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페르시아 - 캄비시스(Kambu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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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캄비시스에 대한 사료들
사이러스 뒤를 이은 왕은 그의 아들 캄비시스였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어식 철자법에 의한 캄부세스(Kambuses)를 영어로 옮긴 것이다. 이 단어는 다시 고대 페르시아어 캄부지야(Kambujiya)를 본 뜬 것으로, 당시에 사용되었던 엘람어와 아카드어에서는 각 언어의 음성법칙에 따라 각각 칸부지야(Kanbuziya) 혹은 캄부지야(Kambuziya)로 음역했다.
캄비시스가 BC 530년에 치리하기 시작하였지만, 그의 공식적인 즉위 연대는 BC 529년이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BC 525년 이집트를 정복하여 비옥한 초승달의 모든 국가들을 정복한 제국 건설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캄비시스는 비문을 직접 남기지 않았지만, 베히스툰 석비,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쐐기문자 토판문서들, 이집트의 상형문자 자료, 그리고 헤로도투스를 비롯한 그리스 역사가의 사료에서, 그에 관한 이집트의 상형문자 자료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 더구나, 캄비시스의 치리동안에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성경에서 그의 이름이 유일하게 언급된 곳은 성전 재건을 반대하는 기사를 실은, 다음과 같은 에스라 4장 4~5절이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경영을 방해하였으며...[스 4:4~5]
사이러스의 아들이었던 캄비시스의 이름이 나올 법도 한데, 에스라 기자는 그의 이름을 생략했다. 이 구절에 대한 병행구절인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11권 88쪽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소식을 듣고 쿠타인들이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렇게 불렀음- 몹시 화가 나 시리아 총독을 찾아가기 전에, 사이러스왕과 캄비시스왕 때처럼 한창 진행 중인 유대인들의 성전증축을 중단시키고 방해하여, 공사가 지연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요세푸스는 아닥사스다(Artaxerxes I)를 캄비시스로 대치하여,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왜냐하면 캄비시스 때 성전건축이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사이러스와 비교하여, 캄비시스는 유대인들의 성전 재건을 막는 등 독재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사이러스의 성공적인 치리와 비교 당하는, 일종의 콤파라치오 데테리마(comparatio deterrima)에 의해 평가절하 당한 것이다. 사실 그는 매우 성공적인 왕이었다. 그의 아버지 사이러스의 영토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조약을 맺어 페니키아를 정복함으로써, 이집트를 페르시아 제국에 합병시킨 장본인이었다.
B. 바빌론의 왕세자 캄비시스
캄비시스는 그의 이름을 그의 할아버지 캄비시스 1세를 본따 지었다. 그의 어머니는 파르나스페스(pharnaspes)의 딸 카산다네(Cassandane)였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역사' 2.1) 사이러스가 자기 아내 카산다네가 죽었을 때,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캄비시스의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의 아버지 사이러스가 바빌론 정복시 (BC 539) 그와 동행한 것이 틀림없다. '사이러스 실린더'(The Cyrus Cylinder)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마르둑, 위대한 주, 나의 행위를 기쁘시게 여기시고, 그를 섬기는 나 사이러스와 나의 아들 캄비시스에게 축복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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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비시스는 BC 538년 5월 24일부터, 신년 축제를 주관하도록 그의 아버지 사이러스는 명령을 했다. '나보나이더스 연대기'(The Nabonidus Chronicle)에 의하면, 캄비시스는 신년 축제 때 엘람 의복을 입고 나와, 마르둑신(Marduk)의 아들 나부(Nabu)를 위한 예식에서 제사장들을 화나게 했다.
우리는 사이러스, 만국의 왕, 캄비시스 바빌론의 왕이란 구절이 나오는 29개의 쐐기문자 토판문서가 있다. 그러나 마르둑과 나부신의 제사장들에게 미움을 산 캄비시스는, 9개월 후 구바루(Gubaru) 반란군에 의해 대치되었다.
C. 이집트 침공의 이유
이집트를 침공한 이유를, 헤로도투스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역사' 3.1에 의하면 이집트의 왕 아마시스(Amasis)가 자기 딸이 아닌, 폐위된 전 왕 아프리스(Apries : 성서의 호브라)의 딸을 캄비시스의 후궁으로 보냈기 때문에 몹시 화가 났다고 전했다. 둘째, 신뢰할 수는 없지만, 헤루도투스는 '역사' 3.2에서 이집트의 전설에 캄비시스가 아프리스 딸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셋째, '역사' 3.3에 의하면, 캄비시스의 어머니 카산다네가 이집트의 새 왕좌를 탐하여, 그녀의 아들 캄비시스가 이집트를 전복시켜 차지할 것이라고 전한다. 이집트는, 전성기 시절에는 다른 나라로부터 후궁들을 받아들였지만, 자신의 공주를 다른 나라에 보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BC 1,200년 이후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다른 나라로 공주들을 보냈다. 캄비시스가 아프리스의 딸과 혼인하려고 시도한 것은, 찬탈자인 아마시스를 폐위하고, 아프리스의 왕계를 이으려는 시도였는지 모른다.
D. 이집트 26왕조, 사이테
BC 525년 페르시아 침공시, 이집트의 왕가는 26왕가였다. 6명의 왕이 이 시대를 치리했는데, 이 시대에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BC 612), 유다의 멸망(BC 586), 그리고 바빌론의 멸망(BC 539)이 있던 시대이다.
여섯 왕들이 치리한 연대는 다음과 같다.
왕 |
치리연도 (BC) |
프삼메티쿠스 I |
664~610 |
느고 II |
610~595 |
프삼메티쿠스 II |
595~589 |
아프리스 |
589~572 |
아마시스 |
570~526 |
프삼메티쿠스 III |
526~524 |
프삼메티쿠스 1세는 아시리아 제국의 에살르헤돈(Esarhaddon BC 680-669)왕이 속신인 느고 1세(Necho I)의 아들이다. 그는 BC 664년에 왕이 되었지만, BC 656년이 되어서야 이집트 전체를 치리하였다. 왕이 된 후 그는, 그의 딸을 '테베에서 아눈신의 아내'로 즉위시키며 상이집트(the Upper Egypt)를 장악하게 되었다.
헤로도투스(2.152)에 의하면 프삼메티쿠스는 리디아 왕 가애게스(Gyges)가 보낸 아이오니아(Ionian)와 카리안(Carian) 용병들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아시리아 토판문서에 의하면, 아시리아 제국의 아수르바니팔(Assurbanipal)의 봉신이었던 가이게스가 프삼메티쿠스에로 충성을 옮긴 것이다.
프삼메티쿠스가 그리스 용병을 사용하여 앗시리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아시리아 제국은 사실 누비아(Nubia) 정벌에 관심이 있었지, 이집트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여튼 니느웨가 함락된 후 느고 2세는, BC 609년에 메대와 칼데아인의 침공을 받아 어려움에 처한 아시리아 제국을 구하러 등정하였다. 느고가 메대 앞길을 지나려고 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는 실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유다 왕 요시아는 같은 해 목숨을 잃는다.
요시아 당시에 애굽왕 바로느고가 앗수르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하수로 올라가므로 요시아왕이 나가서 방비하더니 애굽왕이 요시아를 므깃도에서 만나 본 후에 죽이니라 (왕하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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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605년에 느고는, 느부갓네살에게 유프라데 강가에 있는 도시 칼키미쉬(Carchemesh)에서 참패를 한다.
애굽을 논한 것이니 곧 유다왕 요시아의 아들 여호아김 제 사년에 유브라데 하수가 갈그미스에서 바빌론왕 느부갓네살에게 패한 애굽왕 바로 느고의 군대에 대한 말씀이라 (렘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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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삼메티쿠스 2세는 즉위 3년째 누비아를 정벌한다. 파라오 자신이 아스완(Aswan)까지 내려갔고, 그의 그리스 용병들은 누비아까지 진군했다. 이 용병들이 현재의 이집트와 수단사이에 있는 아부 심벨(Abu Simbel)에 있는 람세스 2세의 동상 다리에 "킬로이(그리스 용병 이름)가 왔었다."라는 낙서가 발견되었다.
여기에 파라오는 유대인 용병들을 아스완 맞은편의 엘레판타인(Elephatine)섬에 거주시켰다. 후에 캄비시스가 누비아로 정벌을 갔을 때, 그들을 페르시아 사람들의 종으로 고용하였고, 바로 이곳에서 많은 아람어(Aramaic)로 써진 많은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다.
누비아 정벌 후 승승장구한 프삼메티쿠스 2세는 여세를 몰아, BC 593년 팔레스타인지역 정벌에 나섰다. 불행하게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예레미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상한 갈대' 같은 이집트를 의지하여 느부갓네살의 화를 초래한다.(렘 43장)
아프리스는 BC 588년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것을 풀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패하게 되었다.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을 떠나니라 (렘 37:5)
보라 내가 유다왕 시드기야를 그 원수 곧 생명을 찾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인 것 같이 애굽왕 바로 호브라를 그 원수들 곧 그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붙이니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렘 4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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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571년 파라오 아프리스(성경의 호브라)는, 리비야에 있는 그리스 도시 키레네(Cyrene)로 진격한다. 이때 아프리스의 휘호 아래 있는 그리스 용병들의 활동을 시기하고 있던 이집트 군대가 아프리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아마시스(Amasis)가 이끄는 반란군은 드디어 북서 삼각주의 모메피스에서, 쿠데타에 성공했다.
그러나 아프리스 군대의 그리스 군인들에 대한 민족적 감정으로 시작했던 아마시스가,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는 필헬레네(Philhellene) 즉 "그리스 연인"이란 별명까지 얻었다.(헤로도투스의 '역사' 2.178). 이러한 친 그리스 정책으로 아마시스는 델피 신전이 파괴되었을 때, 신전 재건을 위하여 자금을 보냈으며(헤로도투스의 '역사' 2.180)., 그리스의 독재자 사모스(Samos) 폴리크라테스(Polycrates)와 친하게 지냈다. 심지어는 구레네의 그리스 여인 라디케(Ladice)를 아내로 맞았다.
아마시스는 그의 아들 프삼메티쿠스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 프삼메티쿠스가 치리한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 바사왕국의 캄비시스가 이집트를 침공했다. 그때 프삼메티쿠스 3세는 살려주는 대신, 그의 아들은 죽이고 그의 딸은 노예로 보냈다(헤로도투스의 '역사' 3.14).
그러나 그 후에 프삼메티쿠스 3세가 반란을 계획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를 처형했다.
(헤로도투스의 '역사' 3.15).
E. 캄비시스의 최후
522년 봄, 캄비스시는 그가 이집트를 정벌하는 동안, 바사제국 안에서 구테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사로 돌아오게 된다. 헤로도투스('역사' 3.64-66)에 의하면, 그는 시리아에 있는 하마스(Hanath) 부근에서 말을 타다 칼에서 칼집이 떨어지면서, 그 칼에 사지가 찔리게 되었다. 다리오 대왕의 베히스툰 비문에 다음처럼 그의 죽음이 묘사되고 있다.
(고대 페르시아어) uvamarshyush amariyata "그는 스스로 죽었다." (엘람어) hapi duhi.e.ma halpik "그는 스스로의 죽음으로 죽었다." (아카드어) mitutu ramanishu miti "자신의 죽음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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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에 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학자들은 이 문장이 뜻밖의 죽음이거나 객사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죽고 난 후, 그는 3명의 여자동생이자 부인 밖에는 없었다. 엘람인들의 풍습에 따라 그는 자기 여동생들을 부인으로 삼았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이자 동생은 아토사(Atossa)였다. 캄비시스가 이집트 원정 때, 그녀는 페르시아에 남았다. 그 동안 쿠테타의 주범 중의 한 명인 가우마타와 결혼했고, 그 후에는 다리오 대제와 결혼해 성경의 아닥사스다의 어머니가 되었다.
두 번째 부인은 룩산(Roxane) 혹은 메뤠(Meroe)라고 하는데, 캄비시스에 의해 살해되었다('역사' 3.32).
그의 세 번째 부인은 아르트스토네(Artystone)였다. 그 이외에도 그는 나중에 다리오왕의 심복 6명 중 한 사람이었던 파이디메(Phaidime)와도 결혼했다.
이렇게 많았던 혼인에서도 왕위를 계승할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에서는 더욱더 저마다 왕이라고 주장하는 거짓 왕들이 많아지게 되어, 본격적인 왕위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출처 http://www.theorich.com/ 한국창조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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