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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문명

지평선의순례자 2008. 7. 28. 15:14

 

그리스-로마문명

 

출처 oxhill4952님의 블로그 | 풍경소리

l. 들어가며


18세기가 되서야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그리스·로마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리스·로마는 고전, 고대의 시대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칼 마르크스 그리스·로마를 경제·사회적인 요인으로 고대라고 확실히 명명했으며, 19세기에 이르러 고대라는 개념이 구체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성립한 그리스문명과 헬레니즘 시대 문명, 그리고 로마문명은 서양문명의 받침돌이 되는 소위 고전문명(the classical civilization)을 이룩했다. 이 3대 문명들에 의해 이루어진 헬레니즘은 헤브라이즘과 함께 서양문명의 기초가 되었다. 헤브라이즘이 유대· 기독교적 전통으로 서양사상에서 시간의식을 불러일으켜 주었다면 헬레니즘은 그리스·로마적 전통으로 인간중심의 자아의식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BC 600년경부터 문명의 중심은 근동지역에서 벗어나 발칸반도와 이탈리아반도로 옳겨졌다. 그 이전에도 그들의 활동은 있었다. 그러나 BC 600년경에서 300년경 사이에 매우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는 오리엔트 문명을 받아들여 그것을 그들의 문화와 접목시켜 새로운 문명인 헬레니즘시대 문명으로 이어지게 했으며 다시 그것들을 로마문명으로 연결되게 했다.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에서 다음 두 가지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리스·로마문명의 지역적·공간적 배경은 무엇인가? 둘째, 그리스·로마문명이 어떻게 중세와 구분될 수 있을 것인가? 위의 질문에 간단히 답하자면, 그리스·로마문명의 지역적 배경은 지중해 세계였다. 즉, 지중해와 지중해 주변지역과의 정치적·문화적 상호 관계 속에서 정치적·민족적 통합이 우선이 아니라, 문화적 교류로 특징 지워지면서 그리스·로마문명을 꽃을 피웠다. 공간적 배경은 마케도니아 시대였다. 알렉산더에서 케사르를 거치면서 지중해 연안, 이집트, 시리아, 이란, 아프리카, 북부유럽, 북부아프리카, 심지어는 이후 인도, 중국, 한국과 일본까지 문화적 유산을 전파했다.


그리스·로마문명과 중세를 어떻게 구분지을 수 있을 것인가는 단절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해야 한다. 중세의 시작은 종교· 정치사적으로 볼 때 4세기 훈족의 이동에 따른 게르만의 이동에 의해 로마가 멸망했다는 설을 비롯하여 여러 설들이 있다. 다음과 같은 고대문화의 종말의 요인이 5/6세기 이후 7, 8세기에 걸쳐 등장했다.


첫째,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 지방분권주의로 여러 제후들이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여 중세의 봉건제도가 성립하게 되었다.


둘째, 새로운 사상과 가치관이 등장했다. 기독교가 발전, 정립하게 되었다. 즉, 로마제국의 몰락과정은 기독교 문명의 성장과정이며 서양문명의 태동기이며 라틴적요인과 게르만적 요인의 융합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새로운 경제 시스템이 둥장했다. 대토지 소유제가 봉건제로 바뀌게 되었다.


다음으로 '그리스·로마사가 동질성과 연속성으로 된 하나의 역사관이다'라는 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으로 첫째, 도시국가 형태에서 거대한 세계제국으로 팽창하는 과정 속에서 지중해 세계의 개념을 찾을 수 있다는 것과 둘째, 주변부의 다른 문명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독자적인 사상· 제도를 고유문명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지중해의 발전과정과 그리스·로마의 내적인 발전과정은 지중해 역사의 씨줄과 날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음 두 가지에 주목해야 하는데, 첫째는 지중해 무역이 단순히 무역이 아니라 지중해 문명의 교류라는 점, 둘째는 도시화가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과 로마제국의 정복을 통해 그리스적인, 라틴화된 도시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즉, 도시화는 그리스· 라틴문화의 이식과정이었던 셈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2원적 정치적 통합체계로써 정치적 통일보다는 문화적인 통일을 이룩했다.


헬레니즘시대 문명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하여 인정을 받은 학자는 19세기 독일의 드로이젠(Johann Gustav Droysen:1808~1884)이었다. 그의 주장이 나오기까지는 헬레니즘시대문명은 그리스문명의 그늘에 가려 질적으로 낙후된 문명으로 간과된 것이 사실이었다. 드로이젠은 그리스적인 것과 오리엔트적인 것의 결합의 이원적 구조로 헬레니즘의 개념을 정의했다.


이원적 구조란 정치적으로는 지배복종관계를 유지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결합을 꾀하여 그리스적인 도시를 건설하고, 문화적으로는 상층부에서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도록 했으나 하층부의 문화적인 요인은 그대로 인정하여 융합을 꾀한 것을 말한다. '알렉산더대왕의 문화정책'을 통한 세계제패는 이러한 이원적 구조 속에서 특성을 볼 수 있다.


드로이젠에 의하면 헬레니즘시대문명은 전적으로는 그리스의 폴리스문명에 뒤떨어지지만 세계사적 차원에서는 오히려 그리스를 훨씬 뛰어넘는 문명이라는 것이다. 왜냐 하면 헬레니즘시대를 통해 비로소 그리스문명은 그 지엽적인 폴리스문명을 초월해 로마로 이어져 중세와 유럽, 더 나아가 세계문명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드로이젠의 학설은 아직까지 역사학자들의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스가 유럽의 동방세계를 대표한다면 로마는 그 서방세계를 대표하는 국가였다. 그들은 각각 동·서의 상이한 생활이상과 양식을 그 역사과정에 표출하면서 헬레니즘사상의 兩大基調를 이룩했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는 양자 공히 지중해라는 터전 위에서 반도의 이점을 십분 발휘한 국가들이었으나 전자가 폴리스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쇠미한 반면에 후자는 도시국가를 뛰어넘어 세계제국으로까지 펼쳐 나아갈 수 있었다.


로마는 세계 제국가를 건설하여 이를 통제하고 유지하는 데 힘썼으며 그리스는 지엽적인 폴리스 지배로 끝났으나 정신문화에 있어서는 그 영향이 서양뿐 아니라 동양에까지 파급되었다 그러면 로마가 그 문화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를 뛰어넘어 세계국가로 발돋움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리스문화를 오리엔트문화와 결합시킨 헬레니즘시대문명의 덕분이 아닌가 한다.


로마는 그 터전 위에서 정치나 법조직 뿐만 아니라 세계종교인 기독교까지 출범시켰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의 자유로운 인간정신의 발전은 세계사에서 자랑할 수 있는 유산이며 서양문화는 이러한 인간의 자유를 기조로 했기 때문에 더욱 빛나게 되었다. 그러나 자유는 통제와 서로 상치되는 것이므로 그리스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었고 통일의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로마에서는 이와 같은 그리스세계가 지녔던 결점을 보충해 주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자유보다 통제가 우선했기 때문에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서양사는 어느 면에서는 그리스의 자유와 로마의 통제로 그 역사를 이어간 발전과정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중해의 고전문명은 서양문명의 기초가 되는 헬레니즘사상의 바탕을 이룩했으며, 로마 때는 오리엔트의 유대교를 기독교로 승화시켜 헤브라이즘사상의 바탕을 만들어 줌으로써 서양문명의 틀을 갖추게 했다.








ll. 그리스 문명



1.그리스 문화

에게문명(the Aegean civilization)은 그리스문명이 일어나기 이전에 세계 최초의 해양문명으로서 오리엔트문명을 그리스인들에게 전달하는 중개 역할을 수행했다. 에게문명은 크게 크레타문명(the Cretan civilization)과 미케네문명(the Mycenean civilization)으로 나뉜다.


전자는 그리스 남부 크레타 섬과 패스토스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후자는 그리스본토의 미케네, 티런스, 소아시아의 트로이를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두 사람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19세기 말 하이리히 슬리만(Heinrich Schliemann:1822~1890)은 호머의 작품에 나오는 트로이(Troy) 땅이 실제 있었던 실전지가 아닌가 하는 호기심에서 발굴을 시작해 1870년 드디어 9개의 성채와 도시를 캐냈으며 다시 트로이공격의 장본인인 아가멤논의 미케네(Mycene) 땅을 발굴하여 미케네와 트로이문명의 실체를 드러냈다.


한편 영국의 고고학자 에반스(Sir A.Evans:1851~1941)는 1900년경 크레타(Crete)섬 북쪽에 있는 크놋소스의 '미로스왕의 미궁'을 찾아내어 크레타문명의 실체를 알아냈다. 크레타 섬에서 일어난 에게문명은 정차로 그리스본토와 소아시아로 진출하여 발전하다가 다른 민족들 특별히 해상국인 페니키아의 저지를 받아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BC 1500년경 문화의 중심이 미케네와 티린스로 옳겨 해양문화로부터 내륙문화로 일변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미케네를 중심으로 하는 메케네문명은 평화적이며 세련된 미적 감각을 지닌 크레타문명과는 달리 매우 단순하고 호전적인 특성을 가졌다.


그리스문명은 정치적 영역 속에서 보면 안 된다. 그리스문화가 중단, 단절된 것이 아니라 오리엔트와의 접목을 통해 헬레니즘으로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리스 문화의 특징으로는 첫째, 폴리스 체제와 민족주의적인 융합, 둘째, 진취성, 개방성, 셋째,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 넷째, 도시국가의 자유민적인 특성인 독창성. 창의성, 다섯째, 폴리스적 한계 속에서 더 이상 발전 못하고 세계주의로 나아가지 못한 한계성을 들 수 있다.


그리스 문화는 인간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 자유주의의 네 가지 사상의 바탕이 되는 요소들을 근본정신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오리엔트의 신정정치와는 달리 인문주의를 기초로 이성과 개성을 존중하며 인간성을 중시하고 확대하여 갔다. 이러한 그리스인의 인간중심의 문화는 현실성을 존중했다. 그들은 폴리스의 현실생활을 중시했으며 전체 문화의 뿌리를 현세에 두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현실주의감각은 이성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사유의 결과 나타난 것이었다. 그들의 합리주의이념은 그들 생활의 이론적 근원을 밝히려는 철학과 정신적, 육체적 강건을 존중한 교육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조화와 균형의 감각은 특히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예술을 통하여 터득할 수 있다. 그들의 자유주의적 이념도 그들의 모든 문화에 베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문화의 보다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그리스인들의 폴리스 생활을 통해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종교, 학문, 문학, 예술 등 고대 그리스인들의 그 빛나는 문화는 그들 개개인의 천부적 재질이 그들의 개인생활을 통해서 표현되었다기보다는 자유시민들의 자발적인 공동생활, 즉 폴리스생활을 통해서 발현된 것이었다. 그리스문화는 한마디로 폴리스의 문화였던 것이다.




2. 폴리스의 성립과 발전


고대 그리스의 역사는 폴리스(polis)의 성립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리스 철학의 종합자 또는 완성자라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그의 「정치학」 에서 인간을 '폴리스적 동물'이라 규정한 바 있다. 그 만큼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폴리스가 그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존재였다. 그들의 생활은 그 중요한 부분이 폴리스의 성원으로서의 생활이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의 역사는 곧 폴리스의 역사, 그리스의 문화는 곧 폴리스의 문화라 할 수 있다.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스의 성립과 더불어 시작한다는 것도 이러한 견지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폴리스의 성립이 갖는 보다 큰 역사적 의의는 그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전체 서양역사와 전체 서양문화의 참다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데에 있다. 서양인들은 대체로 참다운 서양역사와 참다운 서양문화는 그리스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빛이 오리엔트로부터 왔다는 사실, 특히 서양문화의 중요한 기반의 하나인 그리스도교적 전통이 오리엔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그들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서양문화의 보다 근원적인 전통은 역시 그리스에 그 기원을 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들을 오리엔트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인식하는 생각 자체가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은 전제군주정 아래 얽매어 있던 오리엔트인들과는 달리 그들이 자유스러운 시민으로 구성된 공동체국가, 즉 폴리스를 형성하고 유지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러한 폴리스를 만들어냄으로써 고대 그리스인들은 서양세계가 장차 가지게 되는 국가형태의 원형을 마련했다고 서양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폴리스의 성립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서양역사와 오리엔트역사, 나아가서는 서양역사와 동양역사가 갈라서는 분기점이라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러한 폴리스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세워졌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하게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다만 BC 800년경에 이르면 에게해 주변 각지에 많은 소국가들이 분립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폴리스가 가장 먼저 성립된 곳은 아마도 도리아인들에게 밀려난 원주 그리스인들이 이주해 간 소아시아 서부해안, 즉 이오니아(lonia)와 에올리아(Eolia) 둥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폴리스는 대체로 그 성원들이 스스로를 지키려는 군사적 목적에서 결속한 하나의 군사공동체로서 시작되었다. 원래 폴리스의 성원은 그것으로 구성한 부족(phyle)의 구성원으로서, 애당초는 추첨으로 배정된 클레로스(Kleros) 소유농민에서 유래한 독립적인 토지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고, 가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독립된 자유민이었다. 그 중에서 특히 유력한 자들이 바로 귀족들이었는데, 이들은 소위 기마의 중장보병(hoplites)으로서 폴리스를 형성하고 이를 방위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군사들이었다.


성립 초기의 폴리스가 대체로 왕정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귀족정과 다름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초기 폴리스의 왕은 오리엔트의 전제군주와는 판이한 존재였다. 왕은 전쟁시에 군사들을 지휘하고, 종교의식을 주재하는 둥 폴리스의 중요사항을 관장했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전사들, 특히 군사귀족들의 모임에서 그들과 협의하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야만 했다.


그 후 BC 7세기까지에는 그나마 왕정의 형태마저도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왕가는 귀족층 속에 흡수되어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이다. 에게해 주변 일대에 성립된 이러한 폴리스의 체제는 BC 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그리스인들의 일대 식민운동에 의하여 지중해 각지에 확산되었다. 그리스인들의 식민활동은 지중해세계의 교역을 촉진했다.


한편 BC 7세기 중엽 소아시아의 리디아(Lydia)왕국에서 처음 사용된 화폐제도가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에서도 채택됨에 따라 지중해세계에서의 교역은 더욱 활발해지고, 이것은 다시 수공업생산을 자극했다. 이래서 폴리스 안에서는 부유한 농민층과 더불어 부유한 상공업자층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는 BC 6세기부터 4세기까지 문화적 황금기를 누리게 되었다.




3. 그리스 신화


Grimal의 「그리스·로마신화」 에서 신화의 주제는 도리아인 등 이민족의 신화를 주제로 하고 있다. BC 13세기 그리스 본토에 원래 그리스인이 아닌 이민족의 침입으로 BC 9세기까지 암혹기를 맞게 되는데 이러한 이민족과의 대립과 투쟁 속에서 이들 이민족의 신화를 대폭 수용하게 되었다.


신화의 종류에는 우주창생 신화, 신통기적 신화, 인류창생 신화, 홍수신화가 있다. Hesiodos의 신통기 (Theogonia)에 의하면 우주 창세시에 카오스(혼돈)가 있었다. 거기서 Uranus(하늘)과 Gaia(땅)가 생기고 그 양자 사이에 Crones와 ㄴea 등 12位의 Titanus가 탄생했다.


여러 신 가운데 막내였던 Cronos와 Lea 사이에서 Zeus 등 많은 신이 생겼다. Cronos는 부친인 Uranus를 정복하여 세계를 지배했으나 그도 역시 자식들 중 막내인 Zeus에 의하여 정복당했다. Zeus는 무법과 무질서를 제압함으로써 천하를 통일했다. 따라서 인간사회의 질서도 Zeus신이 투쟁으로 쟁취한 선물이었다. 그는 여러 여신들에게 많은 신들을 탄생케 하는 등 Olympus 神界에서 주권자였다.


그리스신화는 너무 인간적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모두가 완벽 최고의 신이 아니며 인간적인 욕망과 약점을 보이며 늘 죄를 지으면서 복잡한 상관관계를 엮어 가는 영혼들이다. Greece의 신들도 초인간적 힘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이 만들어낸 신상일 것이나 인간적인 특성과 버릇들을 갖추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리스 사랑들의 인간적 (humanism)적인 성향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신을 인격화하고 실제 인물이나 영웅들을 신격화함을 서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 특이하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Hesiodos는 그 창작 속에서 정의와 인도의 가치를 삽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신의 세계에다 인간적인 요소를 섞어 넣음으로써 비극적인 요소를 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 예로 Zeus의 신화를 들 수 있다. 그리스신화의 중심인 신, 제우스는 만물의 창조주가 아닌 시간의 신인 Cronos의 아들이다. 어머니 Hera의 손에 의해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다음 아버지를 몰아내고 主神의 자리를 찬탈했다는 등 인간의 역사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다른 신화들에 비해서 비극적인 요소가 더 많이 내포되어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서로 사랑하거나 심지어는 인간과도 사랑이 이루어진다.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며 서로 죽이기도 한다. Zeus는 그의 어머니인 Hera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하여 통념으로는 허용되지 않는 파격성을 간직한다. 또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여자를 사랑해 신으로서는 유치한 아내와의 싸움을 벌이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제우스가 근본적으로 현존한다고 믿었다. 또한 제우스는 많은 신들을 다스리는 신들의 역할을 실수 없이 해내는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등 이중성을 간직한다. 결국 정통성은부족하나 機能성은 있다는 것이다.




4. 그리스 종교


그리스인들의 종교는 내세에 보다는 현세에 대한 관심이 컸다. 그들은 종교를 자연현상의 여러 가지 신비를 설명하고 인간의 정감을 관장하는 수단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들은 전쟁에 나가 이기는 방법이나 곡식을 많이 수확하는 일들과 같은 것에 관심을 쏟았다. 그들은 영적인 축복이나 죄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은 내적인 일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복잡한 교리나 의식, 성사, 계명들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신의 진노와는 관계없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했다. 그들의 신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성정을 가진 존재였으며 때로는 인간과 결혼도 하는 친근한 존재였다. 인간과 다른 점은 불로주 (ambrosla,nectar)로 살아가는 불멸적일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들의 신은 하늘이나 별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 10,000피트 높이의 그리스 북쪽 올림포스산에 산다는 것이다. 그들의 신은 다신적이며 어떤 신도 至高적이지 알았다.


예를 들면 제우스(Eeus)는 하늘의 신이며, 포세이돈(Poseidon)은 바다의 신, 아프로디테(Aphrodite)는 사랑의 신, 아테나(Athena)는 전쟁의 여신에 불과하다. 이들 올림푸스신이 중심계보에 오른 것은 BC 534년이었다. 그의 존재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는 Homer가 BC8세기경 구전으로 전해오던 것들을「일리아드(lliad)」 와 「오디세이아(Odyssey)」 라는 서사시로 다시 꾸몄다. 이 서사시의 형태는 6보격의 시(the hexametor)로 되어 있으며 그 주제는 트로이전쟁을 전후하여 오래 살았던 영웅들의 전쟁과 모험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전쟁은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hgamemnon)이 빼앗겼던 미녀 헬렌(Helen)을 스파르타의 메네라우스(Menelaus)로부터 다시 찾는 데서부터 (「일리아드」) 시작된다. 그리고 「오디세이아」는 전쟁이 끝난 다음 돌아오는 오디세우스(Odysseus)의 방황에 패한 내용이다.


이 서사시들은 신과 인간을 주제로 하면서 신을 더 중요하게 다룬다. 영웅의 행동을 통하여 인간의 처절한 운명과 본성을 잘 묘사함으로써 인간과 문명의 관계를 시사하는 장점을 가진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두 서사시들은 헬레니즘시대 때 아리스타르쿠스(Aristarchus:215~145 BC)에 의해 두루마리로부터 각각 24권으로 나뉘어 편집되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원칙적으로 사탄의 개념이 없으므로 선악의 이원론이 성립될 수 없고 그들의 신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가능한 도덕과 무관한 존재였다. 그들은 죽은 후의세계에 대한 관심이 없었으며 그들의 종교의식도 죄를 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형식적이며 기계적인 회생의식에 불과했으며 전문적인 사제나 사원이 필요치 않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와 같은 그들의 교리로부터의 해방과 초자연적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그리스인들의 지적이며 예술적 진보에 공헌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그리스인들은 낙관적이며, 이기적이며, 세속적이며, 인간주의적이며 그리고 자유스러운 현실중시적인 생활태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그리스 종교가 초기에는 다신교적이었던 것이 후기로 가면서 인간적인 것, 초월적인 인간상으로 옳겨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 종교에서의 신이 초월적인 인간상이라는 것은 귀족계층을 중심으로 한 도덕상의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5. 그리스 철학과 사상


그리스인이 서양문명에 끼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사상분야일 것이다. 그들의 철학과 사상의 발달과정을 다음의 3단계로 구분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1) 1단계 (BC6세기경 - 오리엔트가 페르시아의 지배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시기)


BC 6세기 초경 그리스인들의 관심은 우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우주와 세계의 본질에 있었다. 우주를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질료(matter)문제에 관하여 주의를 집중했다. BC 6세기 후엽에 이르러 그들은 질료 밑에 깔려 있는 어떤 것, 형상(form)이나 존재, 전, 진리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의 관심이 그들 자신, 즉 인간 자체에 다다른 것은 BC 5세기 중엽이었다. 다른 어떤 문제보다 우선 인간의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연히 인간의 출세, 욕망 둥의 문제를 풀려고 했다. 그리고 BC 5세기 후엽에 그들은 인간의 윤리, 이성, 도덕, 진리의 객관성 등과 같은 인간의 내면과 근원적인 본성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인간 이성의 중요성은 이들에 의하여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물질세계의 근본원리를 탐구하려는 자연철학은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은 이오니아의 식민지인 밀레토스에서 일어났다. 멜레토스학파의 시조인 철학자 탈레스(Thales:640~548 BC)는 물을 우주만물의 구성원인으로 보았고, 아낙시멘더(Anazimander:611~545 BC)는 무한(the infinite)을 우주의 본질로 보아 영원한 운동을 설명했으며, 아낙시메네스(Anazimenes:584~524 BC)는 공기를 본질로 보고 만물의 구성을 설명했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544~484 BC)는 세계의 본질을 불로 보아 그 활동으로 운동과 유전의 세계를 설명했으며 우주에는 생성변화를 규정하는 신의 법칙이 있다고 보았다.


이에서 더 나아가 피타고라스(Pythagoras:582~483 BC)는 수학으로 우주의 근본원리를 설명했으며 피타고라스 정리의 발견자인 그는 사변적인 생활이 지고의 선이며 육체와 악마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과 악, 정신과 물질. 조화와 불화를 양분함으로써 그리스 최초의 이원론자가 되었다.


한편 남부 이탈리아의 마그나 그레시아의 엘레아에서는 크세노파네스(Xenophanes:570~480 BC)가 만물의 근원을 불생, 불멸, 불변의 신으로 보아 일신교를 주장하고 종래의 神人同形設을 공격했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스승 크세노파네스의 설을 전개하여 우주를 통일체(unity)로 보아 생성과 존재를 대립적으로 보며 존재만을 인정하고 생성을 부정했으며, 엘레아의 제논(Zenon: 490~430 BC)은 교묘한 비유로 운동을 부정하여 잡다한 것들이 존재할 수 없음을 논증했다.


이와 같은 두 개의 극단적인 주장들의 변증법적 전개라 할 수 있는 것이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둥의 학설들이었다. 엠페도클레스(Empedocles)는 흙, 공기, 불, 물의 4요소가 불생불멸하는 것으로 이것이 사랑과 미움의 작용으로 이합집산되어 경험세계의 여러 물체들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500~428 BC)는 많은 종자가 이성의 작용으로 이합집산하여 만물이 생멸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유물적 고찰을 발전시켜 자연과학의 원리를 수립한 사람이 리우키푸스(Leucippus)와 데모크리투스(Democritus.460~371 BC) 등의 원자론자들이었다.


(2) 2단계 (철학의 관심이 자연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전환된 시기 - 소피스트의 시대)


BC 5세기 중엽 외래문화의 자극과 민주적 정치, 사회제도의 변화 등이 아테네인들의 자각을 촉진시켰는데, 이러한 계몽기의 요구에 따라 청년교육을 담당한 사람들이 소위 소피스트들(sophists)이었다. 그들은 철학의 관심을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세계로 전환하여 주로 현실사회와 국가 혹은 입신출세에 쏟았으며 사상표현의 형식적 방법인 처세술과 웅변술 등에 주력했다.


후에는 내용이 없는 궤변에 빠지고 말았으나 그들이 아테네의 사상전환기의 청년들을 자극하여 학문연구를 촉진시킨 공적은 적지 않았으며 논리학과 심리학의 발달도 그들에게 힘입은 바가 컸다. 그들은 또한 노예제를 반대하고 그리스의 지나친 쇼비니즘에 반기를 들어 그리스의 자유이념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형식위주와 입신출세, 이기적 진리접근 둥으로 후세의 비난은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소피스트들의 대표자들로는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히피아스 등이 있었다.


소피스트의 제일인자는 압데라 출신의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481~411 BC)였다. 그는 운동으로 물성을 설명하여 만물은 능동과 수동의 두 작용으로 나타나며 지각도 감관과 대상과의 상호운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감각적 인식은 그 발생하는 순간에만 진실하며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절대적인 진리는 있을 수 없고 사물은 그것이 우리에게 있는 것과 같이 보일 뿐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Man is the measure of all thiugs)'라고까지 말하여 인간의 주관적 사고와 인식대상의 상대성을 강조했다.


(3) 3단계 (상대주의, 주관주의를 배격한 절대주의 - 소크라테스 등)


이러한 이기주의적이며 상대주의적인 소피스트에 반대하여 진리와 윤리의 객관적 표준을 내세운 철학자가 다름 아닌 유명한 소크라테스(Socratrs: 468~379 BC)였다. 그는 처음에는 소피스트에게서 지식을 배웠으나 점차로 그들에게 회의를 느끼고 인간의 무지를 심층적으로 깨달아 겸허한 자세를 가졌다. 한편으로 그는 인간의 내면에는 진리를 알 수 있는 '내적 음성(inner voice)'이 있다는 전제 아래 인간의 윤리적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반어법(대화법)으로 사람들의 편견과 고집을 각성시켜 진리의 탐구와 실천적도덕성을 일깨웠다. 그는 보편적 지식(universal knowledge)의 중요성을 후세에 전달한 철인이 되었다. 그는 겸허, 공정, 용기, 절제 등도 하나의 正知이며 지와 덕은 일치(지적합일) 되는 것임을 가르쳤다. 그는 이성에 따르는 것이 선이며 선은 복과 일치되는 것으로 유덕한 생활은 행복한 생활이며 공정은 합법과 일치하기 때문에 국법과 理法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 사후의 그의 제자 플라톤 (Platon:427~347 BC)은 각 지방을 편력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돌아와 아테네에 아카데미를 세워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많은 저술을 펴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보편적 지식을 이데아(Idea)에서 구체화했다. 그는 현실세계를 감각적 허상으로 보고 그것의 실체가 되는 본질의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the realm of idea)를 설정하여 소크라테스의 보편적 지식의 이념을 구체화했다. 이데아는 감각적인 감관을 벗어난 개념적 인식을 통해 얻어지는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존재의 진리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며 최고의 이데아는 선이며 신이었다.


현상계는 정신계의 영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여기에 그의 이상주의사상과 관념철학사상이 나타나 있다. 그는 이데아가 실현되는 장소를 폴리스라고 보다 그의 저술(the Republic)에서 철인왕(Philosopher-King)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상국가(철인정치국가)를 그리고 있다. 그는 인간영혼이 3가지 기능(이성, 의지,식욕)으로 나뉘는 것과 같이 사회를 3가지 계급(지배자, 군인, 생산자)으로 분류하여 다스리는 귀족주의적 정치를 구상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스승을 죽인 아테네의 민중정치에 대한 실망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플라톤의 지나친 이상주의를 비판하고 현실주의의 사상을 전개한 사람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였다. 그는 리케움(Lyceum)에 학교를 세우고 걸어다니면서 가르쳤기 때문에 그의 무리들을 소요학파 (the Peripatetic school)라고 부른다. 그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절대적 보편지식과 영구 불변적 기준을 더욱 체계화했는데 그것이 바로 논리학(logic)이라는 것이다.


그는 논리학이외에도 수사학, 형이상학, 동물학, 심리학, 윤리학, 정치학, 시학 등을 저술하여 경험적 방법을 중시했다. 그러나 그는 심미주의자인 플라톤이나 나무와 돌로부터는 아무 것도 배울 게 없다고 가르친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생물학이나 의학, 천문학 둥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현실세계에 주의를 모았으며 귀족주의적 정치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의 세계는 실재하며 감각의 세계는 불완전하고 제한적이라는 주장에는 공감했으나 존재를 보편에, 그리고 물질(질료)을 정신(형상)에만 종속시키는 것에는 과감하게 반기를 들었다. 그의 사상은 플라톤의 정신주의(spiritualism) 혹은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와 원자론자들의 기계론적 물질주의(mechanistic materialism)를 결합시킨 것이었다. 그의 우주관은 유목적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는 것과 같은 논리는 아니었다.


그의 신은 제1원인(First Cause)으로 플라톤의 윤리적 의미의 선의 이데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의 신은 단지 제1 운동자로서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이며 인격적 신이 아니다. 왜냐 하면 그의 신은 감정이나 의지, 욕망이 없는 순수 지성(pure intelligence)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불멸이 자리할 수 없다. 그의 윤리철학도 플라톤에 비해서 금욕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 아니며 육체적 욕망도 악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지고의 선은 이성적 생활을 영위하는 자기실현(self-realization)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것에 이르는 최선의 방법은 과도한 욕망과 금욕적 욕구를 조절하는 中庸(the golden mean)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이원론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서는 양자합일의 일원론으로 발전한 것인데 이후 이들의 이러한 사상들이 서양문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6. 그리스 문학과 예술


그리스인의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과 진선미를 추구하는 정열은 문예분야에도 잘 반영되었다.


(1) 문학


초기인 BC 7세기에서 5세기는 문화적 황금기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에 의해 논리학이 발달하면서 산문형식이 발달한 산문의 전성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서사시 형태의 문학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호머의 2대 서사시인 「일리아드(iliad)」 와 「오디세이아(Odysseay)」 는 신의 위력과 가호를 받는 영웅설화로서 그는 여기에서 소박하나마 신의 대한 전적인 신뢰감과 불굴의 투지, 그리고 놀라온 지혜와 같은 인간정신을 표현하여 민족적 정서에 크게 이바지했다.


BC 8세기의 서정시인 헤시오도스(Hesiodos: 750~700 BC)는 그리스신화를 체계적으로 계보화했고「노동과 나날(Works and Bays)」 에서 인생의 고뇌와 노동의 신성함, 농민생활을 그려 인간의식과 서민성을 나타냈다. BC 7~8세기에 이르러 인간의식이 발달함에 따라 시모니데스(566~443 5.C.), 사포, 아나크레온(563~478 BC), 핀타로스(522~443 BC) 둥이 나타나 개성의 발로인 아름다운 서정시를 썼는데 특히 사포는 단순하고 간결한 말로써 여성적인 정열을 읊었으며 핀타로스는 올림픽의 우승자를 찬양하는 웅장한 시를 썼고 시모니데스는 데르모필레의 순국용사들을 애도하는 시를 썼다. 그들은 대체로 신의 정의와 인간의 운명과의 모순을 비판하여 폴리스의 발전에 대응하는 사회변화를 잘 반영했다.


다음으로 그리스에서 발달한 것은 연극이었다. 페리클레스시대에 절정에 달했던 연극은 신에 대한 제사, 특히 주신 디오니소스의 제사에서 기원하여 처음에는 서정시의 대화적 부분이 음악과 춤의 반주 아래 문학형식으로 상연되었다. 3대 비극작가의 한사람인 에스킬루스(Aeschylus: 525~465 BC)는 페르시아 전후의 번영시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현존하는 7편의 작품 중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아가멤논」 등에서 인간의 부조리한 운명을 인정하면서도 신의 정의와 신을 발견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동요기의 그리스인의 운명관을 암시했다.


그리고 소포클레스(Sophocles: 496~406 BC)는 「안티고네」 등에서 신의 전능과 인간의 무력함을 자각하고 영웅설화보다는 인간의 정서를 노래했다. 그는 전통적인 운명관에서 탈피하지는 못했지만 에스킬루스에 비해 한층 인간적이었으며 개성적이며 현실적이었다.


또 페리클레스시대의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교육을 받은 유리피데스(Euripides'485~406 BC)는 메디아에서 그리스 사회의 쇠퇴기를 반영하여 인생의 의의와 가치를 추구하는 회의적이며 사실적인 묘사를 시도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Poetics(시학)」 에서 비극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Tragedy, then is an imitation of an action that is serious, complete, and of a certain magnitude; in language embellished with each king of artistic ornament, the several kinds being found in separate parts of the play; in the form of action, not of narrative, through pity and fear effecting the proper purgation <katharsis> of these emotion. (Poetics Vl)


'비극은 그러므로 진지하고 완결된, 특정한 길이를 지닌 액션의 모방이며, 극의 서로 다른 부분에 들어 있는 여러 다른 종류의 예술적인 장식으로써 아름답게 꾸민 언어로 되어 있고, 서술이 아넌 연기의 형식을 취하며, 동정과 두려움을 통해서 이 정서들이 적절한 카타르시스를 이룩한다. '


그리고 희극은 비극과 같이 일찍이 디오니소스신을 제사하기 위한 가장무용에서 시작되어 신화와 전설에서 취재했으나 명랑하고 풍자적인 것이 특징이었다. 대표적인 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450~385 BC)는 당시의 여러 가지 정치적 사회적 일들을 공격하고 조소했다. 한 가지 그리스인의 사상에서 기억할 것은 그들의 사상이 인간적이며, 현세적이며, 낙관주의적인 소위 아폴로(Apollo ' 태양신)적인 면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초월적이며, 내세적이며, 비관주의적인 소위 디오니소스 (Dionysus ' 신)적인 면의 성격도 있다는 사실이다.


(2) 예술 (건축, 조각, 미술)


건축을 비롯한 미술, 공예는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은 바 컸으며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우아한 미적 교양과 인간성을 십분 발휘하여, 이것을 풍부하게 생산되는 대리석을 이용해서 신과 인간을 교묘하게 조화시킴으로써 이상적인 신전과 신상을 조각했다. 건축의 기본양식은 미케네의 메가론에 따라서 두 개의 원주형식을 점차로 열주식으로 만들었다.


원주양식은 페리클레스가 익티누스(Ictinus), 칼리크라테스(Calicrates), 조각가 피디아스(Phidias) 등의 감독 하에 완성케 한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이나 제우스신전에서 보이는 장엄 소박한 도리아(Doria)양식에서(초기) 세밀하고 우아한 이오니아(lonia)양식을 거쳐(중기) 화려한 코런트(Corinth)양식으로(헬레니즘시대) 변천되었다.


조각에서는 이상주의, 신체의 아름다움, 인간과 신의 접목에서 보다 더 점진적으로 인간중심으로 접근해 갔는데, 초기(BC 7~5세기)에는 장엄하고 Ethos적이었으나 후기에는 신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변화하여 Pathos적이었다.


조각으로는 신전장식과 신상, 경기의 승리자상, 묘비상 등이 있었으며 목각에서 석각으로 변하면서 BC 7세기 이후에는 독자적 경지를 개척했고 BC 4~S세기에는 전성기에 도달했다. 특히 페르시아전쟁 후에는 단순하고 침착한 성격을 나타내었다.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 폴리크리토스(Polyclitus)는 '창을 든 남자상(spear petrel)'을 만들어 소요 이후의 안정된 모습을 반영했으며 스코파스(Scopas)는 동적이며 격렬한 애정을 묘사했다.


그리고 미론(Myron)의 '원반 던지는 남자상(discus thrower)'은 벽화 가운데 조화미를 나타내는 사실적 표현을 하고 있으며 피티아스의 '아테네 파르테논'과 올림페이온의 '제우스상'은 이상적인 신상으로 위엄을 나타내었다 프락시텔레스(Praxitelrs)는 어린 디오니소스를 안고 있는 헤르메스의 신상을 만들어 그리스 인문주의를 마음껏 발휘했다.





III. 로마 문명


1 . 로마 문화


(1) 로마문화의 세계사적 의미


로마의 역사는 꾸준한 국력성장과 지속적인 영토팽창, 이민족과 그 문화와 접촉, 충돌하고 포용, 통합해 온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로마는 역사적으로 그리스보다 약 2세기 뒤늦게 건국되었으나 그리스가 멸망한 BC 4세기 이후에도 나라의 위세를 계속적으로 넓혀 나갈 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로마가 건국한 BC 753년부터 기원후 476년에 서로마가 멸망할 때까지1,200년 동안 존속할 수가 있었다. 동로마가 망한 시기가 1543년임을 감안한다면 거의 2,000년이므로 500년 남짓밖에 존속하지 못했던 그리스에 비한다면 2~3배가 넘는 긴 세월이었다. 게다가 19세기에 와서 없어진 신성로마제국까지 포함한다면 그 차이는 더욱 커진다. 또 로마가 지배하며 군림했던 영토의 넓이도 그리스의 전성기보다도 2~3배가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이러한 로마의 세계사적인 의미는 그리스문화의 계승· 전달자적인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는 데 있다. 로마문화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폴리스적인 체계를 단일한 하나의 정치체계로 정비하여 뻗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스문화의 성격을 主知主義적이라 할 때 로마의 문화는 主意주의적이라 분류할 수 있다. 그것은 양자의 문화가 현세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로마의 문화가 주로 건축, 토목, 군대, 중교, 법률과 같은 실제적이며 실천적 행동분야에서 더욱 발달했기 때문이다. 로마 문화는 공화정 후기에서 제정 초기 사이에서 그 성숙미를 보여 주고 있으나 그 질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문화의 아류를 답습한 데 불과했다. 이것은 로마인의 용맹한 행동기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끊이지 아니하는 정복전쟁으로 인한 군국적 생활과 국가적 통제에 의한 제약 때문이기도 했다.


로마문화는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리스문화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로마의 문화가 헬레니즘시대의 문화를 이어받아 그 바탕 위에서 세계사적 문화의 기초를 이루어 주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그리스의 문화를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그들 자신의 고유한 라틴적 요소를 가미하여 소위 유럽의 고전문화를 이룩한 것이다. 그리고 로마는 이 고전문화를 유럽역사에 이어줌으로써 서양역사의 흐름에 중요한 한 몫을 수행한 것이다. 세계종교인 기독교의 발판도 로마였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 로마문명의 발전적 배경


로마문화의 발전전 배경에는 다음 세가지가 있다.


첫째, 로마정신은 로마제국의 창조의 원동력이었다. 로마인와 그리스인을 비교해 보면, 그리스인는 배타적. 하나의 polis라는 개념이 그리스자체에만 속하는 협의적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반하여 로마인은 세계를 로마를 중심으로한 하나의 polis라는 개념을 로마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리스인은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을 철저히 구별하는 배타적인 성격을 가진 반면, 로마인은 로마인과 비로마인의 구분을 하지 않는 개방적인 성격을 가졌다. 이런 면에서 로마인은 개방성 뿐만 아니라 실용성, 진취성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로마제국의 창조의 원동력이 된 것이었다.


둘째, 외형적인 요인으로 도로망의 정비를 들 수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군사적·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도로망을 정비했다. 그러나 로마는 상업적으로는 부분적인 입장만 취했을 뿐 여전히 농업 중심적인 사회였다.


셋째. 로마발전의 기본전제는 농업생활의 실천이었다. 로마의 경제사회의 중심은 농업에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경제사회의 발전이 상공업, 기술혁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노예제를 바탕으로한 농업을 통한 것이었기 때문에 정복을 하지 못하면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 모순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3) 로마제국의 문화사적 역할


로마제국의 문화사적인 역할에는 다음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로마는 그리스문화의 전달자, 계승자의 역할을 했다. 로마문화는 존재는 했으되 독창적이지 못하고 지속적이지 못했다. 처음부터 그리스문화의 지배를 받았다. 회랍어가 로마의 중심언어로 등장했으며 그리스 철학과 사상도 로마화한 것이었다.


Polybius는 「로마사」 에서 로마창조의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최초로 정치학적인 측명에서 규명했는데, 그는 다름 아닌 그리스인으로써 로마사를 쓴 사람이었다. 그리스가 로마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고 지속적이었다.


둘째, 로마는 원시 기독교가 성립되어 헬레니즘과 함께 서양사상의 원류로 헤브라이즘이 자리잡게 했다. 기독교는 그리스적인 부분과 로마적인 부분으로 바뀌게 되었다.


셋째, 로마는 정치와 문화의 융합이라는 역할을 했다. 로마는 정치적인 안정성 덕분에 하나의 polis라는 측면에서 세계성을 추구했다. 로마는 질보다는 양적으로 끝없는 정복사업을 통해 문화를 계승,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넷째, 로마제국에서 취하고 있는 문명체계를 아랍에 물려주었다. BC 6세기 이후 마호멧 세력은 확대되어 나갔으며, 지중해 세력을 재패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비잔틴 문명, 마호멧 세력은 로마문명과 접하게 되었는데 분석적, 해석적, 웅용적인 그리스문화의 정수를 받아들여 발전시켰고 서유럽으로 전달하는 헬레니즘의 매개자의 역할을 했다. 이러한 면에서 로마제국의 역할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하겠다.


(4) 로마의 문화유산


로마는 군사적·무력적으로 그리스인을 정복했는데, 오히려 그리스 문화에 의해 정복당하고 말았다. 로마 문화는 독창적이지 못했고 그리스 문화의 계승자적인 역할을 했다. 로마의 문화유산으로 다음 네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최대의 문화사적인 업적은 강력한 정치체제인 로마공화정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둘째, 기독교를 로마인에 의해서 로마화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에 의해 로마문화는 서유럽까지 계승·전달되었다.


셋째, 인간성(humanitas)의 개념을 보편 타당한 원리로 로마인은 광범위하게 적용했다는 것이다. 로마의 세계적 정복의 원동력은 바로 평등·박애라는 인간성에 기인한 것이다.


넷째, 로마의 문화유산 중 최대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로마법을 들 수 있다. 유구한 로마인의 정치과정을 통해 체계화, 효율적으로 적용되었다. 로마법의 영향은 지대하며 영속적이다.


(5) 로마법


로마의 유산 중 사장 위대한 것은 아마도 법률일 것이다. 광대한 영토와 국가통제의 필요에서 준법정신과 이로 인한 법률이 발달하게 되었다. 로마 최초의 성문법이 12동판법은 공화정 초기의 시민법(Jus Civile)으로서 로마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들어 있다. 그러나 시민이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정이 없어 특권적이며 차별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포에니전쟁 후 영토가 넓어지고 여러 민족들이 로마에 복속하게 됨에 따라 시민법과 같은 차별적인 법률을 가지고서는 이들을 포섭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모든 민족들의 특수성을 고려한 보편적인 법인 만민법(Jus Gentium)이었다. 그렇다고 위에서 말한 차별적인 요소가 온전하게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후의 자연법(Jus Naturale)에 의해 인간의 본성과 존엄성의 강조로 해소되었다. 이 자연법사상은 물론 로마인에 의해 성취된 것이었으나 그 기원은 스토아철학의 세계주의적 경향과 평등사상으로까지 소급되며 이를 실제로 구체화한 것은 유명한 키케로였으며, 이것을 다시 자연법, 만민법, 시민법의 개념으로 정리한 것은 울피아누스(Ulpianus: 170~228) 등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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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의 이해 - 김진웅, 손영호, 정성화 공저, (1996년)

유물을 통해 본 세계사 - Harvey Rachlin (1997년)

그리스 국가 - Ehrenbering Victor, (1991년)

고대 그리스사 - Antony Andrews (1997년)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토마스 볼빈치(1989년)

로마 제국사 - 인드로 몬타넬리(1998년)

로마 제국 흥망사 - Edward Gibbon (1991년)

 << 참고문헌 >>


고대 그리스사 (학술총서 24), 앤토니 앤드류스, 이론과 실천

고대 로마를 찾아서(시공디스커버리층서 25), 클로드 모아티 ,시공사,

고전고대 로마사 연구의 재문제, 지동식, 고려대학교 출판부

고전고대 희랍사 연구의 재문제, 지동식 편역, 고려데학교 출판부

로마 재국사, 김정하, 까치

로마공화정(대학교양총서 73), 허승일, 서울대학교 출판부

로마공화정연구, 허승일, 서울대학교 출판부

로마는 왜 멸망했는가?, 유개 도루, 교문사

로마문명사 (현대지성신서 8), 로널드 R 더들리, 현대지성사

로마사, 프리츠 하이캘하임, 현대지성사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한길사

로마제국쇠망사 Edward Gibbon, 태광서림


< 참고 사이트>
http://myhome.netsgo.com/Greekhistory/gallery/

http://home.taegu.net/'yonho/

http://myhome.netsgo.com/ksn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