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페르시아 - 사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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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페르시아 - 사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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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박사는 연세대학 신대를 졸업 후 도미, 줄곧 하바드대 대학원에서 고대근동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마치고, 창조사학회 아카데미에서 “고대 창조신화와 비교연구론”과 “성경과 페르시아” 강의를 진행하였다. |
사이러스, 야훼의 기름부음 받은 종
사이러스대왕(Cyrus the great, 또는 사이러스 2세 : 주전 559~529)은 이른바 사이러스 칙령으로, 바빌로니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유다인들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켜, 유대 민족이 신앙과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구약성서에는 사이러스를 여러 구절에서 언급한다. 예를 들어 다니엘서는 사이러스가 바빌론은 점령할 때(BC 539)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다니엘 1:21; 6:29; 10:1), 사이러스 칙령은 역대기하 36:22-23, 에스라 1:1-4, 6:3-5 등에 기록되어 있다.
사이러스가 건설했던 파사르가데 왕궁. 접견실의 석벽만이 옛 영화를 말해준다.
이사야는 사이러스를 야훼의 ‘목자’ 또는 ‘메시아’로 불렀다. BC 8세기에서 7세기에 활동한 이사야 선지자가, 약 150년 후에 등장할 사이러스 대왕을 언급한 것에 대해, 18세기 말에 되더라인(D derlein)은 이사야서 40장에, 66장의 저자는 사이러스 대왕 시절에 활동한 ‘제2 이사야’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보수 유다교와 기독교 학자들은, BC 8-7세기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 전체를 기술했고, 사이러스 칙령은 이사야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요세푸스(Josephus)의 『유대고사(Antiquities)』에서는 사이러스 대왕이 이사야서를 읽고, 유다인들을 귀환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나 탈무드 시대에 유대 랍비들은, 이방인 왕 사이러스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으며, 이사야서 41장 2절의 인물은 사이러스가 아니라, 아브라함이라고 주장하였다.
사이러스는 페르시아의 임금 캠비시스(Cambyses) 1세와 메대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이러스의 외가쪽 증조할아버지는 갈대아 제국의 나보폴라살과 함께, 아시리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사이러스의 유년시절에는 페르시아 왕국이 메대 왕국의 속국이었으나, BC 550년 사이러스 대왕이 메데 임금인 자기의 외할아버지 아스티야게스를 물리치고 왕좌에 오르면서, 명실공히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사이러스 대왕은 첫 번째 세계 제국 건설자일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도 메시아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매우 흥미롭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사이러스는 동양과 서양을 정복하여 최초의 세계 제국을 건설함으로써, 동양과 서양의 첫 만남을 시도하였다.
여기에서 사이러스의 역사성을 객관적으로 고찰하여, 사이러스가 어떤 인물인가를 재조명 해본다.
먼저 고대 페르시아어, 아카드어 그리고 그리스어 사료에서 사이러스를 어떻게 평가했나 살펴보자.
BC 5세기 전후의 페르시아 영토
1. 고대 페르시아어 사료
고대 페르시아어가 쐐기문자로 쓰였지만, 아카드어나 수메리어와는 전혀 다른 알파벳 방식을 취한다. 고대 페르시아어가 사이러스왕 당시에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다리우스 대왕 시절(BC 521-486)에 만들어졌는지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월터 힌츠라는 독일학자는 아래에 소개하는 다리우스 대왕의 베히스툰 석비(The Behistun Inscription)칠십번째 단락의 해석을 통하여, 사이러스 시대에는 고대 페르시아어가 없었다고 주장한다.이 단락은 고대 페르시아어가 다리우스 대왕 때에 처음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려 준다.
아후라마즈다의 은혜로 다른 종류의 문자, 곧 아리아 문자를 만들었는데, 이 문자는 토판이나 양피가죽에는 쓰이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파사르가데(psasrgadae)에 있는 사이러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다음과 같은 3개의 짧은 비문이, 후대 다리오 2세(다리오 대왕)의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파사르가데 궁의 한 석벽에 부조된 사이러스왕의 모습. 내신들이 파라솔을 받쳐들고 있다
a. 나는 사이러스 왕, 아케메니드(고대 페르시아) 사람이다.
b. 사이러스, 위대한 왕, 캠비시스왕의 아들, 아케메니드 사람이다.
c. 사이러스 위대한 왕, 아케데니드 사람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고대 페르시아어로 쓰인 사이러스에 대한 사료는 없다.
2. 아카드어 사료
바빌로니아에서 사용한 아카드어는, 사이러스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수백 장의 쐐기문자 점토판에도 남아 있다. 페르시아 제국 초기에는 고대 페르시아어가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어서,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 널리 쓰이던 아카드어를 사용한 것이다.
메대 왕국을 물리친 뒤 고레스 대왕은 갈대아 제국을 침공했다. 『나보니두스 역대기에 따르면, BC 539년 10월 12일 사이러스 대왕의 군대는 나보니두스 왕의 군대를 오피스(Opis)에서 대파했다. 사이러스의 장군 고르비야스(Gorbyas)가 바빌론을 미리 침공하고, 두 주 뒤 사이러스 대왕의 바빌론 사람들의 환심을 얻는 일이었다. 그는 나보니두스 임금이 바빌론의 마르둑(Marduk)신을 저버리고 달의 신인 신(Sin)을 떠받든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제사장들과 시민들을 위하여, 마르둑신과 그의 아들 나부(Nabu)신을 모실 에상길라(Esangila)를 바빌론에, 그리고 에지다(Ezida)를 보르시파에 재건한다.
우룩(에렉)지방에서 발견된 한 점토판 문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이러스, 에상길라와 에지다를 재건한 사람, 캠비시스의 아들 위대한 왕, 그가 바로 나다
호즈무즈드 라삼(Hormuzed Rassam)이 1879년 바빌론의 말둑 신전에서 발견한 ‘사이러스 실린더'(Cyrus Cylinder)에 따르면, 사이러스는 바빌론성을 침공할 때,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순조롭게 입성했다고 전한다.
사이러스 실린더
현재 대영박물관과 미 예일 대박물관에 소장된 이 실린더는 사이러스 시대에 아카드어가 궁중문서에 사용되었고, 바빌론 사람들에게 환영받았음을 입증해 준다.
사이러스 대왕을 찬양하기 위해 쓰인 〔나보니두스의 버스 어카운트(Verse Account of Nabonidus)〕에서도 나보니두스를 마르둑신을 모시는 제사들의 적으로, 사이러스 대왕을 해방자로 묘사하고 있다.
베히스툰 석비에 새겨진 고대 페르시아어 설형문자
3. 그리스어 사료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투스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과 고레스왕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헤로도투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잠시 종식시킨 ‘칼리아스 평화조약(The Peace of Callias BC 499년) 이후 페르시아 제국, 특히 이집트와 바빌론을 여행한 뒤 『역사서』를 썼다. 그러나 헤로도투스는 직접 페르시아를 여행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몇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20세기 초까지는 헤로도투스의 『역사서』가 페르시아 제국사의 기본서가 되어 왔다. 그러나 고고학 발굴과 고대 페르시아어의 이해로, 이 책은 재평가되었다. 그는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만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 관하여 기술하였고, 그의 자료가 모두 사실이 아니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그는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를 모으는데 천재적인 역량을 발휘하였다.
때로는 비난의 여지가 있는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전하기도 한다. 특별히 사이러스의 출생과 유년시절을 전설적인 요소로 각색하였다. 그러나 『역사서』의 후반부에 나오는 전쟁, 도망 또는 아스티야게스(astyages)의 항복 따위의 기사는 아카드어 사료의 내용과 일치한다.
에스킬루스(Aeschyus)의 연극 「페르시아 사람들」은 BC 472년에 쓰인 것인데, 그는 살라미스에서 직접 전쟁에 참가한 것을 바탕으로 사이러스를 평가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제노폰은 만 명의 용사와 함께 아닥사스다 2세를 제거하고 친그리스파였던 그의 동생 사이러스를 등극시키려고 페르시아 제국을 직접 방문하였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사이러스 유년기(Cyropaedia)』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그가 사이러스 3세에 대한 존경을 고레스 대왕에 반영하여, 적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오류를 남기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아닥사스다 2세의 그리스 주치의던 크데시아스(Ctesias)는 사이러스를 사생아의 아들로 각색하였다. 역사적으로 그의 자료는 거의 쓸모가 없다.
사이러스 2세는 캠비시스 1세와 메대의 왕 아스티야게스(Astyages)의 딸 만다네(Mandane)사이에서 태어났다. 사이러스의 이런 가족 배경은 헤로도투스의 '역사서' 1권 91장에 나오는 ‘델픽 오러클’(델피신탁 Delphic Oracle)에 나타나 있다. 이 ‘신탁’에서 다음과 같이, ‘나귀’가 메대왕이 될 것이라고 리디아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 나귀는 사실 사이러스이다. 그의 부모는 같은 민족이 아니고 어머니 쪽이 더 귀족이며, 그의 아버지는 보잘것 없는 출신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메대 사람의 왕 아스티야게스의 딸이기 때문이다.
헤로도투스는 네 편의 사이러스의 유년 기사('역사서' 1.107-30)를 전하고 있는데, 그는 사이러스의 등극을 아카드(Akkad)의 사르곤(Sargon)대제와 로마의 창시자 로물루스(Romulus)와 비교하였다.
사이러스의 유년기는 제노폰이 쓴 '사이러스 유년기(Cyropaedia)'란 작품에도 나온다. 사이러스가 그의 외할아버지 아스티야게스의 궁궐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대신 역할을 했고 (Cyropaedia 1.3.1), 고레스의 어머니가 사이러스에게 앞으로 메대 땅에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유능한 말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였다(Cyropaedia 1.3.15) 한다.
1. 메대정벌
우리는 시판(Sippar)에서 발견된 ‘드림 텍스트 (Dream Text)'에서, 사이러스가 언제부터 메대인들 정복에 나섰는지 알 수 있다. 이 토판 문서에 의하면, 신바빌로니아의 왕 나보니두스는 사이러스가 하란을 메대의 우만만다(Ummanmanda)로부터 해방시킬 자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확신하고 있다.
나의 지속적인 왕정의 시작에, 신들의 환상을 꿈에 보여주었다. 말둑 신이 내게 말했다. "네가 말한 우만만다와 그의 땅과 그의 편에 있는 나라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너의 치리가 3년째 되던 해에 안샨(Anshan)의 왕 사이러스가 나와서, 우만만다의 군대를 쳐부수리라. 그가 우만만다의 왕 아스티야게스를 잡아, 자기 땅으로 끌고 가리라."
이 토판 문서는 그가 치리하기 시작한 BC 556년에 본 환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꿈은 사이러스가 그의 메대인 외할아버지 야스티아게스에 대항하여, 제 3년째 되는 해(BC 553년)에 반란을 일으키리라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자료인 나보니두스 연대기(Nabonidus Chronicle)에서는, 사이러스가 메대인을 죽의 제 6년째 (BC 550) 정복했다고 전한다.
이와같이 사이러스는 자기 외할아버지를 살해하고 메대를 정복함으로써, 바사제국의 기초를 놓았다. 바사인들과 메대인들의 마지막 전투는, 고레스가 자기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파사르가데(Pasargadae)에서였다고 스트라보(Strabo 15.3.8)는 전하고 있다.
사이러스 대왕의 파사르가데에 있는 아파다나 궁(집견실)의 유적.
사이러스가 세운 세계제국은 동·서양 문명교류의 시작이었다.
2. 리디아 정벌
시메리아인 (Cimmerian)들이 아나톨리아의 프리지안(Phrygian)의 수도 고르다움(Gordium)을 BC 676년에 멸망시킨 후부터, 아나톨리아의 맹주는 리디아로 바뀌었다.
BC 560년부터 전설적인 크로에수스(Croesus)가 리디아를 치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강을 건너 위대한 제국을 멸망시킨다”는 ‘델피 신탁’을 받고, 크로에수스는 바사제국과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BC 547년 리디아-바사 전쟁이 갑바도기아의 프테디아(Pteria)에서 시작되었다. (헤로도투스 1.76).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전쟁이 11월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혹독한 겨울 날씨로 양측이 모두 후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사이러스는 후퇴하는 척하다가 크로에수스를 협공하여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를 전소시켰다. 사이러스와 퓨전계약을 맺었던 밀레투스(Miletus)를 제외하고는, 이오니아인(Ionian)과 아에올리아인(Aeolian)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 도시들이 거의 페허가 되었다.
사이러스의 이 리디아 정벌은 후에 있을 알렉산더가 일으켰던 바사-그리스 전쟁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3. 동편정벌
사이러스는 BC 546년부터 540년까지 동편의 나라들 파르티아, 드랑기아나, 아리아, 코라스미아, 박트리아, 소그디아나, 간다라, 스키타이, 사타귀리아, 아라크시아, 마카를 정벌하였다.
4. 바벨론 정벌
바벨론의 제사장들은 나보니두스 왕이 말둑 신을 버리고 신(Sin)신을 섬기기 위해서 자기 아들 벨샤살(Belshazzar)에게 바벨론을 탁정하고, 아라비아에 있는 테이마(Teima)로 10년동안 칩거생활을 했다.
주전 543년 바벨론으로 돌아와 사이러스의 위협을 물리치려고 했지만, 제사장들과 바벨론 백성들의 불만으로 헛수고였다. 더구나 자그로스에 있는 구티움(Gutium)의 통치자인 구바루(Gubaru)가 나보니두스를 배반하여 사이러스에게로 투항하였다. 사이러스는 오피스(Opis)의 남쪽에서 티그리스강을 건너 바벨론으로 진격했다. 바벨론시를 가로지르고 있는 유프라테스강을 통해 바벨론 성을 침입하였다.
다니엘서 5장에 의하면, 벨샤살은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져온 거룩한 기명으로 향연을 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나보니두스 역대기』(Nabonidus Chronicle)는 구바루와 그의 군대가 전쟁을 하지 않고 바벨론성에 침입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후에 사이러스가 바벨론성에 들어갔을 때,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그를 ‘해방자’로 환영했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벨샤살은 처형되고, 나보니두스는 카르마니아(Carmania)로 귀양을 보냈다.
사이러스는 이전의 정복국가들과 달리, 피정복국의 신들을 존중하는 유화정치를 폈다. 그가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그의 종교 유화정치의 한 부분이었다. 성경에 의하면, 야훼께서 사이러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고 전한다. 에스라 6장 8절에 의하면, 사이러스는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건축을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 한다. 학개와 스가랴서에서는 사이러스의 재정적인 도움은 말하지 않지만, 이런 정책은 사이러스의 공식 정책이었음이 분명하다.
사이러스가 70세(BC 530년)가 되던 해, 그는 아랄해(Aral Sea)에 있는 마싸게테(Massagetae)를 침공한다. 그래서 거기에 야하르테스강 옆에 사이로폴리스(Cyropolis : 현재명 구로카쓰)를 세운다. 그러나 BC 530년 7월에 사이러스는 그곳에서 전사한다.
그래서 그의 시신이 다시 바사왕국의 파사르가데로 옮겨져 장사된다. 아리안(Arrian 6.29)에 의하면,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진 무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인간! 나는 캄비시스의 아들 사이러스, 바사제국을 세웠고 아시아의 주인이다. 나와 내 비문에 원한을 품지 말아라.
고대 페르시아의 민족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신전터. 페르시아는 자신의 종교를 속국민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각 민족 고유의 종교를 존중해 주는 유화정책을 폈다
사이러스 대왕 자신이 직접 만들었던 그의 계단식 무덤구조가 이채롭다
최초의 제국 건설자, 아시아의 맹주, 이사야가 ‘메시아’와 ‘목자’라고 불렀던 사이러스는 화려한 궁궐이나 무덤을 남기지 않았다. 파사르가데에 있는 그의 궁궐과 무덤은, 후대 바사왕국의 다른 왕들의 규모와 비교하면 아주 작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향했던 다언어, 다문화주의 때문이었다. 동서양의 많은 정복국가들을 속국으로 만들었기에, 이제 그의 제국에는 바사와 메대 사람들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들을 제국의 한 부분으로 만들기 위해, 정복한 나라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실제로 그 문화를 바사 제국 건설의 기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국제 공용어로는 아람어를 사용하였고, 당시 비문은 전통적인 언어였던 엘람어나 아카드어를 사용했다.
건축 양식에서도 이런 문화 융합과 새로운 문화 창조의 성숙도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왕국이나 무덤의 양식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소아시아, 그리스 문명의 단순한 융합체 같지만, 실은 다문화를 포용해서 새롭게 변신을 했던, 진정한 바사제국의 문화가 표현된 것이다.
다른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사이러스 대왕의 청사진이 아니었던가 싶다.
출처 http://www.theorich.com/ 한국창조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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