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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어록 - 이입사행론, 혈맥론, 오성론, 파상론

지평선의순례자 2008. 7. 28. 02:36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혈맥론, 오성론, 파상론

 


 1.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 축복이다 (달마의 二入四行論)


도(道)에 이르는 길은 많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두 가지란 원리적인 방법과 실천적인 방법이다. 원리적인 방법이란 가르침에 의해서 본질을 알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똑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감각과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망상을 등지고 실체로 돌아와 벽을 마주하고 앉은 사람은 나도 없고 남도 없음을 깨닫는다. 그에게는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다. 그런 사람은 경전을 대하고도 흔들림이 없으며, 무언중에 원리와 완전한 하나를 이룬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아무런 인위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러한 상태를 우리는 이입(理入), 즉 원리로 도(道)에 들어갔다고 부른다.


실천적인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을 사행(四行)이라고 부르는데, 그 네 가지는 첫째 억울함을 참고, 둘째 인연을 받아들이며, 셋째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넷째 다르마(法)를 따라 사는 것이다.

 

첫째, 억울함을 참는 것이다. 도를 추구하는 사람이 불행을 만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셀 수 없는 세월 동안 나는 본질적인 것에서 등을 돌리고 하찮은 것을 위해 살았으며, 여러 가지로 존재의 겉모습을 바꾸어 가며방황해 왔다. 그러면서 까닭 없이 자주 화를 내었고 수없이 계율을 위반하는 죄를 범했다. 지금 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과거의 잘못으로 벌을 받고 있다. 어떤 신이나 인간도 잘못된 행위가 언제 그 열매를 맺는지 미리 예견할 수 없다. 나는 열린 가슴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며, 억울하다고 불평하지 않으리라."


경에 이르기를 "그대가 불행을 만나더라도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사리에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그대는 원리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억울함을 참음으로써 그대는 도(道)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둘째, 인연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본래의 자아란 것이 없으며 단지 인연에 따라 움직인다. 만일 우리가 어떤 큰 보상, 즉 부와 명성을 얻는 일을 만나더라도 그것은 과거에 우리가 뿌린 씨앗을 거두는 것일 뿐이다. 인연이 다하면 그것은 또다시 무로 돌아간다. 그러니 기뻐할 것이 없다. 성공과 실패가 모두 인연을 따라오는 것임을 안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마음이 들뜨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다. 세속의 즐거움 따위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도(道)를 따른다.


셋째,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항상 어떤 것을 갈망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항상 무엇인가를 구하는 중에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깨어 있다. 그들의 이성은 세상의 길과 차원을 달리한다. 그들은 마음을 성스러운 곳에 고정시키고 몸마저 계절의 흐름에 따라 변화시킨다. 모든 현상계는 공허하다. 그것들은 추구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이며 복과 화는 영원히 함께 한다. 삼계(三界)에 머무는 것은 불타는 집 속에 있는 것과 같다. 육체가 있는 한 그 사람은 고통스럽다. 어떤 사람이 그 속에서 평화롭게 안주할 수 있겠는가?


넷째는, 다르마(法)를 따라 사는 것이다. 다르마란 만물이 본질적으로 순수하다는 진리를 일컫는다. 이 진리에 따르면 모든 현상은 텅 빈 공(空)이다. 거기에는 더러움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경에 이르기를 "다르마는 어떤 존재도 포함하지 않는다. 존재의 더러움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르마에는 자아가 없다. 자아의 더러움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진리를 충분히 체득하고 확신하여서 다르마에 따라 실천한다.


다르마 그 자체는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다르마를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몸과 생명과 소유물을 아낌없이 베푼다. 그들은 후회하지도 않고, 주는 자와 받는 자라든가 선물을 준다든가 하는 허영심이 없으며, 선입견도 집착도 갖지 않는다. 그들 자신의 수행을 통해 그들은 남을 도울 수 있으며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 이 자비의 덕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다른 덕들을 행한다. 하지만 망상을 떨쳐 버리기 위하여 여섯 가지의 덕을 행하고도 그들은 전혀 행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다르마를 따라 사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한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하다. 그는 환상을 그치며 어떤 것도 구하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 곧 고통이다.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축복이다."라고 했다. 그대가 아무 것도 구하지 않을 때 그대는 이미 도(道)안에 있다.




2. 그대 자신 속으로 순례를 떠나라 (달마의 血脈論 1 - 無心)


삼계(三界)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마음으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들이 문자의 정의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한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마음을 정의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말하는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그대는 묻는다. 그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나는 대답한다.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 만일 내게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대 역시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물을 수 있겠는가? 묻고 있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시작도 없는 영겁의 세월을 통해서 그대가 무엇을 행하든지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것이 바로 그대의 진짜 마음이다. 그것이 그대의 진짜 부처이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는 그대는 다른 어떤 부처도 찾을 수 없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 깨달음이나 열반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때의 마음이란 인과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그대 자신의 순수한 본성을 가리킨다. 그대의 마음이 바로 열반이다. 그대는 마음을 벗어난 다른 곳에서 부처나 깨달음을 찾을 수 있다고 여기겠지만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나 깨달음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허공을 움켜쥐려고 하는 것과 같다. 허공은 이름만 있을 뿐 어떤 모양도 없다. 그것은 그대가 들어 올리거나 내려놓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대는 결코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 그대는 결코 부처를 볼 수 없다. 부처는 그대의 마음에서 나온다. 왜 이 마음을 벗어나서 부처를 찾으려고 하는가?


과거와 미래의 부처들이 오직 이 마음에 대해서만 말했다. 이 마음이 부처이다. 그리고 부처가 마음이다. 마음을 벗어나서는 부처가 없고 부처를 벗어나서는 마음도 없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벗어난 곳에 부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마음을 벗어난 곳에 부처는 없는데 왜 그대는 있다고 상상하는가? 그런 식으로 그대가 자신을 속이는 한 결코 그대의 진짜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대가 생명도 없는 모양에 얽매이는 한 그대는 자유를 누릴 수가 없다. 그대가 내 말을 믿지 않더라도 그대 자신을 계속 속이는 것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부처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망상에 빠져 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안다면 그들은 더 이상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않을 것이다.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사용해서 부처를 찾는다면 그대는 부처를 볼 수 없다. 그대가 마음 밖의 다른 곳에서 부처를 찾는다면 그대는 자신의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부처를 섬기는 데 부처를 이용하지 말라. 그리고 부처에게 비는 데 마음을 사용하지 말라. 부처들은 경전을 암송하지도 않는다. 부처들은 어떤 계율도 지키지 않으며 그렇다고 계율을 깨지도 않는다. 부처들은 어떤 것을 따르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부처들은 선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지 않는다.


부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이 바로 부처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은 채 부처에게 빌고 경전을 외우며 예물을 바치고 계율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물론 부처를, 섬기는 것은 좋은 업을 쌓는 것이며 경전을 외우는 것도 좋은 기억을 갖는 것이다. 계율을 지키는 것도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해주며 예물을 드리는 것도 장래에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부처는 없다.




3. 그대의 본성 외에는 부처가 따로 없다 (달마의 血脈論 2 - 本性)


만일 그대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삶과 죽음의 밑바닥에 이르기 위해 스승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찾은 스승이라도 그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한 이상은 스승이 아니다. 그가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항상 암송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삶과 죽음의 바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는 해탈의 희망도 없이 삼계 속에서 고통 받는다.


옛날에 선성(善星)비구는 그 경전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존성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선성 비구도 이와 같을진대, 오늘날 몇 구절의 경이나 외우고서는 이것이 다르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리석은 바보들이다.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보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소용이 없다.


부처를 찾기 위해서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그대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 전부다. 그대의 본성이 바로 부처다. 그리고 부처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는 모든 계획과 근심 걱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대가 그대의 본성을 보지 않고서 하루 종일 다른 곳으로 찾아다니더라도 그대는 결코 깨달음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 찾아야 할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진리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대에게 스승이 필요하다. 그리고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 그대는 힘껏 노력해야 한다. 삶과 죽음은 소홀히 넘길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을 헛되이 겪지 말라. 부질없이 그대 자신을 속이지 말라. 그대가  보석을 산처럼 쌓아 놓고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을지라도 눈을 떠야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대가 눈을 감고 있다면 그것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그대는 그대에게 보이는 모든 것이 꿈이요 환상임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그대가 곧 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대는 이번 생을 헛되이 살 것이다. 그대가 불성을 갖고 있는 것은 진리이다. 하지만 스승의 도움 없이는 그대는 결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스승의 도움 없이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은 백만 명 중에 하나 정도이다.


만약 인연의 결합으로 붓다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스승이 필요 없다. 그러한 사람은 어떤 가르침보다 뛰어난 천부적인 깨달음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런 축복을 받지 않은 한 열심히 공부하라. 그러면 스승의 지도 아래서 그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자신들이 공부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망상에 빠져 흑과 백을 가릴 줄 모르는 자들과 다르지 않다. 불법을 엉터리로 선언하는 사람들은 붓다를 모독하고 다르마를 뒤집어엎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비를 부르는 양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설법은 부처들의 설법이 아니라 마귀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선생은 마귀의 왕이다. 그들 제자들 은 마귀의 앞잡이들이다. 망상에 빠져 그러한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부지중에 생사의 바다에 깊이 가라앉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본성을 보지 않는 한 어떻게 자신들을 부처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사람들을 속여서 마귀의 세계로 이끄는 거짓말쟁이들이다. 그들은 본성을 보지 않는 한 그들이 십이연기설을 설법한다 해도 그것은 마귀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마라(滅)에게 충성하는 것이지 붓다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흑과 백을 구별할 줄 모르는 자들이 어떻게 삶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처다. 그렇지 않은 자는 누구든지  중생이다. 그러나 중생의 본성과 따로 떨어진 곳에서 부처의 본성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러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중생의 본성이 곧 부처의 본성이다. 이 본성을 벗어나서는 부처도 없다. 부처는 우리의 본성이다. 이 본성 외에 더 이상의 부처도 없고 부처 외에 더 이상의 본성도 없다.




4. 부처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달마의 血脈論 3 - 眞身)


"만약 제가 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부처에게 빌고, 경전을 독송하며, 공양물을 바치고, 계율을 지키며, 불법에 헌신하고, 선을 행하더라도 여전히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까?"


그렇다. 그대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왜 성취할 수 없습니까?"


그대가 어떤 것을 성취한다 해도 그것은 모두 조건에 따른 것이며 업에 따른 결과다. 그것은 인과응보의 결과다. 그것이 윤회의 바퀴를 돌린다. 그대가 삶과 죽음의 바퀴 속에 매여 있는 한 그대는 결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 모든 말들이 무의미한 것이다. 부처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부처는 업으로부터 자유롭다. 원인과 결과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이가 바로 부처다. 만약 그대가 부처가 어떤 것을 성취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처를 죽이는 짓이다. 부처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한 생각이나 한 힘, 한 지식이나 한 견해에 매달리는 것이 부처에게는 불가능하다. 부처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존재가 아니다. 부처의 마음은 비어 있는 것이 그 본성이라서 순수하고 순수하지 않은 것 모두를 초월한다. 그는 깨달음이나 수행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는 원인과 결과로부터 자유롭다.


부처는 계율을 따르지 않는다. 부처는 선을 행하지도 않고 악을 행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부지런하거나 게으르지도 않다. 부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부처라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만약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그대는 결코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서 그저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행함이 없는 수행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이며 어리석은 바보들이다. 그들은 끝없는 허공에 떨어질 것이다. 그들은 술 취한 자와 같다. 그들은 악으로부터 선을 가려낼 줄도 모른다. 만약 그대가 아무 것도 행함이 없는 수행을 하려 한다면, 그대는 먼저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논리적인 사고를 멈출 수가 있다. 그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고서 깨달음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모든 종류의 악행을 저지르면서 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공허하다고 생각하면서 악행을 저지르고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사람은 벗어날 희망이 없는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떨어질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그런 견해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모든 순간이나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라면, 왜 누군가 몸이 죽었을 때 우리는 이 마음을 보지 못합니까?"


마음은 항상 존재한다. 단지 그대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존재한다면 왜 제가 보지 못합니까?"


그대는 꿈을 꾸어 보았는가?


"물론입니다."


그대가 꿈을 꿀 때 그것은 그대인가?


"예, 바로 접니다."


그러면 그대가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그것들은 그대와 별개의 것인가?


"나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별개의 것이 아니라면 이 몸이 그대의 진짜 몸이다. 그대의 진짜 몸, 즉 진신(眞身)은 그대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시작도 없는 영겁의 세월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다. 그것은 결코 살지도 죽지도 않는다. 사라지거나 다시 나타나지도 않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 그것은 깨끗하거나 더럽지도 않으며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그것은 과거의 것도 미래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그것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그것은 승려나 속인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늙은이나 신참자도 아니며, 성자나 바보도 아니다. 그것은 부처도 아니며 중생도 아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업으로부터 고통 받지도 않는다. 그것은 어떤 힘이나 형체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허공과 같다. 그대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물론 잃어버릴 수도 없다. 그것은 산이 막혀도 통과하며 강이나 바위도 그냥 지나간다. 그것의 멈출 수 없는 힘은 오대(五大)의 산을 넘어가고 삼사라(Samsara)의 강을 건너간다. 어떤 업도 이 진짜 몸을 제한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마음은 너무나 미묘해서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감각적인 마음과 같지 않다. 모든 사람이 이 마음을 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 마음의 빛에 의해서 손과 발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다. 그러나 그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은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이 마음이 뜻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같다. 그것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은 왜 그것을 보지 못할까?




5. 진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다 (달마의 血脈論 4 - 眞如)


붓다는 사람들이 망상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행위를 통해 끝없는 윤회의 강에 뛰어든다.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더 깊이 가라앉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망상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들 바로 앞에 존재해 있는 것에 대해 물어 보겠는가? 그들 중에 한 사람도 자신의 손과 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붓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망상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부처가 된 사람만이 헤아리기 어려운 무엇을 알며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진정 지혜로운 자만이 이 마음을 안다. 이 마음은 다르마의 본성으로 불린다. 또한 이 마음은 해탈로 불린다. 삶과 죽음이 이 마음을 제한하지 못한다. 이 마음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또한 멈출 수 없는 여래(如來), 불가해한 것, 신성한 자아, 불멸, 위대한 현자로도 불린다. 그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리지만 그것의 본질은 하나다. 부처들 역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자신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마음의 능력은 한계가 없다. 그것의 나타남 또한 다함이 없다. 그대의 눈으로 형태를 보고 그대의 귀로 소리를 들으며 혀로 맛을 보고 모든 방식으로 느낄지라도 그것은 모두 그대의 마음이다. 매순간 언어로는 가닿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경에 이르기를, "여래의 모습은 끝이 없으며, 그의 깨어 있음 또한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이 끝없는 모습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떤 동작, 어떤 형태의 것이든 사물을 구분하는 능력은 마음의 깨어 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어떤 특정한 모습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깨어 있음에도 한계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래의 모습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의 깨어 있음 또한 마찬가지다."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 육체는 문제가 있다. 물질적인 육체는 삶과 죽음에 따라서 좌우된다. 그러나 진신은 존재함 없이 존재한다. 여래의 진신은 결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기를 "부처의 본성이란 자기가 항상 갖고 있는 어떤 것임을 사람들은 깨달아야 한다."라고 했다. 마하가섭도 오직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것이다.


또 경에 이르되 "모습을 가진 모든 것은 환상이다."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 부처가 있다."라고 했다. 그대의 마음이 부처이다. 부처로 하여금 부처를 숭배하게 하지 말라.


부처나 보살이 갑자기 그대 앞에 나타나더라도 그대는 그를 존경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이 마음은 비어 있으며 어떤 모습도 담고 있지 않다. 겉모습에 매달리는 자들은 모두 마귀들이다. 그들은 길에서 떨어져 나간다. 왜 마음에서 일어나는 허깨비를 숭배하는가? 그것을 숭배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는 자는 숭배하지 않는다. 숭배하게 되면 그대는 마귀의 수하에 떨어진다. 내가 이렇게 지적하는 것은 그대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까 염려해서다. 부처의 본래면목은 어떤 모습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기이한 것이 나타나더라도 이 말을 명심하다.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고 그대의 마음이 본래 순수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도 말라. 그대의 순수한 마음 어디에 그런 모습이 자리 잡을 수 있겠는가? 또한 귀신이나 마귀나 신령한 것들이 나타난다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존경하지도 말라. 그대의 마음은 본래부터 텅 비어 있다. 모든 겉모습들은 환상일 뿐이다. 겉모습에 집착하지 말라.




6. 진정한 이해는 문장 중간에서 얻어진다. (달마의 血脈論 5 - 禪道)


만일 그대가 부처나 다르마나 보살을 상상하고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품는다면 그대는 자신을 죽을 수밖에 없는 중생의 위치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직접적인 이해를 얻기 원한다면 어떠한 모양에도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뜻을 이룰 것이다. 나는 그것 외에 다른 어떤 충고도 해줄 수 없다.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부처와 한 가지 마음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왜 우리는 부처와 보살을 숭배하면 안 됩니까?"


마귀와 귀신들은 모습을 나타내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온갖 가장을 하고서 보살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가짜다. 그것들 중의 어느 하나도 부처가 아니다. 부처는 그대 자신의 마음이다. 그대의 숭배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지 말라.


부처란 본래 범어(梵語)로서 '깨어 있음'을, '불가사의한 깨어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반응하고 이해하고,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박이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그 모든 것이 그대의 불가사의하게 깨어 있는 본성이다. 그리고 이 본성이 바로 마음이며, 그 마음이 부처이다. 그 부처가 곧 도(道)이다. 그 도가 선(禪)이다. 그러나 선이란 말은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이 바로 선이다.


만약 그대가 수천 가지 경전을 다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한 그대의 설명은 중생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다. 진정한 도는 너무나 위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경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 구절의 글도 읽지 못할지라도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은 도를 찾을 수 있다.


부처가 말하는 모든 것은 그의 마음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의 몸과 표현이 본래 텅 빈 것이므로 그대는 말에서 부처를 찾을 수 없다. 도는 본래 완전하다. 그것은 또다시 완전해질 필요가 없다. 도는 형체나 소리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해서 붙잡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그대가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그대는 물이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찬지 안다. 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 할 수는 없다. 오직 여래만이 아는 그것은 인간이나 신도 알지 못한다. 중생의 깨어 있음은 결코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이 모양에 집착하는 한 그들의 마음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물의 외양에 집착하는 실수 때문에 그들은 도를 잃는다.



만약 그대가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안다면, 집착하지 말라. 한번 그대가 집착하게 되면 그대는 깨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고 나면 경전 전체가 덧없는 장광설로 들릴 것이다. 수천 가지 경문이 하나의 밝은 마음에 못 미친다. 진정한 이해는 문장 중간에서 얻어진다. 그러니 교리가 무슨 쓸모인가?


궁극적인 진리는 언어를 초월한다. 교리는 말의 차원이다. 그것은 도가 아니다. 도는 말없음이다. 말은 환상이다. 그것들은 궁전이든 마차든 밤중의 꿈에 나타나는 사물과 다르지 않다. 그것들을 가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그것들은 모두 윤회의 요람이 될 뿐이다. 그대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이 사실을 명심하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대는 모든 장벽을 넘어갈 것이다. 죽음이 왔을 때 한순간만 머뭇거려도 그대는 마귀의 수하에 떨어질 것이다. 그대의 진신은 순수하고 결함이 없다. 그러나 망상에 빠진 까닭에 그대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그대는 헛되이 고통 받는다. 그대가 즐거움을 발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거기에 속박이 있다. 그러나 그대가 한번 본래의 존재와 마음을 깨우치면 그대는 더 이상 어떤 집착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7. 준비를 갖추고 그대의 상속권을 요구하라 (달마의 血脈論 6 - 覺醒)


세속을 위해서 초월을 포기한 사람은 아무리 많은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모두 중생이다. 부처는 좋은 운명이나 나쁜 운명에서도 자유를 찾아내는 사람이다. 그의 힘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는 행위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행위라도 부처는 그것을 탈바꿈시킨다. 천국이나 지옥이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만일 그대에게 확신이 없다면 행동하지 말라. 한번 그대가 행동하면 그대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할 것이며 피난처가 없음을 후회할 것이다. 이 마음을 이해한다면 그대는 행동함이 없이 행동해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여래의 안목으로 사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처음 도의 길을 출발할 때 그대의 깨어 있음은 잘 집중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마치 온갖 이상한 꿈같은 장면을 보는 것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 모든 장면들이 다른 곳에서가 아닌 그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의심하지 말아야한다.


만일 그대가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본다면 그대 속에 남아 있던 집착은 갑자기 끝나 버릴 것이다. 그리고 실체의 본질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깨달음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대만이 아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 혹은 그대가 걷고 서고 앉거나 밤의 어둠과 정적 속에 누워 있는 동안 모든 것이 마치 대낮의 햇빛 속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나타나더라도 그대는 놀라지 말라. 그것은 그대의 마음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본다면 그대는 더 이상 경전을 읽거나 부처에게 빌 필요가 없다. 학식이나 지식 따위는 한낱 쓸모없는 것일 뿐 아니라 의식을 가리는 구름이다. 경전의 교리는 그대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본 이상 교리에 집착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중생에서 벗어나서 부처로 가기 위해서는 그대는 모든 행위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그대의 깨어 있음을 키우고 삶이 가져다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번 중생이 그들의 본성을 보면 모든 집착이 끝나 버린다. 깨어있음은 더 이상 감추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대는 지금 이 순간에서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직 지금뿐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도를 찾고 싶다면 어떤 것에도 매달리지 말라. 한번 그대가 모든 행위의 종지부를 찍고 그대의 깨어 있음을 키우면 남아 있는 모든 집착은 사라질 것이다. 이해가 저절로 찾아온다. 그대는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광신자는 붓다가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더욱 애쓸수록 그들은 성인의 본뜻에서 더욱 멀어진다. 하루 종일 그들은 부처에게 빌고 경전을 외운다. 그러나 자신의 신성한 본성에 대해서 그들은 여전히 장님이다. 그래서 그들은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처는 한가한 사람이다. 그는 복과 명성을 좇아서 뛰어다니지 않는다. 결국은 그러한 것들이 뭐 그리 좋겠는가?




8. 누구나 계속 잠잘 권리가 있다 (달마의 血脈論 7 - 空寂)


석가모니의 십대 제자 중에서 아난다(阿難陀)는 배움에 있어서 일인자였다. 그러나 그는 붓다를 알지 못했다. 그가 한 것은 단지 공부하고 암기하는 일이었다. 아라한(阿羅漢)들은 붓다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는 수행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지만 인과의 법칙에 붙들려 있다. 그러한 것이 중생의 업이다. 탄생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붓다가 가르친 반대의 일만 행함으로써 그러한 사람들은 붓다를 모독한다. 그들은 죽여도 허물이 안 된다. 경에 일었으되 "외도(外道)들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아니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비난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자는 불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라고 했다.


자신의 마음이 부처임을 아는 사람은 머리를 깎을 필요가 없다. 속인도 부처다. 머리를 깎은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으면 한낱 광신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결혼한 속인은 그들의 성생활을 포기하지 않는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나는 오직 그대의 본성을 보는 일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나는 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면 성이란 기본적으로 허깨비에 불과하다. 그대가 그 속에서 즐거움을 구하지 않음에 따라 그것은 사라져 버린다. 설령 어떤 습관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들은 그대에게 해를 끼칠 수가 없다. 그대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오온(五蘊)의 허깨비 몸속에 살지언정 그대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순수하다. 그것은 결코 더럽혀질 수 없다.


한번 그대가 집착을 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면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조차도, 그대는 모든 것을 탈바꿈시킬 것이다. 그대는 막힘없는 영적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대는 평화로울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의심하면 그대는 어떤 것을 통해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번 그대가 행동하면 그대는 생과 사의 바퀴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가 한번 자신의 본성을 보면 그대는 이미 부처다. 설령 그대가 백정의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러나 백정은 짐승을 도살함으로써 업을 짓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나는 오직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나는 업을 짓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업은 우리를 잡아두지 못한다.


인도에서는 스물일곱 명의 조사들께서 오직 마음의 등불을 전하셨다. 그리고 내가 중국에 온 단 한 가지 이유는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대승불교의 즉각적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다. 나는 계율이나 헌신 혹은 고행 수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말과 행동, 견해나 개념은 모두 수시로 변하는 마음의 작용들이다. 모든 움직임이 바로 마음의 움직임이다. 마음은 움직이지도 않고 작용하지도 않는다. 그 작용의 본질은 비어 있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어 있음이란 본래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움직임 없이 움직이고, 떠남 없이 떠나고, 봄 없이 보고, 웃음 없이 웃고, 들음 없이 듣고, 앎 없이 알고, 기뻐함 없이 기뻐하고, 걸음 없이 걷고, 머무름 없이 머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에 이른다. "언어를 넘어서 가라. 생각을 넘어서 가라."


나는 계속할 수도 있지만, 이 간단한 설법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9. 죽은 자는 피를 흘리지 않는다. (달마의 悟性論 1 - 佛乘)


도(道)의 본질은 집착을 벗어남에 있다. 그리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겉모습으로부터의 자유에 있다. 경에 이르기를 "무집착이 곧 깨달음이다. 그것은 겉모습을 부정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삼계는 욕심과 성냄과 망상의 세계다. 삼계를 떠나는 것은 곧 욕심과 성냄과 망상으로부터 떠나서 계(戒), 정(定), 혜(慧)로 돌아감을 뜻한다. 경에 일렀으되 "부처들은 세 가지 독(毒)과 함께 살면서 순수한 다르마로 자신을 키워나감으로써만이 부처가 되었다."라고 했다. 세 가지 독이란 욕심과 성냄과 망상이다.


대승(大乘)은 모든 수레 중에 가장 위대하다. 그것은 보살들이 타고 가는 수레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사용함이 없이 모든 것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들은 여행함이 없이 하루 종일 여행한다. 그러한 것이 바로 부처들의 수레이다. 경에 이르기를 "수레 없음이 바로 부처의 수레[佛乘]이다."라고 했다.


또 경에 이르기를 "오대(五大)의 동굴이 선(禪)의 마당이며 내면의 눈을 뜨는 것이 대승의 문이다."라고 했다. 무엇이 이것보다 더 명료할 수 있겠는가?


아무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음이 곧 선이다. 한번 그대가 이것을 알면 걷고 서고 앉고 눕는, 그대가 행하는 모든 것이 선이다. 마음이 비어 있음을 아는 것이 곧 붓다를 보는 것이다. 시방(十方)의 부처들이 어떤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무심을 보는 것이 곧 붓다를 보는 것이다.


아무런 후회 없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자선이다. 움직임과 고요함을 모두 초월하는 것이 가장 지고한 명상이다. 중생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아라한은 고요히 머문다. 그러나 지고한 명상은 이들 중생과 아라한 둘 다를 뛰어넘는다.


이러한 이해에 도달한 사람은 노력을 하지 않고도 모든 겉모습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치료하지 않고도 모든 병을 낫게 한다. 그러한 것이 위대한 선의 능력이다.




10. 마음에 머물지 않는 한 모든 것이 완전하다 (달마의 悟性論 2 - 中道)


마음을 사용해 실체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망상이다. 마음을 사용하지 않고 실체를 찾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것이다. 말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해탈이다. 감각의 먼지에 때 묻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이 다르마를 지키는 일이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 집을 떠나는 것이다. 다른 존재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 도(道)에 이르는 것이다. 망상을 피우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다. 무지에 몰두하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 곧 열반이다. 그리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곧 피안(彼岸)이다.


치우치지 않은 다르마의 관점에서 보면 중생은 성자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치우치지 않은 다르마는 중생도 꿰뚫을 수 없고 성자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했다. 치우치지 않은 다르마는 오직 위대한 보살들과 부처들만이 행할 수 있다. 삶을 죽음과 다르게 보거나, 동(動)을 정(靜)과 다르게 보는 것은 이미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고통을 열반과 다르게 보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 둘의 본질이 본래 텅 빈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고통에 종지부를 찍었다거나 열반에 들어갔다고 상상함으로써 아라한들은 결국 열반이라는 덫에 걸리고 만다.


그러나 보살들은 고통이 본래 텅 빈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텅 빔에 머물기에 그들은 열반에 머문다. 열반은 탄생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그것은 탄생과 죽음을 초월하며 열반이라는 것 자체도 초월한다. 마음이 움직임을 멈출 때 그것은 열반에 들어간다. 열반은 텅 빈 마음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과 같으니 욕심도 성냄도 망상도 없다.


마음이 하나의 허구이며 전혀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님을 안다. 중생들은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을 만들어 낸다. 아라한들은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을 부정한다. 그러나 보살들과 부처들은 마음을 만들어 내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을 중도 (中道)라고 부른다. 그대 안에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그대 바깥에서 세상도 일어나지 않는다. 바깥 세계와 마음이 둘 다 투명해질 때 이것이 진정한 통찰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가 진정한 이해이다.




11. 마음은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달마의 悟性論 3 - 實體)


경에 이르기를 "지혜를 놓아 주지 않는 것이 어리석음이다"라고 했다. 마음이 존재하지 않을 때,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둘 다 진실이다. 마음이 존재할 때,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둘 다 거짓이다.


그대가 알 때, 실체가 그대에게 의존한다. 그대가 알지 못할 때는 그대가 실체에 의존한다. 실체가 그대에게 의존할 때, 실재하지 않는 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된다. 그대가 실체에 의존할 때, 실재하는 것이 거짓이 된다. 그대가 실체에 의존할 때, 모든 것이 거짓이다. 실체가 그대에게 의존할 때, 모든 것이 진실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실체를 찾기 위해서 그의 마음을 사용하거나, 또는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실체를 사용하거나, 또는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마음을 사용하거나, 또는 실체를 찾기 위해서 실체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의 마음은 실체를 지어내지 않는다. 그리고 실체는 그의 마음을 지어내지 않는다. 그의 마음과 실체가 둘 다 고요하기 때문에 그는 항상 삼매 속에 있다.


경전에 이르기를 "아무 것도 제 본성을 가진 것은 없다."고 했다. 행동하라. 질문하지 말라. 질문할 때 그대는 틀린 것이다. 그대가 망상에 사로잡힐 때, 여섯 가지 감각과 다섯 가지 원소가 고통과 죽음의 구조물이다. 그대가 깨어날 때, 여섯 가지 감각과 다섯 가지원소는 열반과 불멸의 구조물이다.


도를 구하는 자는 자신을 벗어난 곳에서 찾지 않는다. 그는 마음이 도인 것을 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발견할 때 그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도를 발견할 때 그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사용해서 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대가 망상에 사로잡힐 때 불성이 존재한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불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깨어 있음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을 미워하지도 말며, 삶과 죽음을 사랑하지도 말라. 그대의 모든 생각이 망상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 그대는 삶 속에서 열반이 시작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형태에 물들지 않고 형태를 보며, 소리에 물들지 않고 소리를 듣는 것이 해탈이다. 형태에 집착하지 않는 눈이 선(禪)의 문이다. 소리에 집착하지 않는 귀 역시 선의 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고 무집착에 머무는 자는 해탈에 이른 것이다.


망상에 사로잡힘이 없을 때 마음은 불국토가 된다. 망상에 사로잡힘이 있을 때 마음은 지옥이다.




12. 모든 고통은 부처의 씨앗이다 (달마의 悟性論 4 - 佛種子)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도(道)의 길에서 목격된 것이다. 그것은 아라한들과 중생의 시야를 넘어서는 것이다.


마음이 열반에 이르면 그대는 열반을 보지 못한다. 마음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마음 밖 어디선가 열반을 본다면 그대는 스스로를 망상에 빠뜨린 것이다.


모든 고통이 부처의 씨앗이다. 고통이 있음으로 해서 지혜를 찾아 나서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고통이 불성을 일으킨다는 말은 할 수 있어도 고통이 바로 불성이라는 말은 할 수 없다. 그대의 몸과 마음은 하나의 밭이다. 고통은 그 씨앗이다. 지혜는 그 싹이고 불성은 그 낟알이다.


그대의 마음속에 세 가지 독이 있을 때 그대는 예토(穢土)에 사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속에 세 가지 독이 없을 때 그대는 정토(淨土)에 사는 것이다.


다르마가 아닌 언어는 없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하루 종일 말하는 것이 도(道)이다. 하루 종일 침묵하며 앉아 있어도 무엇인가를 떠든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의 말은 침묵에 의존하지 않으며 그의 침묵은 말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말은 그의 침묵과 떨어져 있지 않다. 말과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은 삼매 속에 있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아는 것을 말하면 그대의 말은 자유롭다. 만약 그대가 알지 못하면 그대가 침묵을 지킨다고 해도 그 침묵은 구속되어 있다. 언어란 본래 자유롭다. 그것은 어떤 집착과도 관계가 없다. 그리고 집착 역시 언어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13. 마음은 그대를 얽어매는 굴레이다 (달마의 悟性論 5 - 衆生)


마음이 없이는 부처도 없다는 말은 부처가 마음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부처를 보기 원한다면 부처를 보기 전에 먼저 마음을 보라. 한번 그대가 부처를 보면 그대는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린다.


만약 그대가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리지 않으면 마음이 그대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중생심과 불성은 물과 얼음의 관계이다. 세 가지 독으로 고통 받으면 그것은 중생심이고, 세 가지 독에서 벗어나서 순수해지면 그것은 불성이다.


겨울이 되어 얼었던 얼음은 여름이 되면 녹아서 물이 된다.


얼음을 없애고 나면 더 이상 거기에 물이 남아 있지 않다.


중생심을 제거하면 거기에 더 이상 불성은 없다. 분명 얼음의 본성은 곧 물의 본성이다.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키고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공평함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중생이 부처를 해탈시키는 것은 고통이 깨어 있음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처가 중생을 해탈시키는 것은 깨어 있음이 고통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거기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에 깨어 있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고통이 없다면 깨어 있음을 탄생시킬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깨어 있음이 없다면 고통을 부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대가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부처가 중생을 해탈시킨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중생이 부처를 해탈시킨다. 부처는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없다. 중생이 부처를 해탈시킨다. 모든 부처들은 망상을 아버지로 삼고 욕심을 어머니로 삼는다. 망상과 욕심은 중생의 다른 이름들이다.


그대가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대는 이쪽 언덕에 있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저쪽 언덕에 있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자신의 마음이 비어 있는 것을 알고 어떤 겉모습에도 눈길을 주지 않을 때, 그대는 망상과 깨어 있음 모두를 초월한다. 그리고 그대가 한번 망상과 깨어 있음을 초월할 때 저쪽 언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는 이쪽 언덕에도 없고 저쪽 언덕에도 없다. 그리고 강물의 중간에도 없다. 아라한은 강물 중간에 있다. 그리고 중생은 이쪽 언덕에 있다. 저쪽 언덕에는 불성이 있다.




14. 부처를 만나는 것은 위험하다 (달마의 悟性論 6 - 三身)


부처들은 세 가지 몸[身]을 갖고 있다. 그 세 가지는 응신(應身), 보신(報身), 법신(法身)이다. 응신은 현신(現身)이라고도 부른다. 현신은 중생이 선행을 할 때 그 모습을 나타낸다. 보신은 중생이 지혜를 쌓을 때, 그리고 법신은 중생이 숭고한 것을 깨달을 때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 부처들은 세 가지 몸이 아니라 단 한 가지의 몸도 갖고 있지 않다. 세 가지의 몸이란 말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이해력은 얕을 수도 있고 중간일 수도 있고, 깊을 수도 있다.


이해력이 얕은 사람은 자기가 복을 쌓는다고 상상하면서 현신을 부처로 착각한다. 중간 정도의 이해력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고통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상상하면서 보신을 부처로 착각한다. 그리고 이해력이 깊은 사람은 자신이 불성을 체험하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법신을 부처로 착각한다. 그러나 가장 깊은 이해에 도달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는다. 텅 빈 마음이 곧 부처이기에 그들은 마음을 통하지 않고 곧바로 부처를 이해한다.


각 개인이 업을 만든다. 업이 각 개인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직 완전한 사람만이 이생에서 어떤 업도 짓지 않고 또 그것의 보상도 받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업을 짓지 않는 사람은 다르마를 성취한다."고 했다. 그대가 업을 지을 때 그대는 그 업과 함께 다시 태어난다. 그대가 업을 짓지 않을 때 그대는 업과 함께 사라진다.


성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은 성인이다. 중생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은 중생이다. 중생의 가르침을 포기하고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성인이 된다. 그러나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은 성인을 멀리서 우러러보기만 한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지혜가 곧 성인의 지혜임을 믿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경전을 설하지 말라" 라고 했다.


또 경에 일렀으되 "모든 겉모습이 겉모습이 아님을 알 때 그대는 여래를 아는 것이다."


진리에 이르는 수천수만의 무들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마음의 겉모습들이 허공처럼 투명해질 때 그것들은 사라진다.


중생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염려한다. 그들은 배가 부를 때 배고픔을 염려한다. 그들의 삶에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성인은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다. 또한 현재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그들은 도의 길을 따른다.




15. 파상하라! 불성에 이를 때까지 (달마의 破相論 1 - 觀心)


"만일 누군가가 깨달음에 이르고자 결심했다면 그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어떻게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할 수 있습니까?"


마음은 모든 것이 자라나는 뿌리이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이 거기에 포함된다. 그것은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그 나무의 모든 열매와 꽃들, 모든 가지와 잎들이 뿌리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그대가 그 뿌리에 거름을 주면 나무는 크게 자란다. 만일 그대가 그 뿌리를 자른다면 그 나무는 죽는다.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깨달음에 이른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슨 수행을 하더라도 헛된 것이다. 모든 선과 악이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 너머에서 무엇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마음을 지켜보는 것을 이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위대한 보살이 완전한 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 그는 마음의 활동에 두 가지 면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순수함과 비순수함이다. 순수한 마음은 선한 행위에 기뻐하며, 비순수한 마음은 악을 생각한다. 비순수함에 영향 받지 않는 사람이 곧 성인이다. 그들은 고통을 초월해서 열반의 축복을 경험한다. 비순수한 마음의 덫에 걸리고 자신의 업에 얽매인 다른 모든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중생이다. 그들은 삼계를 방황하며 셀 수 없는 번뇌로 고통 받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들의 비순수한 마음이 그들의 진아를 흐려놓기 때문이다.


십지경(十地經)에 이르기를 "중생의 몸 안에는 파괴할 수 없는 불성이 들어 있다. 그것은 태양과 같이 한없는 공간을 그 빛으로 채운다. 그러나 한번 오온(五蘊)의 어두운 구름에 가려지면 그 빛은 항아리 안의 빛처럼 숨겨져 보이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리고 열반경(涅盤經)에서도 이르기를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어둠에 가리어져 있다. 우리의 불성은 깨어있음이다. 자신도 깨어 있고 남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다. 깨어있음을 실현하는 것이 해탈이다."라고 했다.


모든 선행은 깨어 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뿌리로부터 모든 덕의 열매와 열반의 열매가 자란다.




16.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세우라 (달마의 破相論 2 - 無明)


 "당신은 우리의 참된 불성과 모든 덕이, 깨어 있음을 그 뿌리로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지[無明]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무수한 번뇌와 열망과 악을 지닌 무지한 마음은, 욕심과 성냄과 망상의 세 가지 독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세 가지 독에 중독된 마음은 그 자신 속에 셀 수 없이 많은 악을 담고 있는데, 마치 나무가 하나의 둥치에 셀 수 없이 많은 잎과 가지를 갖고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각각의 독이 훨씬 더 많은 수백만 가지의 악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나무의 비유조차도 그것에 어울릴 수 없을 정도이다.


세 가지 독은 우리의 여섯 가지의 감각 속에 여섯 가지의 식(識) 혹은 도둑들로 존재한다. 그것들이 도둑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 감각들의 문을 드나들면서 무수히 많은 소유를 탐하고 악에 빠지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가면까지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그것의 근원을 잘라버린다면 강물은 말라버린다. 만약 누군가 해탈을 추구하는 사람이 이 세 가지 독을 세 가지 계율로 바꾸고, 여섯 도둑을 육바라밀로 바꾼다면, 그는 모든 번뇌를 일시에 끊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삼계와 존재계의 육도는 무한히 광대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고작 마음을 지켜보는 일이라면, 어떻게 이 끝없는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삼계의 업은 오직 마음에서 나온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삼계 속에 있지 않으면 그것은 삼계를 초월한 것이다.


"그러면 육도의 업은 어떻게 다릅니까?"


참된 수행을 이해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선행을 행하는 중생들은 삼계에 태어난다. 맹목적으로 열 가지 선행을 행하고 어리석게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욕망의 세계에 신으로 태어난다. 맹목적으로 다섯 가지 계율을 지키고 어리석게 애증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분노의 세계에 사람으로 태어난다. 맹목적으로 현상계에 집착하고, 거짓된 교리를 믿으며, 축복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망상의 세계에 귀신으로 태어난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마음에 집중해서 그것의 거짓과 악을 초월할 수 있다면 존재의 고통은 자동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한번 고통에서 자유로우면 그대는 진정으로 자유롭다.




17 그대의 전 재산을 걸라 (달마의 破相論 3 - 頓悟)


"그러나 붓다는 말하기를 '삼아승기겁(三阿僧祇劫) 동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나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이유로 단지 마음을 지켜보고 삼독(三毒)을 극복하는 것만으로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붓다의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삼아승기겁은 바로 삼독에 물든 마음을 가리킨다. 범어로 아승기겁이란 말은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이다. 이 삼독에 물든 마음에서 셀 수 없는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 모든 생각들은 일겁(一劫)의 세월 동안 계속된다. 붓다가 삼아승기겁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러한 무수히 많은 생각을 의미한다.


"그러나 위대한 보살들은 삼학(三學)을 지키고 육바라밀을 행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제자들에게 단지 마음을 지켜보라고만 말합니다. 수행의 규율을 따르지 않고서 누가 과연 깨달음에 이르겠습니까?"


삼학은 삼독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그대가 삼독을 극복했을 때 그대는 삼학의 한량없는 덕을 지을 것이다. 하나가 다른 것들을 불러 모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선한 생각들을 그대의 마음에 불러 모을 것이다. 그리고 육바라밀은 여섯 가지 감각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바라밀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대는 피안에 이르는 방편이라고 부른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낀 감각의 때를 벗겨 냄으로써 바라밀은 그대를 번뇌의 강 건너 깨달음의 언덕으로 실어 나를 것이다.


"경전에 따르면 삼학에 대해서 '나는 모든 악에 종지부를 찍을 것을 맹세한다. 나는 모든 덕을 키울 것을 맹세한다. 나는 모든 존재를 해탈로 인도할 것을 맹세한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심학이 단지 삼독을 잘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경전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붓다의 경전은 진리이다. 그러나 오래 전 그 위대한 보살이 깨달음의 씨앗을 키울 때, 그가 세 가지 맹세를 한 것은 이 삼독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다. 욕심의 독을 물리치기 위해 도덕적 규율을 수행함으로써 그는 모든 악에 종지부를 찍을 것을 맹세한 것이다. 성냄의 독을 물리치기 위해 명상을 수행함으로써 그는 모든 덕을 키울 것을 맹세한 것이다. 망상의 독을물리치기 위해 지혜를 수행함으로써 그는 모든 존재를 해탈로 인도할 것을 맹세한 것이다. 그가 이러한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의 수행을 지켜 나갔기 때문에 그는 삼독을 극복하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 삼독을 극복함으로써 그는 모든 죄업을 다 청산하고 악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삼학을 지킴으로써 그는 오로지 선을 행하고 덕을 키웠다. 그리고 악행에 종지부를 찍고 덕을 키움으로써 그는 모든 수행을 완성하고 자신뿐 아니라 남들까지도 이롭게 했으며 모든 곳에 있는 중생을 구원했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모든 존재를 해탈로 인도했다.




18. 깨어 있음이 곧 깨달음이다 (달마의 破相論 4 - 六波羅蜜)


그대가 닦는 수행이 그대의 마음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그대는 깨달아야 한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순결하다면 모든 불국토 또한 순결하다.


경에 이르기를 "그들의 마음이 불결하면 존재 역시 불결하다. 그들의 마음이 순결하면 존재 또한 순결하다."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불국토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대의 마음을 순결하게 하라. 그대의 마음이 순결해짐에 따라서 불국토가 순결해진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삼독심을 이김으로써 계, 정, 혜 삼학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경전에는 여섯 가지 바라밀이 자선[布施], 도덕[持戒], 인내[忍辱], 헌신[精進], 명상[禪定], 지혜[般若]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께서는 감각을 순결하게 하는 것이 바라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왜 그것들을 뗏목이라고 부릅니까?"


바라밀을 닦고 여섯 가지 감각을 순결하게 하는 것은 여섯 가지 도둑을 제압한다는 뜻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포기함으로써 시각의 도둑을 몰아내는 것이 곧 자선이다.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청각의 도둑을 막는 것이 도덕이다. 모든 냄새에 중용을 취함으로써 후각의 도둑을 납작하게 만드는 것이 인내이다. 맛보고 칭찬하고 설명하려는 욕망을 정복함으로써 미각의 도둑을 평정하는 것이 헌신이다. 감촉의 감각에 흔들리지 않음으로써 촉각의 도둑을 진압하는 것이 명상이다. 망상에 넘어가지 않고 깨어 있는 수행을 함으로써 마음의 도둑을 복종시키는 것이 지혜이다.


이 육바라밀은 운송수단이다. 나룻배나 뗏목처럼 그것들은 그대를 피안의 세계로 데려다 준다. 그래서 그것을 뗏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께서 보살이셨을 때, 그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 세 그릇의 우유와 여섯 국자의 죽을 마셨습니다. 만약 그가 불성의 열매를 맛볼 수 있기 전에 먼저 우유죽을 마셔야 했다면 어떻게 마음을 지켜보는 것으로만 해탈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대의 말은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방법이다. 그는 부처가 되기 전에 먼저 우유죽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두 종류의 우유죽이 있다. 석가모니가 마신 우유죽은 보통의 불결한 우유죽이 아니라 순수한 다르마의 우유죽이다. 세 그릇이란 삼학을 말하는 것이며, 여섯 국자란 육바라밀을 뜻하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가 불성의 열매를 맛본 것은 이 순수한 다르마의 우유죽을 마셨기 때문이다. 여래께서 세속의 불결한 혼합물인, 썩은 냄새 나는 암소의 젖을 마셨다고 말하는 것은 더할 수 없는 모독이다. 더없이 진실라고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냉정한 다르마의 자아는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롭다. 그것의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불결한 우유죽을 마실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경에 일었으되 "이 황소는 고원지대나 낮은 지대에 살지 않는다. 그것은 곡식이나 여물을 먹지 않는다. 그것은 암소와 함께 풀을 뜯지도 않는다. 이 황소의 몸빛은 타오르는 황금빛이다."라고 했다.


그 황소는 비로자나불을 가리킨다. 모든 존재를 향한 그의 대자비심으로 인해서, 그는 해탈을 추구하는 모든 이에게 먹이기 위해 자신의 순결한 다르마의 몸속에서 삼학과 육바라밀의 숭고한 우유죽을 만들어 낸다. 진정으로 순결한 그런 황소에게서 나온 순결한 우유죽이 여래로 하여금 불성을 성취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을 마시는 자는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19. 가슴 깊숙한 곳에서 신비를 맛보라 (달마의 破相論 5 - 修行)


"경전을 통틀어 붓다는 중생들이 다음과 같은 덕 있는 일을 함으로 써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덕 있는 일이란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며,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며, 영원한 등불에 불을 밝히고, 밤과 낮으로 여섯 번씩 수련을 하고, 탑을 돌며, 단식을 하고, 예배를 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지켜보는 일에 이들 수행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때 이 모든 일들은 중복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붓다의 경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비유들이 들어 있다. 중생들이 얕은 마음을 갖고 있어서 붓다는 거룩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 구체적인 것들을 사용한 것이다. 내면의 수행 대신 외부적인 행위에만 집중하면서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그대들이 절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는 상가라마 (sangharama), 즉 청정한 곳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삼독에 물들기를 거부하고 감각의 문을 청정하게 지키며 그의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고 안과 밖으로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의 절을 짓는 것이다.


불상을 조성하는 것 역시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 모든 종류의 수행을 닦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향을 사르는 것은 보통의 물질적인 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다르마의 향이다. 그것은 그 향기로 모든 불결함과 무지와 악한 행위를 몰아낸다.


붓다가 세상에 있을 때, 그는 제자들에게 그런 귀한 향에 깨어 있음의 불을 붙여서 시방(十方)의 모든 부처들에게 바치는 하나의 공양물이 되게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늘날 여래(如來)가 말한 진실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백단향이나 유향으로 만든 물질적인 향에 평범한 불을 붙이고, 오지도 않을 미래의 축복을 빌고 있다.


꽃을 뿌리는 것 역시 같은 진리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다르마를 설하는 것이나 혹은 미덕의 꽃을 뿌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게 하고 진아(眞我)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함이다. 만일 여래가 사람들로 하여금 식물을 해치면서까지 꽃을 꺾도록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계율을 지켜 나가는 사람은 하늘과 땅에 있는 무수한 생명체들 어떤 것도 상처 입히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실수로 어떤 생명을 해쳤다면 그대는 그것으로 고통 받는다. 그러나 앞날의 복을 받기위해서 살아 있는 것을 해침으로써 의도적으로 계율을 어기는 사람은 그것보다 더한 고통을 받는다. 어떻게 축복을 슬픔으로 바꾸려고 하는가?


영원한 등불은 완전한 깨어 있음을 나타낸다. 오래 전에 디팜카라(Dipamkara)라는 부처가 있었다. 혹은 그를 연등불(燃燈佛)이라고 했다. 그것이 그 이름의 뜻이었다. 한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터럭 한 올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무수한 세계를 비출 수 있다. 그러나 기름 등불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밤과 낮으로 여섯 번 수련하는 것은 여섯 가지의 감각 속에서 끊임없이 깨달음을 키우고 모든 형태의 깨어 있음을 지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섯 가지의 감각을 통제하는 일을 쉬지 않는 것이 여섯 번 수련하라는 말에 담긴 뜻이다.


탑 주위를 돌라는 말에서, 탑은 그대의 몸과 마음이다. 그대의 깨어 있음이 멈추지 않고 몸과 마음의 주위를 돌 때, 그것을 탑돌이라고 부른다.


단식을 하는 것도 같은 진리를 담고 있다. 단식을 하는 것은 그대의 몸과 마음을 잘 조절해서 산만하거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한다는 뜻이다.


또한, 한번 그대가 망상의 음식을 먹기를 멈춘 뒤에 그것을 다시 만진다면 그것은 단식을 깨뜨리는 것이다. 한번 그대가 그것을 깨뜨리고 나면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어떤 축복도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세상은 망상에 사로잡혀 이러한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몸과 마음을 모든 형태의 악에 물들게 한다. 그들은 정욕에 마음껏 탐닉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그러면서 일상의 음식 먹기를 중단하고는 그것을 단식이라고 부른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그대는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조건들에 적응해야 한다. 그 의미에는 행위도 포함되어 있고 무위의 행위도 포함되어 있다. 예배란 존경과 겸양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대의 진아를 존경하고, 망상에 사로잡힘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이다. 만약 그대가 악한 욕망을 몰아내고 선한 생각에 머무른다면 아무 것도 나타내지 않더라도 그것은 바로 예배가 된다.


이 내적인 의미를 키우지 않고 대신 외적인 표현에 몰두하는 사람은 자신을 쓸모없이 소모시키면서도 무지와 미움과 악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그럴 듯한 자세로 남을 속이고 성인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중생 앞에서 우쭐거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공덕도 쌓을 수 없을뿐더러 결코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출처 : 각인들의 수다라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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