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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enism II

지평선의순례자 2008. 7. 28. 14:09

Hellenism II

출처 oxhill4952님의 블로그 | 풍경소리
원문 http://blog.naver.com/oxhill4952/110002413308
 

1. 헬레니즘<Hellenism>

헬레니즘이란 말은 고대 그리스의 뒤를 잇는, 세계 역사상 한 시대를 규정 짓는 개념으로서. 그리스인을 의미하는 헬렌(Heㅣen)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헬레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이 그의 저서 『헬레니즘사(史)』에서 쓰면서부터였다. 이 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는데, 대체로 그리스문화, 그리스정신을 가리키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또 이 시대의 특징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리스문화의 확대·발전으로 보는 견해와, 반대로 오리엔트 문화를 통한 그리스문화의 퇴폐로 보는 등의 견해도 있으나,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 태어난 문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1. 시대 범위

헬레니즘 시대의 범위에 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먼저 그 시작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시아 원정 출발(BC 334)에 두는 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해(BC 330)에 두는 설, 대왕의 죽음(BC 323)에 두는 설 등이 있다. 그 종말도 극단적인 경우는 마호메트의 출현까지로 보는 설이 있다. 그 밖에 로마 제정기(帝政期)를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시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BC 330년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제국 정복에서 BC 30년의 로마가 이집트를 병합하기까지의 300년간이 그 시대범위로 간주된다. 지역적 범위는 마케도니아·그리스에서부터 대왕의 정복지 전역(인더스 유역·박트리아·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이집트)까지이며, 서방의 로마도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든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로마는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1-2. 문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한 각지에 만든 새로운 폴리스와, 그 뒤 셀레우코스 왕들이 영내(領內)에 많이 만든 새로운 폴리스가 중심이 되어, 그리스문화는 오리엔트의 전역에까지 침투하였다. 그리고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간소화한 그리스어가 공통어로서 사용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오리엔트적인 전제 군주풍의 의례를 채용하고, 페르시아 왕녀와의 결혼, 페르시아 귀족을 친위대로 채용하는 등 이민족 통치의 수단으로서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앞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하였다. 이로써 그리스인이 이민족을 야만시한 관념이 희박해지고 세계시민주의가 역설되었다. 그러나 한편 폴리스의 강력한 지배가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꾀하는 개인주의적 철학 사상들이 출현하였다. 제논이 시작한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의 에피쿠로스학파, 디오게네스의 키니코스학파, 아리스티포스의 키레네학파 등이 모두 이 시대의 철학파이다. 이 시대의 조각은 매우 훌륭하나, 전시대의 특징인 이상화는 약화되고 보다 사실적·육감적으로 되었으며, 육체의 운동과 정신의 격동 등을 나타내기를 좋아하였다. 《라오콘》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 등은 모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들이다. 이 시대의 학예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아테네·페르가몬 등이었는데, 특히 문헌학·자연과학 등이 발달하고, 창조적인 문학 등은 오히려 쇠퇴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시대에는 그리스문화의 창조성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 시대의 경향을 정당하게 평가하려는 시도가 드로이센에서 시작되었으며 특히 마이어의 말은 그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즉 헬레니즘 문화는 될 수 있는 한 민족의 특성이나 특수한 생활 태도를 무시하고, 그 대신 아름다운 교양을 지닌 민족적 차별이 없는 인류를 이상으로 하였다. 교양은 그리스 민족의 교양을 기초로 하여 나타났으나, 그 민족적 특징을 내던져 버리고, 전 인류의 문화가 되려고 했던 것이다.

1-3. 그리스 철학사상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의 출현은 그리스 철학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알렉산드로스가 건립한 대제국 밑에서 종래의 도시국가(폴리스) 중심의 정치철학이나 도덕철학이 그 의미를 잃고, 세계국가(코스모폴리스)의 성격을 띠게 되어 국가의 문제보다는 개인의 삶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또한, 로마의 J.카이사르의 세계 통일(BC 46)이 이루어진 후, 그리스 철학은 아테네에서 서쪽은 로마로, 동쪽은 알렉산드리아로 옮아갔다. 국운이 쇠잔해진 그리스인들로서는 이론적 추구의 여유가 없어지고 옛 철학이론을 현실에 적응시키는 실천철학으로 바꾸어 놓았다. BC 3세기에 아테네에서는 키프로스 출신인 제논이 창설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가 대립되었다. 스토아학파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과 ‘무욕의 생활’을 이상으로 했던 키니코스학파(소크라테스 추종학파)의 흐름을 받았고, 에피쿠로스학파는 데모크리토스의 철학과 ‘쾌락이 선이다’라는 키레네학파(역시 소크라테스 추종학파)의 흐름을 받았다. 이 두 학파는 모두 인간의 목적이 행복에 있고, 인생은 자연에 따르는 생활에서 그 행복이 획득된다고 믿었으나, 스토아학파는 그 행복이 금욕에 있다고 보는 데 반하여,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에 있다고 보고 대립하였다. 그러나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이나 에피쿠로스학파의 ‘아타락시아’는 다같이 인간의 정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비슷한 입장이라 하겠다. 한편, 엘리스 출신인 피로가 체계화한 회의론은, 원래 인간이란 사물의 참된 본질을 알 수 없으므로 헛된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중지’를 내세워, 그것으로 혼의 평안을 얻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는 입장이다. 스토아학파는 로마에 가서 네로 황제의 교사였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학자들로 이어졌고, 에피쿠로스학파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어머니 플로티나 같은 신봉자를 로마에서 얻었다. 동쪽 알렉산드리아로 뻗어나간 그리스 철학은 동방의 헤브라이종교와 접촉하여 이른바 ‘구제(救濟)의 철학’으로 나타났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론은 플라톤 철학과 헤브라이종교의 결합을 꾀하여 인간은 하나님 속에 머무는 행복을 위하여 자기 의식에서의 탈출을 지향하였고, 세계와 하나님과의 중간자로서 ‘로고스신학’을 제창하였다. 신플라톤주의자라고 일컫는 플로티노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받은 이집트인으로 후에 로마에 가서 철학을 가르친 사람인데, 그는 플라톤에 따라 최고의 것은 존재를 초월하는 일자(一者)라고 보았다. 태양에서 광선이 비추어 나오듯, 이 일자에서 예지(nous)가 유출되고, 이 예지의 하부에서 영혼이 흘러나오고, 영혼 다음에 감각계가 뒤따라 유출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완전한 것에서 불완전한 것으로 내려오는 길을 보여주었는데, 인간은 기도와 주술의 작용에 의해 반대 방향으로 향할 수 있어 하느님과의 합일을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그리스도교 보호를 선포하고, 유스티니아누스황제가 플라톤의 학원을 폐쇄하자 고대의 그리스 철학은 크리스도교 사상으로 이어졌다.

3. 헬레니즘과 크리스트교 문화의 비교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활의 중심이며 지주였던, 폴리스가 무너지고 오리엔트적 전제 군주제가 등장하자 그리스인들은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처지가 되었고, 개개인으로 흩어져 폴리스를 초월한 세계시민이 된 것이다. 폴리스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관심은 애국심이나 공공정신보다 개인의 행복, 개인의 구원에 있었고, 이러한 개인의 행복 추구나 개인적 구원의 소망에 있어서, 민족적 구별은 있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헬레니즘 사상의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즉 개인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이다.

아울러 인간을 이성의 존재로 파악한 그들의 사고는 자연과학의 발달을 가져왔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자연 과학이 주로 철학적 사색의 결과였던 데 비하여 이 시대에는 보다 실제적인 과학 지식이 발달하였다. 특히 천문학 분야에서는 지동설. 지구의 둘레 계산 등의 여러 가지 성과도 나타났다.

이에 반해 신의 창조물로서 인간을 이해한 크리스트 문화에서는 신중심의 사고가 지배적이었고, 신의 은총을 받는 것이 행복의 기준이 되었으며, 신에 대한 숭배와 관련하여 음악, 미술, 건축술의 발달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 출처: 네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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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의미로 헬레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이 그의 저서 《헬레니즘사(史)》에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 말은 그리스문화, 그리스정신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이 시대의 특징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리스문화의 확대 ·발전으로 보는 견해, 반대로 오리엔트문화를 통한 그리스문화의 퇴폐로 보는 등의 견해도 있으나,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 태어난 문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대범위】 헬레니즘 시대의 범위에 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먼저 그 시작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시아 원정 출발(BC 334)에 두는 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해(BC 330)에 두는 설, 대왕의 죽음(BC 323)에 두는 설 등이 있다. 그 종말도 극단적인 경우는 마호메트의 출현까지로 보는 설이 있다. 그 밖에 로마 제정기(帝政期)를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시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BC 330년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제국 정복에서 BC 30년의 로마가 이집트를 병합하기까지의 300년간이 그 시대범위로 간주된다.

지역적 범위는 마케도니아 ·그리스에서부터 대왕의 정복지 전역(인더스 유역 ·박트리아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이집트)까지이며, 서방의 로마도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든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로마는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1. 역사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뒤 다시 동방으로 진군하였으나, 인더스강 유역에서 군대를 돌려 바빌론으로 돌아왔다(BC 324). 그러나 그 다음해 대왕이 갑자기 병사하자, 디아도코이(遺將)들은 서로 싸운 끝에 대왕이 남긴 영토를 분할하였다. 입소스전투(BC 301), 쿠르페디온전투(BC 281) 등을 거쳐 디아도코이의 세력 범위는 대개 결정되었다.

카산드로스(훗날의 안티고노스)왕조가 지배하는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왕조가 지배하는 시리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의 3헬레니즘 왕국으로 분열하였으나 결국 로마에 합병되었다. 그리스 본토는 아이톨리아동맹 ·아카이아동맹이라는 두 도시동맹을 만들어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문화의 중심으로서 아테네가, 상업의 중심지로 코린토스가, 그리고 에게해(海)의 섬 가운데서는 델로스섬과 로도스섬이 노예매매의 중개 무역지로서 번영한 것 외에는 쇠퇴 일로를 걸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역시 로마령(領)이 되었다.

2. 사회경제
헬레니즘 제왕국(諸王國) 가운데 마케도니아는 국력이 가장 약하였으나, 시리아 ·이집트에는 오리엔트풍의 강력한 군주국가가 성립되었다. 이집트는 지리적 조건이 좋고 물산(物産)도 풍부하여 헬레니즘 왕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전제지배가 확립되었다. 전국토의 소유권은 원칙적으로 국왕에게만 소속되었다. 신하에게 주는 사여지(賜與地), 병사에게 주는 봉토(封土), 신전령(神殿領) 등이 있었으나 이것도 점유권이 주어져 있을 뿐, 왕은 언제라도 이를 회수할 수가 있었다.

왕의 부(富)를 늘리기 위해서는 개간(開墾)이 필요했는데, 유력한 신하에게 토지를 주어 개간시키고 개간이 되면 다시 몰수한 실례도 알려져 있다. 농경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왕료지(王料地)는 ‘왕의 농민’이라고 불리는, 이동의 자유가 없는 농노적(農奴的) 소작인이 경작하였다. 상공업과 그 밖의 모든 산업경제는 왕 한 사람의 부를 위해 강력하게 통제되어 제유식물(製油植物)의 재배, 착유(搾油)와 맥주양조 ·제염(製鹽) ·제지(製紙) 등 거의 모든 산업은 전매제였다. 광업 ·은행 등도 모두 왕이 독점하고 수입은 엄격하게 제한하였으며, 수출은 국내 소비를 채우고 남은 것만 사인(私人)이 행하였다.

이집트에는 알렉산드리아 ·나우크라티스 ·프톨레마이오스 등 그리스풍의 폴리스가 셋 있었다. 이 중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수도이기도 한 알렉산드리아는 상업항으로서 번영하였고, 또한 무세이온 ·대도서관 등이 있는 그리스적 학예의 중심지로, ‘없는 것은 눈[雪]뿐’이라고 할만큼 번영을 누렸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수족이나 다름없는 관료군(官僚群)이 이집트를 강력하게 지배하였는데, 고래(古來)의 토착종교와 왕가의 극단적인 근친결혼과 같은 풍속 ·습관 등을 그대로 유지하고, 이집트 토착민과의 마찰을 피하여 현명하게 통치하였다. 신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감독하였으나, 토착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신관(神官)의 힘은 마침내 강력해져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말기 왕권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 왕국 중에서는 가장 오랜 왕국으로, BC 30년 로마에 합병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셀레우코스왕조가 지배한 시리아에서도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 지배영역은 헬레니즘 왕국 중 가장 광대하여 호족(豪族)과 어떤 종류의 자치권을 가진 민족(유대인 등), 영내(領內)에 많이 만들어져 있는 그리스풍의 폴리스 등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요소가 많아 지극히 복잡하였다. 자료가 부족하여 상세한 점은 분명치 않으나, 이곳에서도 전국토가 원칙적으로 왕의 소유였다. 그리고 왕유지(王有地)는 ‘왕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농노적 농민이 경작하였다.

국토가 광대하고 정치적으로 복잡하였기 때문에 왕의 지배력이 고루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어 멀리 파르티아 ·박트리아와 서쪽의 페르가몬 등이 독립하였고, BC 64년에는 로마에 합병되어 그 속주가 되었다. 마케도니아에 관해서는 자료가 없어 그 정치 ·경제 등의 상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로마와 싸워 패하여 BC 168년 로마령이 되고, BC 146년에는 그리스와 함께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3. 문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한 각지에 만든 새로운 폴리스와, 그 뒤 셀레우코스왕들이 영내(領內)에 많이 만든 새로운 폴리스가 중심이 되어, 그리스문화는 오리엔트의 오지(奧地)에까지 침투하였다. 그리고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간소화한 그리스어가 공통어(코이네)로서 사용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풍의 의례를 채용하고, 페르시아 왕녀와의 결혼, 페르시아 귀족을 친위대로 채용하는 등 이민족 통치의 수단으로서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전대(前代)와는 다른 새로운 헬레니즘문화가 탄생하였다. 이로써 그리스인이 이민족을 야만시한 관념이 희박해지고 세계시민주의가 역설되었다.

그러나 한편 폴리스의 강력한 지배가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꾀하는 개인주의적인 철학의 제파(諸派)가 출현하였다. 제논이 시작한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의 에피쿠로스학파, 디오게네스의 키니코스학파, 아리스티포스의 키레네학파 등이 모두 이 시대의 철학파이다.

이 시대의 조각은 매우 훌륭하나, 전시대의 특징인 이상화는 약화되고 보다 사실적 ·육감적으로 되었으며, 육체의 운동과 정신의 격동 등을 나타내기를 좋아하였다. 《라오콘》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 등은 모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들이다.

이 시대의 학예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 ·아테네 ·페르가몬 등이었는데, 특히 문헌학 ·자연과학 등이 발달하고, 창조적인 문학 등은 오히려 쇠퇴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시대에는 그리스문화의 창조성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