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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형님 때문에

지평선의순례자 2007. 1. 9. 16:43

[우물가 이야기]

'우물가 이야기'는 훼잇빌한인장로교회의 격월선교지 "우물가"에 연재하는 칼럼 글입니다. 2-3개월에 하나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도살장의 돼지와 두려운 졸업

 

"신앙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소년 시절에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께서 졸업 시즌이 되면 꼭 하시던 말씀이었다. 중·고등학생 때는 열심히 교회에 잘 출석하던 사람들이 졸업하고 대학교에 진학하거나 직장을 잡으면 예배를 멀리하고 세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경향을 자주 목격하던 목사님의 뼈있는 교훈이었다. 그렇다. 신앙에는 졸업이 없다. 주변 환경이 바뀌면 주님을 섬기는 자세도 휘청거리는 인본주의적 신앙의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한번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일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졸업이 있다.

어느 명문대학의 장학금 수여자가 수혜자에게 던졌다는 연속적 질문을 다시 상기해 본다. "이 장학금을 받으면 무엇을 하겠는가?" "열심히 공부를 해서 좋은 성적을 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 대학교를 잘 졸업해야지요." "그 다음에는?"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똑똑하고 예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들을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미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더 생각을 한 뒤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일하는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가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늙어가겠지요…" "그 다음에는?" 더 대답할 말이 없었다. "......" 장학금을 수여하는 노인은 재차 물었다. "그 다음에는?" "...." 인생에는 졸업이 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이나 한국 할 것 없이 불황이 계속되는 현금(現今)에는 졸업을 해도 대책이 없이 실업자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대책이 없는 졸업은 환호의 시간이 아닌 것 같다. 목적지를 모르면서 그저 코앞에 닥친 과제들을 남들 하는 대로 무작정 따라가기만 하다 보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허무한 멸절의 구덩이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재미있지만 섬뜩한 도살장의 돼지 이야기가 있다. 잡을 만큼 다 자라 힘센 돼지를 도살장으로 끌고 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예전에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방법이 아주 흥미롭다. 돼지우리에서부터 도살장까지 삶은 콩을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뜨려 놓으면 돼지는 그 콩을 하나씩 집어먹으며, 자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죽음의 장소를 발길을 옮겨놓는다. 그의 생각은 코앞에 있는 콩 한 알을 주워먹는 것 이상으로 가지 못한다. 맛있는 콩 한 알, 또 한 알, 그리고 또 한 알… 그 맛있는 마지막 콩 알을 집어먹었을 때 죽음의 사자는 그의 급소를 내려친다. 어느 곤란했던 대학생 이야기와 도살장 돼지의 이야기는 인생의 졸업에 대한 쌍둥이 판 패러디이다.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하는 이 때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할 것은 '진정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점이다. 이것은 비단 졸업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콩 한 알 먹어치우는데 급급한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께서 안타까워하신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사람들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느라고 세월을 다 보내면서 정작 '목숨' 자체에 무감각하여(마 6:25) 그 귀중한 영혼을 도살장의 돼지의 것처럼 홀대하고 만다. 인생 대학을 졸업하는 날에 대해 당신은 어떤 대책을 갖고 있는가? 인간의 영혼이란 전기 코드를 뽑으면 픽 꺼져버리는 데스크탑 컴퓨터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육신은 쇠퇴하고 소멸해간다. 하지만 인간 존재의 중심을 구성하여, 사랑하고 미워하며 즐거워하며 고뇌하는 영혼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 그대로 영원 속으로 진입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모셔들여 졸업 후를 예비해놓고 그분의 인도를 좇아가는 예비 졸업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부활하신 형님 때문에…

 

우리가 신약성서에서 읽는 초대교회 신앙인들 중에서 비기독인 역사가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에 당시의 이른바 세속사에 기록되었던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아주 적다. 일세기의 유대역사를 기록한 요세푸스는 우리가 알고있는 신약성서의 신앙인 중에서 세 명을 언급했다. 물론 신비한 인물로 평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다음에 세 번째로 언급된 사람이 누구일까? 이방인의 사도 바울도 아니고 수제자라 했던 베드로도 아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여겨지는 예수의 친동생 야고보였다. 요세푸스는 야고보에 대해 짧으나마 이런 기록을 남겼다.

 

"아그립바 왕은… 아나누스를 대세장직에 명하였다… 아나누스는 기질이 거만하였고 매우 무례하였다… 따라서 아나누스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소집하여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다른 형제들[혹은 그의 동료들]을 산헤드린 앞에 세우고 율법위반자로 그들을 고소하여 돌로 쳐 죽이도록 보내었다. 예루살렘 시민들 중 공평하고 율법 위반을 불쾌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아나누스가 행한 일을 혐오스럽게 생각하였다"(「유대교대사」20.197-200).

 

비기독인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주후 62년에 발생한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기독교인들의 대표격으로 야고보를 들고 있다. 그는 분명히 초대 교회에서 베드로 이상 가는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이방인들의 할례 문제로 모였던 예루살렘 회의에서 격론을 거치고 난 뒤 최고 권위자의 입장에서 마지막 마감 발언을 하여 지시 사항을 내린 것은 야고보였다(행 15:13-21).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그곳을 지키면서 대표하고 있던 이도 "주의 형제 야고보"였으며(갈 1:19), 바울은 그를 '기둥같이 여김을 받던 지도자'라고 언급하고 있다(갈 2:9).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지도자 역할을 하던 야고보가 처음부터 그 친형인 예수께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형 예수가 미쳐서 돌아다닌다고 생각하여 잡아서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던 사람이다(막 3:21, 막 6:3 참고). 형과의 대화 중 예루살렘으로 빨리 가서 메시아 됨을 나타내라고 비아냥을 하기도 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 7:5).

 

이렇게 부정적이던 사람이 정작 예수께서 죽고 난 뒤에는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 중에 끼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행 1:14). 그래서 야고보는 오순절에 교회가 성령 충만을 입은 뒤에 그들 공동체의 최고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물론 신약성서의 야고보서를 쓴 것이 바로 이 사람이며 후대에 기도를 너무 열심히 하여 낙타 무릎을 갖게 되었다는 전설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급격한 변화를 겪게 만들었을까?

 

해답의 열쇠는 바울이 주후 55년경 그리스의 고린도 시에 있는 신앙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나가는 말로 언급한 한 마디에서 발견된다. 예수는 부활 후 게바, 열두 제자, 오백 명의 신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신 후 바로 동생인 야고보를 만나셨다 한다(고전 15:7). 부정적이었던 야고보는 부활하신 형님을 만나고서 눈이 열렸다. 그리고 그 이후 그는 형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라 불렀고(약 1:1), 주님 되신 친형을 위하여 죽기까지 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사람이 이렇게 백 팔십도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