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과 중앙아시아의 고대와 중세
1]중동지방의 고대왕조
(1)파르티아왕조(BC247-AD226)
마케도니아
이란 북동부에 이란계통 유목민이 세운 왕조로 건국자 아르사케스의 이름으로 아르사케스왕조라고도 했으며, 중국에서는 '안식국(安息國)이라고 했다.
페르시아가 알렉산더에게 망하고 부하들이 나라를 분열하여 다스릴 때에 셀레우코스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셀레우코스2세가 이집트와 싸우는 틈을 타 파르티아왕조를 세웠다.
셀레우코스왕조의 안티오코스2세가 BC 247년에 죽자 독립국가가 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제국의 첫 창시자인 아르사케스 1세는 박트리아 지역의 그리스 왕 디오도토스가 지배하는 지역의 총독으로 있다가 반란을 일으켜 실패하여 서쪽으로 도망가서 제국을 세워 카스피해 남동쪽을 본거지로 하여 바벨로니아, 메디아를 다스리다가 북방인도까지 다스리는 대제국이 되었다.
BC 53년 카레(하란)에서 로마군과 싸워 이겨 로마가 동쪽으로 팽창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아시아와 그리스 그리고 로마 간의 무역 통로 대부분을 장악함으로써 후에 중국과 로마 사이에서 중국의 문화를 로마에 전하여 훗날 '
AD226년에 옛 페르시아 족인 사산왕조에게 멸망했다.
(2)박트리아왕조(BC246-BC138)
알렉산더가 세운 도시국가 중에 박트리아주에 속했다.
현재 아프카니스탄의 북쪽의 고대국가이며, 그리스인이 세운 나라이다.
박트리아(현재 발흐)에 수도를 정하고 인도까지 점령한 적도 있는 큰 제국이었다. *대월지(쿠산계)에 정복되었으며, 이 지방을 근거로 쿠산왕조가 일어났다.
*간다라 미술이 이 왕조의 유산으로 생각한다. 불교와 접촉하여 불교문화를 남기기도 했다.
*대월지(?-AD1세기)
중국 한나라 시대에 중앙아시아 아무다르야강 유역에서 활약한 이란계 또는 투르크계 민족으로 중국 전국시대 말기에 서몽골부터 황하상류에서 동, 서 투르키스탄 일대에 미치는 대 세력이었다.
BC3세기말 흉노에 쫓겨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무다르야강 북안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아프가니스탄에 대국을 세우고, 당시 헬라 식민국 박트리아를 BC138년에 정복하고 중심지로 했다.
BC139년에 장건의 제안을 거절했다.
후에 대월지는 쿠산왕조에 대신했고, 황하상류에는 잔존세력이 남아 소월지라 했다.
인더스강의 지류인 카불강 하류에 위치하며 현재는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현에서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칸다하르가 간다라이며, 칸다하르는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 중 집권 탈레반의 본부인 이곳에 2001년 10월 초 맹폭격을 가한 곳이기도 하다.
BC3세기와 AD5세기경사이에 만들어진 그리스와 로마형식의 불교예술이 생겨났다.
간다라 지방은 BC15세기에 아리아인이 이곳을 통하여 인도로 들어갔고, 그 후 아케메네스족, 알렉산더, 파르티아족, 쿠샨족, 사산왕조의 페르시아, 서돌궐 등이 지배했다.
그래서 동서문화를 혼합한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킨 것이 간다라예술이다. 석가모니는 보리수와 법륜 등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었으나 불상은 없었다. 석가모니는 불타, 부다, 석존 등의 이름으로도 불렀다. 인도인은 불타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내는 것을 꺼려서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간다라 지방에 살던 알렉산더의 부하들이 불타를 믿게 되었고, 불타도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그리스 제우스신의 조각상처럼 본떠서 불상을 만들었다. 이 무렵의 불상은 코가 높으며, 눈이 움푹 들어가고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하여 얼굴이 서양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약간의 동양 것이 첨가되어 지금의 불상이 되었으나 서양인의 모습이 남아있다.
(3)사산왕조(AD224-651)
이란민족이 고대에 페르시아제국을 만들어 알렉산더에게 망하고 후에 파르티아 제국을 건설했다.
고대 페르시아인 들이 다시 파르티아제국 위에 페르시아제국을 재건설한 국가가 사산왕조이다.
사산은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인 사산(Sassanian)의 손자이며 군주인 파파크의 아들 아르데시르 1세가 창시했고, 이 나라는 신정국가이다. 국가 체제가 모범적으로 잘 되어 후에 무굴제국과 회교국에 계승되었다.
서쪽은 로마와 비잔틴제국과 항상 마찰이 있었으며, 동쪽은 서(西)*돌궐(突厥)의 공격을 받았다.
이란민족의 힘을 잘 발휘한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아라비아에게 망했다.
이란인은 스스로는 아리야(Ariya)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귀한-숭고한' 뜻으로 쓰인다.
평화의 조화를 연꽃으로 상징한다고 한다.
*돌궐(6세기 중엽-744)
돌궐
돌궐은 Trk의 복수형 Trkt의 음역(音譯)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는 Trk를 음사(音寫)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쉽게 말하면 투르크의 한문표기이고 가한(可汗)은 칸(Khan)의 한문표기로 카간이라고 한다.
(돌궐)
돌궐은 AD 552년 예니세이강 상류와 바이칼호 지방에 살았던 투르크 종족의 한 부족으로서 알타이산맥 방면에서 몽골지방의 고대 유목민족인 유연(柔然)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중 한 씨족인 아사나씨(阿史那氏)의 만인의 장(長)이라는 뜻인 족장 토문(土門)이 유연과 철륵을 격파하고 독립하여 일리가한(伊利可汗)이라 했다. 철륵(鐵勒)은 당나라와 송나라가 투르크족을 부르던 이름이다.
AD 563-567년 그의 아우 디자불로스는 서방으로 진출했고, 3대 목간가한(木杆可汗) 때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에프탈을 멸망시켰다.
그 결과 돌궐은 동쪽으로는 중국 둥베이(만주)와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까지 세력이 미쳤으나 동족간의 다툼으로 AD 583년 분열하여 동돌궐은 몽골고원을 서돌궐은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다.
동돌궐은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에 걸친 중국 내부의 혼란을 틈타 중앙집권화를 도모하여 그 세력이 강대해졌으나, 당나라의 공격과 철륵과 여러 부족의 독립 등으로 AD 630년 동돌궐을, AD 657년 서돌궐을 당나라가 멸망시키고 2명의 가한을 두어 통제했다.
630년 이전을 동돌궐 제 1 제국(전 돌궐), 682년 이후를 제 2 제국(후 돌궐)이라 부른다.
7세기말 서돌궐 지역에서는 돌기시(突騎施)가 독립했으나 동돌궐에서는 AD 682년 제 2 제국 제 1대 일테리시가한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어 독립했다.
AD 692년 일테리시가한이 일테리시가한이 죽은 뒤 동생 카파간카간(가한)은 조카가 어린 것을 기화로 가한을 쟁탈했다.
카파간카간은 거란, 키르기즈, 탕구트, 바슈밀, 투르기시 등의 여러 부족을 쳐서 영역을 확대했고, 동서교통의 요지를 차지하여 다시 돌궐의 전성시대를 이룩했나 말년에는 정치가 문란해져서 철륵부족이 반란을 일으켜 진압했지만 바이루크의 습격을 받아 AD 716년 진중에서 사망했다. 그 뒤 카간의 분쟁으로 골출록의 아들 퀼테킨이 형을 빌게카간(毘伽可汗)으로 세웠으며, 퀼테킨은 군권을 장악하여 부족간의 안정을 도모했다. 빌게 카간은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정벌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734년 빌게 카간이 독살된 후 내란이 일어난 틈을 타 바슈미르, 위구르, 카를루크 등 여러 부족들이 독립함에 따라 후 돌궐은 744년 철륵의 한 부족인 위구르에게 멸망했다.
서돌궐은 지리적 중요성으로 동서 문화와 경제교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돌궐은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하여 돌궐비문을 남겼다.
916년 돌궐 중에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요나라를 세워 발해를 멸망시키고 서쪽으로는 탕구트와 위구르 등 여러 부족을 제압하여,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까지 지배했다.
AD 1125년에 요가 금 나라에 망할 때에 서돌궐 자리에 서요를 세웠다.
돌궐은 뒤 장의 투르크의 여러 부족과 역사에서 간단하게 다룬다.
(동돌궐과 발해국)
발해가 건국하던 AD 698년은 제2돌궐의 전성기로 묵철가한의 재위 기간이었다.
당시 돌궐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당을 압박하여 당은 수세에 놓여 있었다. 발해의 대조영은 당을 견제하기 위해 돌궐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후 돌궐은 궐특근이 주도한 쿠데타가 성공했고, 731년 궐특근이 사망하면서 그의 형인 비가가한이 20여 년간 돌궐을 유지하지만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위기를 틈 타 당은 적극적으로 발해를 다시 견제하려고 나서 발해는 732년 대규모 해군을 동원하여 당의 산둥 반도의 등주를 점령했다.
734년 비가가한이 사망한 후 돌궐은 멸망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745년 위구르 제국이 성립한 후 756년 안록산이 장안을 점령하자 위구르는 원병을 보내어 당의 장안을 757년 탈환했다. 중국 지역이 혼란에 빠지면서 안록산의 난과 위구르의 강성은 발해에 위협적이었다.
발해 문왕은 거란을 완충지대로 두어 위구르의 공격에 대비했다.
840년 위구르가 멸망하면서 북아시아의 강력한 위협 세력이 제거되므로 발해는 외부적인 모든 위협에서 벗어나 번영을 유지했다. 그러나 925년 12월말에 거란이 세운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여 보름만인 926년 1월 15일에 멸망당했다.
2]마호메트와 사라센제국
사라센
(1)마호메트(570-632. 6. 8)
예언자이고 회교의 창시자이며, 그의 이름에서 마호메트교 또는 이슬람교라고도 한다. 아라비아 원음의 '무하마드(Muhammad)'는 '알라(Allah)의 사도'이라는 뜻이다.
마호메트는 570년에 태어났으나 부친 압둘라는 일찍 죽어 숙부 밑에서 자랐다. 부호인 과부 카디자(하디자)의 대상에서 일하며 시리아와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유대교와 기독교에 접하여 이 때에 회교의 기본 지식을 갖추었다. 성실한 그에게 반한 카디자는 청혼하여 25세 때에 40세의 과부와 595년에 결혼했다. 3남4녀를 낳았으나 아들은 모두 죽었다.
610년 40세에 메카 교외에 '히라'산에 들어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알라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계시의 내용이 코란9장에 있다.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것을 결심하지 못하자 부인이 제일 먼저 신자가 되어 그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여러 신을 부정하고 유일신 알라 신 앞에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했다. 이것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교리를 종합하여 새로운 교리를 완성한 것이다. 이 사상은 당시 지배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것으로 지배계급이 미치광이라고 조소했다. 그러나 신도수가 증가하므로 불안을 느낀 지배자들이 박해를 시작했다.
622년 9월 24일(회교력 622. 7. 16) 70여명의 신도와 함께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탈출한 것을 '히즈라(헤지라-Hegira)'라고 하여 회교력의 기원으로 삼았다.
일부는 유대교로 가서 환영을 받았으나 회교의 메디나군이 메카군과 싸워 패할 때에 협력이 기대되었던 유대교의 비협조로 관계가 악화되었고, 유대인들처럼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드리는 것도 메카로 바뀌었다. 메디나에서 그는 정치가와 재판관 되어 군대를 조직하고 교단을 조직하여 자신이 큰 제사를 드리고 순례를 정하여 신정정치를 했다.
627년에 메카군대가 메디나를 포위했을 때에 도시의 주위를 도랑을 파서 방어에 성공했다. 630년1월에 메카로 진격하여 10월에는 잔당을 몰아내고 '카바' 신전의 많은 우상을 파괴했다. 메카를 회교의 근거지로 삼고 전 아라비아를 통일하여 이집트까지 회교를 강요했다.
632. 6. 8(회교력11.3.13)일 애처 아이샤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62세로 죽은 마호메트의 죽음은 신자가 그의 신성을 실험하기 위해 독약을 넣은 독배를 마시게 한 것이 이유라고 전한다.
계시와 설교는 코란 114장 안에 적혀있다.
기독교 진영인 유럽은 이슬람교를 '한 손에 코란, 다른 손에 칼'이라고 표현했다. 또 마호메트를 비하하기 위해 여려 여인을 거느리는 호색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고 한다.
(2)경전 코란(또는 꾸란)
코란에 의하면 알라신만 유일한 신이며 율법은 모세가, 복음은 예수가 선포했으되 진정한 예언자는 마호메트이고 그의 계시만이 최종의 것이다.
[창세기→모세(유대교: 율법)→예수(그리스도교: 복음)→마호메트(이슬람교: 예언)
천국은 생명의 과수와 물이 흐르고, 300가지 식사, 영원한 젊음과 정력, 72명의 미인 아내, 8만 명의 하인이 있다고 한다. 반면 지옥은 뜨거운 물을 끝없이 마시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지옥은 그들이 사막에서 받은 고통이고, 천국은 그들이 고통 속에서 바램을 표현하고 있다.
(3)실천사항(5행)
1) 유일신 알라에게 예배하고 마호메트가 예언자이다.
2) 하루 5번 메카를 향해 기도하며 금요일에는 특별기도를 하라.
그들이 처음에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으나, 메디나에서 메카를 정복하기 위하여 기도의 방향을 메카로 향했다.
3) 믿음에 따라 이웃에게 베풀어라.
4) 9월에 단식하라. 이것은 가난한 것을 이해하고, 도우라는 뜻이다.
5) 메카를 순례하라. 이것은 631년에 마호메트가 메카를 순례한 것에 유래한 것이다.
이상을 5행이라 한다. 순례가 예언을 외우는 것보다 중요하고, 코란의 낭송은 죄사함보다는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평생에 꼭 한번 이상은 순례를 하여야하며 도중에 사망하면 천국으로 간다고 믿어 노약자, 병자가 순례객이 많아 순례 중에 사망하는 자가 많은 이유이다. 순례 중에는 금욕(마음, 성, 생활)과 손톱, 머리는 못 깎고, 큰소리나 화를 내지 못한다.
메카에 가면 '카바' 벽상의 검은 돌에 입 맞추고, 우물의 물을 뜬 뒤에 성단을 7바퀴 돌고, 언덕에 올라 7개의 돌을 던지고, 제물로 쓰일 짐승 잡는 일을 한다.
3]사라센제국
어느 제국의 이름이 아니고 회교의 이념으로 하는 칼리프가 지배하던 시대의 나라을 사라센제국이라고 하며 어원은 라틴 사람들이 '사라세니(Saraceni)'라고 부른 것이 유래이다. '사라세니'는 시리아 초원의 유목민을 가르키며 이것은 '사막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초기는 시리아 유목민만 그렇게 부르다가 후에는 이슬람의 제왕 조를 전부 총칭하여 불렀다. 십자군을 통하여 전 유럽의 호칭이 되었다.
제국의 동쪽은 7세기부터 13세기 중반까지, 서쪽은 15세기말까지 인도 서부에서 이베리아(스페인) 반도에 이르는 지역에 흥망(興亡) 했다.
(1)우마이야왕조(661-750)
이 왕조를 옴미아드(Ommiad)왕조, 또는 전(前)우마이야왕조이라고도 한다.
마호메트가 죽은 후에 칼리프(예언자의 후계자)로 선출된 아부바라크는 비잔틴의 속국인 시리아와 페르시아의 사산왕조에 원정군을 보냈다. 2대 칼리프 오마르(Omar) (634-644)는 재임 중에 동쪽은 이란, 서쪽은 이집트의 서쪽까지 이르는 대제국이 되었으며, AD638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661년에 칼리프의 내란으로 우마이야가의 무아위야 칼리프는 정통칼리프인 알리를 몰아내고 세습칼리프를 수립했다.
우마이야가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다메섹)에 도읍하고 우마이야 왕조를 세워 750년까지 지속되었다. 칼리프 압델 말리크(Abd al-Malik, 685-705)와 그의 후계자인 알-왈리드(Al-Waleed)는
예루살렘에 황금돔 사원(691)과 *엘-악사 사원(Al-Aqsa Mosque, 709-715)을 세워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을 3대 성지로 만들었다.
이 왕조는 종교의 경건은 퇴색되었고, 정복사업에 치중했는데 8세기 중반에는 동쪽은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북서부에 이르고, 서쪽은 북아프리카를 경유하여 711년에는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한 후 프랑스투르 까지 진격했으나 피핀에게 패했으나 에스파냐지배에는 성공했다.
750년 이 왕조도 아바스왕조에 의하여 붕괴되었다.
*엘-악사 사원(Al-Aqsa Mosque, 709-715)
예루살렘의 상징인 황금돔(The golden Dome)은 회교의 3대 성지로 여기는 엘-악사 사원이다.
사원 안에는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이 있는데 한쪽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던 제단이자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 자리라고 전해지며 다른 쪽은 마호메트가 딛고 하늘로 승천했다고 전한다.
이곳은 유대교, 기독교, 회교의 성지가 한 자리에 있어 서로 양보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회교가 통치하던 AD638년 이후 지금까지 유혈사태의 발단이 되고 있다.
이곳에 사원이 생긴 이유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호메트의 어록집이라고 할 수 있는 하디스(Hadith)에 의하면 마호메트는 천사 가브리엘의 인도를 받아 예루살렘의 폐허가 된 솔로몬 성전으로 가서 아담, 모세, 아브라함, 이삭, 이스마엘, 그리고 예수 등의 선지자들과 기도했다는 내용이다.
다른 하나는 코란의 '밤의 여행'(Al-Isra' w Al Mi'raj)과 관련이 있는데 '영광을 받으시기에 전능하고 합당하신 알라께서 마호메트를 밤중에 거룩한 사원 메카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사원 엘-악사로 데려갔다'(Qur'an, Sura 17:1)라는 구절이 있다.
아랍어로 '엘-악사'는 '가장 먼 곳에 위치한'뜻의 단어로 회교에서는 이 장소를 예루살렘으로 해석하여 '엘-악사'를 만든 것이 이제까지 추상적으로 코란에서 다루어졌던 마호메트의 '밤의 여행'이 구체성을 띠게 되었고, 예루살렘이 회교의 성지로 역사화 된 것이다.
오늘날 회교들은 마호메트가 밤에 예루살렘으로 여행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2)아바스왕조(압바스왕조: 750-1258)
마호메트의 숙부인 아바스 후손이 우마이야 왕조 위에 아바스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우마이야의 왕조 일족이 에스파냐로 도망가서 건설한 것이 후(後)우마이야 왕조이다. 아바스왕조는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기고 1258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대에 이란계의 문화와 회교문화를 융합하여 찬란한 사라센문화를 만들었다. 아바스왕조는 동쪽에는 여러 왕조가 독립하여 지배하는 땅은 10세기는 이라크지방만 남았다가 후에 부이 왕조가 다스리다가 1258년 몽고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3)후(後)우마이야(756-1231)와 그라나다왕국(1231-1492)
칼리프의 아랍 군이 북모로코를 정복하고 711년 베르베르족이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하여 수도 톨레도(똘레도)를 비롯하여 세비야, 메리다, 사라고사, 레온, 갈리시아, 포르투갈 등을 차례로 정복하고 스페인의 거의 모든 지역에 지배권을 확립하여 수도를 코르도바(꼬르도바)로 정했다.
756년 아바스왕조에게 쫓겨난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일족인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이곳에 망명정권을 세워 도시를 건설했고, 계속하여 지배한 것을 말하며, 이것을 후(後)우마이야(옴미아드)왕조라고 한다.
10세기 때 수도 코르도바는 동쪽 바그다드와 콘스탄티노플에 견줄만한 서방 제일의 도시로 발전하여 ‘서방의 보배’라고까지 평판이 났으나 아라곤 왕 알폰소 1세와 그의 양아들인 카스티야 왕 알폰소 7세의 저항으로 차츰 쇠퇴하다가 1236년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코르도바를 빼앗기자 이슬람 왕 유세프는 그라나다로 도망쳐와 나스르 왕조를 세웠다.
그들은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하여 세련된 회교 문화를 이베리아 반도에 꽃 피웠으며 1323년에 알람브라 궁전완성과 별궁의 유적을 남기었다.
스페인의 부부 왕 페르난드2세와 아사벨1세가 결혼하여 강대국이 되어 그라나다왕국을 공격하자 대세가 기울은 마지막 왕 보아브딜은 1492년 콜롬부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는 해에 그라나다에 백기를 꽂고 조용히 물러나 아프리카로 와서 불쌍한 최후를 마쳤다.
14일의 행복이야기
칼리프 아브드 알라 흐만 3세(891-961, 재위 912-961)는 8대 군주로 후 우마이야 왕조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군주로 그는 영리하여 할아버지가 아들을 나두고 손자인 그를 칼리프로 계승하게 했다고 한다. 흰 피부에 잘 생긴 용모지만 키가 작았다고 하며 그는 부인 6321명에 자녀는 618명이었다고 하며, 그의 유서에는 49년 통치기간 중에 14일만 행복했다고 기록했다.
유대의 솔로몬 왕도 1000명의 부인과 부귀영화를 누리고도 전도서 1: 2절에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일생에 6일만 행복했다고 고백했다.
반면 ‘삼중고(三重苦)의 성녀’라고 불리는 헬렌켈러 여사는 19개월 되던 때 열병을 앓은 후,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었었으나 그녀는 일생은 나날이 행복했다고 한다.
(4)사라센의 문화
아바스왕조는 세계 여러 나라를 무역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배워와서 이란문화와 아라비아문화의 바탕에 융합하여 찬란한 사라센문화가 되었다.
그들은 배로 가는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와서 비단과 도자기를 가지고 갔다. 그들이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파선하여 말레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에 상륙하여 회교를 자연히 전하게 된 것이 지금도 그들의 종교가 되었다. 회교는 무역항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전파되었다.
사라센이 남긴 문화는 화학, 음악, 수학, 동물학, 역사학, 의학, 윤리학, 가정학, 정치학 등이다. 화학(케미스트리)의 발달은 쇠를 금으로 만들려는 연금술의 덕택이다. 알콜, 설탕(슈거), 쇼파, 알루미늄, 커피 등이 그들의 용어가 현재의 용어가 되었다. 대수학과 아라비아 숫자 그리고 과학과 화학에 공적을 남겼고, 건축은 고딕(뾰족탑)을 남겼으나 조각은 우상이라고 만들지 않았다.
문학은 유명한 것이 '아라비아나이트(천일 야화)'이며, 천일야화의 내용은 샤헤지만 왕이 인도와 중국을 여행하려고 형님 샤리아드에게로 가다가 선물을 가지려 다시 집으로 와보니 왕비가 흑인노예와 정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사살했다. 형님도 사냥 나간 틈에 형수도 흑인과 정사를 하는 것을 보고 그들도 사살했다. 형님과 여행을 하는 중에 악마도 여자에게 쫓겨나는 것을 보고 돌아와 여자들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하고 하루에 처녀 한 명씩 죽였다. 처녀들은 다 도망했고 재상의 딸 샤하라자가 자진하여 동생 디나르쟈와 함께 왕 앞에 나가 언니가 동생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왕도 재미가 있어 죽일 것을 미루다가 자기의 잔인한 것을 반성하고 아름답게 생긴 언니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로, 천일야화라고도 한다. 그 외에 '신드바드 이야기'와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그리고 '알라딘과 이상한 램프' 등이 전한다.
4]동쪽의 여러 왕조
아바스왕조의 동쪽에 생겼다 사라진 타히드왕조, 사파르왕조, 사만왕조, 카란한왕조, 서요를 이름이라도 알기 위하여 간단히 설명한다.
(1)타히드왕조(821-873)
이란에 최초로 독립된 이란계 왕조, 아바스왕조의 해방노예 출신 타히드가 이란 동북지방에 태수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바로 왕조를 창설했다. 5대에 걸쳐 주로 이란동북부를 통치했고, 사파르왕조에 멸망했다. 이란의 명칭은 최초에는 이란이라고 부르다가 후에 페르시아라고 부르고 다시 이란으로 불리게 되었다.
(2)사파르(대장장이)왕조(867-903)
야쿠브라는 사파르(대장장이) 출신이 이란계 토착민을 규합하여 이란 남서부에 왕조를 열었다. 후에 사만왕조에 멸망했다.
(3)사만왕조(874-999)
중앙아시아에 지배한 이란계의 최초 회교왕국, 사만의 증손자 아마드가 독립했다. 동생과 협력하여 *호라즘을 점령했고, 900년에 사파르왕조를 멸망시켰다.
4대 나스르2세는 이란 본토를 지배하여 전성기를 맞이했고, 동서무역의 요충지 사마르칸트를 번창하게 하여 바그다드를 능가하게 만들었다. 남러시아와 북유럽에 사만왕조의 화폐가 다량으로 발견되어 당시의 발전상을 짐작하게 한다. 학문도 보호받아 페르시아어로 문예부흥에 이룩하는데 기여했다. 카라한왕조에 멸망했다.
*호라즘(호레즘)
고대로부터 문명이 발달하여 킵차크스텝(초원)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대상무역의 중심지역이다.
(4)카란한왕조(999-1232)
중앙아시아에 최초의 회교계 유목민이 세운 투르크왕조로 '일리크한'왕조라고도 한다. 기원은 위구르족의 일파인 것으로 생각한다.
사투크보그라한이 회교로 개종하고 남방의 카슈가르를 병합하여, 사만왕조를 멸망시키고, 남방의 호탄을 정복하여, 파미르 동서지방을 투르크화 했다.
11세기 중엽에 파미르를 경계로 동서로 분열되어 서부는 11세기말에 셀주크 투르크에 멸망했다. 동부는 서요에 망했고, 영토는 셀주크 투르크에 넘어갔다.
(5)서요(1132-1211)
서요
1125년에 중국의 요가 금나라에 망할 때 요나라 거란의 왕족 야율대석이 중앙아시아로 이동하여 위구르의 지원을 얻어 카라한왕조를 멸망시키고 왕조를 열어 구르칸(덕종)이라 불렸다. 회교역사가들은 '흑 거란'의 뜻의 '카라 키타이'라고 기록했다.
1141년에 셀주크 투르크의 대군을 물리치고 동서전역의 투르키스탄을 서요의 영토로 했다. 3대가 칭기즈칸(1211년)에 쫓기고,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는 터키계의 유목민 쿠츨루크에 멸망했다. 서요는 중국식제도를 준용하고 불교를 신봉하는 등 중국문화를 서구로 전하는 큰 몫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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