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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세계화와 중세교회

지평선의순례자 2007. 2. 1. 19:33
기독교의 세계화와 중세교회


유럽선교

북부 유럽의 켈트족들은 ‘아일랜드의 사도’라고 일컬어지는 패트릭(St, Patrick)의 30년 동안의 성실한 복음 전파 사역에 의해서 많은 회심자들이 생겨났다. 그 후 아일랜드는 유럽의 교회들이 쇠약해 가게 되었을 때 살아있는 교회로서 그 지경을 밝히는 진리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비교적 기독교의 복음이 늦게 전해진 곳이다. 그러나 3세기 초엽 스페인 남부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렸고, 3세기 말엽에는 스페인 전역에 걸쳐서 많은 교회와 교구들이 세워졌다.
영국에는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해서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북아프리카 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었던 터툴리안(Tertullian)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로마의 장벽 멀리에 있는 영국에까지 나아갔다고 하였다. 314년에 프랑스 갈리아 지방 남부에서 열린 알스 종교회의에 영국의 주교 3명이 참가하였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있다. 이는 그 이전에 영국에 이미 복음이 전해져 상당한 교회의 발전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아시아 선교

소아시아 지방에는 본도와 비두니아를 중심으로 2세기 초엽에 벌써 기독교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3세기에는 본도에서 그레고리 타우마투르구스의 영향력 아래 교회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다. “서기 240년 그레고리가 본도의 주교가 되었을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겨우 17명에 불과했는데 30년 후 그가 죽을 때쯤 그 도시에는 이교도가 겨우 17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3세기 말경에는 이미 갑바도기아를 통해 아르메니아로 복음이 전해졌는데, 위대한 선교사로 알려진 그레고리에 의해 일어난 부흥 운동은 티리다테스 대왕의 회심과 더불어 아르메니아를 기독교 왕국으로 만드는 일에 성공하였다. 메스롭(Mesrob)은 알파벳을 만들었고, 후에는 그들의 언어로 410년에 성경 번역을 완성하기에 이르러 아르메니아인 교회는 역사적인 아픔과 고통을 안고 있는 오늘날에 존재하는 가장 오랜된 기독교교회 중의 하나이다.
아라비아에 복음을 전한 사람은 12사도 중 하나인 마돌로매라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다. 전승적 도마행전에 의하면 주님의 제자 도마가 어떻게 인도 선교를 위해 인도를 향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주님은 도마가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을 원하셨다. 그러나 도마의 대답은 “나는 히브리인으로서 어떻게 인도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였다. 그래서 주님은 도마를 인도의 영향력이 있는 상인에게 노예로 팔리게 섭리하셨다. 아반네스라고 하는 이 인도 상인은 능력 있는 목수를 구하고 있었던 차에 도마를 만나 그를 인도로 데리고 갔다. 당시 인도는 군다포러스 왕정( King Gundaphorus)시대였다. 도마는 결국 그곳에서 왕을 위해 궁전을 짓는 일에 명을 받았다. 그러나 도마는 눈에 보이는 세상적 궁궐이 아닌 하늘 나라에 있는 영적인 궁을 짓기로 마음을 먹고 , 왕에게서 궁궐을 짓기 위해서 받은 많은 물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얼마 후에 왕이 그를 불러 당신이 짓고 있는 궁전을 볼 수 있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 때 도마는 “당신이 지금은 궁전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왕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때에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화가 난 왕은 그를 감옥에 쳐 넣었다. 그러나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나 결국 왕은 도마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고고학자들은 군다포러스가 실제한 왕이었고, 1세기에 인도의 북서 지역을 다스렸다고 말한다. 그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에는 헬라식 철자로 힌도포레스라고 그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음도 증명되었다. 지금도 인도 교회는 주님의 제자 도마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러 역사적인 근거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기독교의 세계화를 생각할 때 로마와 기독교를 떼어서 말할 수 없다. 3세기 말엽이 되어서는 로마가 다스리는 모든 제국의 영역에 기독교인들이 발견될 수 있었다. 특히 “콘스탄틴 황제(274∼337) 자신이 이 새로운 종교에 대해 점진적으로 호응하게 되고 기독교를 제국의 종교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죽기 직전에는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 의해 세례를 받자, 카타콤에 숨어서 신앙 생활을 하던 모든 기독교인들이 모두 공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일은 기독교가 공적으로 로마의 종교 혹은 세계의 종교가 되어지는 데에 큰 바탕이 되는 것이었다. 3세기 말의 기독교 인구를 세어보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어 왔지만 정확한 근거를 가진 결과는 얻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로마 제국 전체의 시민이 오천만명이라고 집계할 때 그 중에서 10퍼센트 정도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을 하는 이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들의 숫자보다도 그들의 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주교와 중세의 암흑기

중세 교회는 먼저 북쪽으로부터 영토를 넓혀 오는 침략자들과 7세기에 일어나 급속하게 그 세력을 확장하게 된 이슬람으로부터 커다란 위협을 받게 되었다. 3세기 중엽부터 오랫동안 계속된 전투적인 북쪽 사람들의 침략은 당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취약했던 서 로마 제국을 결국 패망케 하였다. 고트의 알라릭 왕은 401년부터 로마와의 전쟁을 시작하여 410년 8월 24일 밤에 전격적인 공격을 실행하여 로마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동로마’로 불리었던 콘스탄티노플은 서로마 제국의 명망 후에도 1,000년 이상 더 역사를 이어가게 된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된 몇 가지 이유는 첫째, 정치적인 요인으로서 데오도시우스가 395년에 제국을 그의 두 아들 아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나누어 주어 나라의 힘이 분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관리들이 부패하였으며, 둘째, 경제적으로는 생산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도 비생산직 계급게 속한 사람이 너무 비대하게 많았으며, 셋째, 너무나 오랫동안 북쪽의 침략자들로부터 시달려 군사력이 쇠퇴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교회는 계급적 직분과 제도적 통치를 통해서 사회와 국가를 제대로 새롭게 하거나 바르게 인도하지 못했다.
서로마 제국을 침략했던 여러 족속들 가운데서 가장 그 두각을 나타낸 족속은 고트족이다. 그들은 결국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로마를 침략하는 동안에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당시 고트족의 선교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울필라스로부터 크게 도움을 받았다. 울필라스의 가장 큰 업적은 고틱어의 알파벳을 친히 만들어서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도록 성경(요한복음)을 번역한 일이었다.  

그러나 반달족과 훈족은 침략하는 모든 지역을 초토화함으로써 기독교의 존재 자체에 큰 위협을 주게 되었다. 이 영향은 오늘날까지 남아서 반달족들이 정복하였던 북아프리카 지역등에는 지금도 기독교의 세력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한편 6세기에 그리고리 1세는 영국과 독일의 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심혈을 기울여 서유럽을 기독교화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것은 중세 교회의 선교에 있어서 서 로마 제국의 기독교가 힘을 잃어 가는 중에 나타나게 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선교 사역이었다.

결과적으로 천주교의 중세 암흑 세기는 내적 요인으로는 교회 제도의 세속화였고, 외적 요인으로서는 바바리안들의 침략과 강력한 교회 파괴로 말미암아 찾아왔다고 볼 수 있겠다. 거기에 이슬람의 발흥과 팽창은 또한 기독교회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