠르드족은 정부의 강경정책인 휴전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어 또 한 번 쿠르드인의 수난시대가 시작됐다. 쿠르드 봉기로 남은 정치문제는 쿠르드 난민문제이다. 쿠르드 지역 대부분이 70년 이상의 민족저항운동으로 파괴되어 터키와 이란 내 쿠르드 난민문제 뿐만 아니라 이라크 내 쿠르드 난민문제도 심각한 상황이다.
쿠르드족은 1990년 걸프전쟁을 전략적으로 적절히 이용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쿠르드인들은 유럽인에 대한 불신감으로 걸프전쟁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또한 이란-이라크 전쟁 중의 이라크 정부가 쿠르드 저항운동을 강경 진압했기 때문에 쿠르드 지도자들은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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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쿠르드인들이 민족주의 운동과 유엔 연맹에 대한 쿠르드 대표들의 호소는 영국에 의해 좌절됐지만 영국은 유엔연맹의 현지조사 보고서의 건의에 의해 이라크 정부가 쿠르드 지역의 문화적인 특성을 인정하도록 노력했었다.
(9) 바르자니에 의한 산악 농촌 지역 중심의 전통 보수 세력.
(10) 탈리바니에 의한 도시 중산층 중심의 혁신주의 세력
▶현재 상황과 전망
쿠르드족의 오늘날의 상황과 앞으로의 전망 (결론을 대신하여...)
쿠르드족에 대한 이번 연구 조사를 통해서 내다본 그들의 앞날은 그리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다. 체계적이고 총체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쿠르드 정체성의 부정과 민족성 말살 정책으로 쿠르드족에게 가해지는 지배세력의 박해와 차별에 대한 그들의 자세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민족적 정통성과 문화적 주체성 유지를 위한 저항보다는 자기들 자신의 생활 개선을 위한 동화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 가는 경향으로 바뀌고 있는 실정이지만 다방면에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나름대로의 존재를 지키기 위한 힘겨운 투쟁을 계속 전개하고 있다.
민족자결권에 대한 국제법의 명백한 보장에도 불구하고 소수 민족 집단은 국가를 이루지 않는 한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이나 권리가 지배 국가에 의해 제한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쿠르드족에 대한 억압이 가장 심한 터키의 경우에 있어서 쿠르드 문학작품과 자취 의식을 고취시키는 정치적인 서적들이 암암리에 배포되고 있으며 쿠르드 말을 잊어버린 2세 쿠르드인들을 위해 터키어로 된 이념 서적을 출간하여 잃어버리고 있는 민족혼을 일깨우는 작업도 병행되고 있다. 또한 소설 작품과 영화를 통해 호소하고 있는 쿠르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대중성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야말로 쿠르드의 문화적 회복을 위한 더 없는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활동에서도 보면 쿠르드 지역에 대한 사회·경제적 지원, 교육·의료시설의 확충과 같은 비정치적인 분야에 주력하는 등,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들이 국회로 진출하고 장관직에도 등용되고 있는 상황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산악 목축 지대의 쿠르드인들이 오랫동안 외부와 고립된 상태에서 자신들의 전통과 고전적인 삶의 방식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통과의례를 포함한 많은 생활의 부분에서 쿠르드족 나름대로의 전통적인 의미와 그 절차가 남아 있다.
이처럼 쿠르드족들은 언어, 춤, 음악, 민요, 구전 같은 여러 다른 요소와 함께 자신들의 고유한 전통적 통과의례를 유지, 계승해 가고 있는 한, 그리고 지배세력의 박해와 차별이 계속되는 한 쿠르드 정체성의 유지는 당분간 강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민족 스스로만의 노력으로는 어느 정도의 유지는 될지라도 그 이상의 발전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자국의 이익을 생각하기보다는 세계적인 인류애 차원에서 다양한 외신 보도를 통해 세인의 관심과 여론을 조장하는 등의 방법으로 국제적인 문제로 부각시켜 강력한 외교적 차원으로 쿠르드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문헌
▷ 이희수, 1992 <쿠르드족의 기원문제> <<한국 이슬람학회 논총>> 제 2집
▷ 이희수, 1992<쿠르드 민족운동의 史的 고찰(1920-1930년대)> <<한국중동학회 논총>> 제 13집
▷ 이희수, 1992 <터키 쿠르드족의 분리주의 운동- 그 배경과 전망> <<중동연구>> 제 14호
▷ 이희수, 1997 <쿠르드족의 통과의례> <<민족학연구>> 제 2집, 서울 : 한국 민족학회
▷ 장병옥, 1995 <이란 쿠르드족의 민족주의 운동> <<중동연구>> 제 14호
▷ 홍순남, 1995 <이라크의 쿠르드족 저항운동> <<중동연구>> 제 14호
▷ 편집국, 1988 <동아세계대백과사전> 서울 : 동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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