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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이냐 이슬람이냐' vs '칼이냐 기독교냐'

지평선의순례자 2008. 7. 21. 02:53

'칼이냐 이슬람이냐' vs '칼이냐 기독교냐'

 

 

 

출처 : 김동문의 중동 읽기· 세상 읽기· 교회읽기 | 김동문

원문 : http://blog.naver.com/yahiyakim/100022241011

 

관공서와 회사들은 단축 근무에 들어가고 학생들의 수업 시간도 짧아진다. 식당도 늦게 문을 열어 밤늦게 마감한다. 그러나 수행과 예배, 이웃을 돌아보라는 단식 기간의 의미는 퇴색된지 오래인 듯하다. 평소보다 눈에 띄게 사소한 일로 쉽게 다투고 싸우는 이들이 많다. 금식하고 아껴 둔 것으로 이웃을 구제하고 선행을 격려한다는 의미도 퇴색해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소비한다. 상대적인 빈곤감에 힘이 빠지는 이들이 더 많아지는 기간이기도 하다. 여성들은 하루 종일 맛난 이프따르(그야말로 Break Fast로 일몰 직후에 먹는 식사)는 물론이고 저녁 시간에 먹을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정말 진지하게 예배에 집중하고 신에게 나아가고자 애쓰는 무슬림들이 있는 반면, 대다수 무슬림들은 전혀 라마단 같지 않게 보내고 있다. 이사야서를 인용하지 않아도 진정한 금식의 의미를 새삼 곱씹어 보게 된다.

 

‘칼이냐 코란이냐’는 서구 기독교의 해설일 뿐

 

아름다운 신앙은 대가를 기대하거나 대가를 담보로 하나님과 거래하지 않는다. 라마단 기간을 보내면서 나는 자유케 하는 진리와 신앙을 다시 생각하고 있다. 개인의 자발적인 결단과 헌신으로 이뤄지지 않는 종교적 행위가 얼마나 비인격적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 이 정도만 언급해도 이내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과 정죄를 할는지 모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슬람만 이런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로 공인된 시대는 물론이고 중세에도 이런 분위기를 풍겼을 것이다. 마호메트의 등장 이전 당시 중근동과 유럽 세계는 비슷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4세기 초 기독교가 공인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은 ‘칼이냐 기독교냐’의 양자택일을 은근히 강요하는 체제가 되었다. 로마 제국 아래서 다른 종교가 금지된 4세기 후반 이후 유럽인들은 날 때부터 기독교인이 되었다. 기독교인의 신분증은 출세를 위한 기본 요건이었다. ‘칼이냐 황제냐’가 이제는 ‘칼이냐 기독교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내분을 거쳐 동서 로마 제국으로 분열되고, 동로마 제국은 비잔틴 제국으로 탈바꿈하면서 이내 제국(帝國)의 본성을 드러내 중동의 여타 기독교 제국(諸國)들을 억압하는 식민 종주국이 되어버린다.

 

이때 로마 제국과의 긴 전쟁을 치렀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페르시아의 비잔틴 제국이 로마 제국의 적대국으로 등장한다. 이후 양측 간의 물러서지 않는 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마호메트가 아라비아에 등장한다. 마호메트와 기독교와의 만남, 즉 마호메트와 지근한 거리에 있었던 몇몇 기독교인과의 만남을 통해 마호메트는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갖게 되었다. 마호메트 출현 당시의 이런 배경은 그가 기독교 제국과 기독교인에 대한 거부감의 설명이 된다. 이것은 오늘날 적지 않은 무슬림들이 갖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시각을 규명해 준다.

 

마호메트의 출현으로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이 만나게 된다. 이 만남에서 이슬람은 빠르고 강력하게 확산되었다. 물론 이슬람의 확산 이유에 대한 몇 가지 이론들이 있다. 오래된 서구 기독교의 해석은 ‘칼이냐 코란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면서 이슬람이 확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해석으로 이슬람의 확산을 설명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다. 일정 부분 정복 과정을 통해 이슬람화 된 것은 사실이나 또 다른 중요한 요인들이 있었다.

 

채찍과 당근으로 이슬람화

 

“이슬람으로 돌아오라.”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 이슬람이 유입되면서 새로운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이슬람 신앙과 아랍 제국의 확장은 쉽게 이뤄지는 듯했다. “이슬람 신앙의 우월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렇게 너무 쉽게 이슬람 교리의 우월성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슬람의 확장에는 외적인 요소들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의 확장은 이슬람 학자들의 주장대로 칼이냐 코란이냐 하는 식의 무력을 통해서 이뤄진 측면은 적다. 칼 대신 ‘채찍과 당근’이 동원되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비협조와 차별이 채찍이라면, 당근은 기독교인들의 예배할 권리를 빼앗지 않은 것이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강제로 ‘칼이냐 코란이냐’, ‘칼이냐 이슬람이냐’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달랐다. 비무슬림들은 고율의 인두세(지즈야로 부르는)와 토지세를 납부해야 했다. 일종의 종교세였고 차별 과세였다. 인두세를 안 내려면 무슬림이 되어야 했다. “비잔틴 제국의 수탈은 엄청났다. 그것에 비하면 인두세는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슬람은 기독교와 비슷한 신앙 코드로 보여서 이슬람 신앙을 갖는 데 부담이 없었다.”

 

비잔틴 제국 아래 아랍 국가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의 종교적 영향력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중동의 기독교인들은 마호메트의 이슬람 세력을 기독교의 한 분파로 이해하기도 했다. 마호메트도 새로운 종교를 말하지 않았다. 이슬람의 중동 확산 과정에 동방교회 전통의 단성론자들과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들은 큰 부담 없이 이슬람을 수용할 수 있었다. 특별히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세력의 유입을 통해 이란의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략과 박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것은 이슬람의 권력자들과 일종의 협정을 맺은 결과로 보인다.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들은 무슬림이 아니어서 인두세를 내기는 했지만, 개종을 하지 않고도 고위 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 사상과 철학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등 이슬람 세계에 그리스 문명을 소개하는 통로가 되었다. 고위 관직은 물론이고 의사, 철학자, 점성술사, 은행가와 상인으로서 이른바 새로운 이슬람 세계에서 칙사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 결과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는 이슬람의 압바스 제국의 통치 지역과 페르시아 제국 내 중심 교회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이슬람의 유입은 오히려 네스토리우스 교회의 동방 지역 확산에 큰 발판이 되어, 터키와 훈족, 나아가 중앙아시아와 인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다른 측면으로는 아랍 기독교인들에게 이슬람의 유입은 비잔틴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정치적인 돌파구였다. 아랍 민중들(그들이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에게 이슬람 세력은 압제자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해방자였다. 그러나 제약은 다른 면에서 일어났다. 날 때부터 기독교인이 아니면 교회 출입이 금지되었다. 교회를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교회당의 신축은 허용되지 않았다. 공공장소에서 예배할 수 없었고, 심지어 타종을 통해 예배 활동을 할 수도 없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기독교인들에게 상징 마크를 달게 하였고, 특별한 옷을 입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군 입대도 허용되지 않았다. 2류 국민으로 전락되어 온갖 차별을 받아야 했다. 명목상 종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한 것일 뿐 기독교인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억압한 것이다.

 

무슬림이 되었다고 모든 것이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로 발걸음을 옮기던 1990년 가을, 필자에게는 아랍 무슬림들은 흰색을 좋아한다는 선입관이 있었다. 그런데 카이로에 도착해 보니 흰 옷을 입은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조금 탁해 보이는 이집트 농부 복장으로 알려진 ‘갈라비야’를 입은 이집트 무슬림들이 전부였다. “아니 무슬림들인데 왜 남자들의 복장이 이렇게 다른가요? 왜 이집트 남자 무슬림들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에서처럼 흰 옷을 입지 않나요? 무슬림들은 흰 옷을 입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거야 이집트인들은 성골 아랍인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집트 무슬림들은 아라비아 반도의 무슬림들이 입는 하얀색의 통옷을 입지 못한다. 아랍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랍인은 좁은 의미에서 아라비아 반도의 주민들을 일컫는 것이었고, 지금도 그런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

 

무슬림이라고 다 같은 무슬림은 아니다?

 

이슬람 확장 초기에는 오늘날보다 더 엄격한 차별이 있었다. 아랍계와 비아랍계 무슬림 사이에 엄청난 신분 차별이 있었던 것이다. 비아랍계는 마왈리로 불리는 계층으로, 아랍 상류층을 주인으로 모시던 가솔들이었다. 이들 출신지는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이집트, 베르베르 등 비아랍계로서 주인들을 따라 무슬림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랍계이면서도 기독교나 유대교에서 이슬람에 입교한 사람들도 마왈리 취급을 받았다. 특히 이라크나 바레인 등의 아랍계 하층민은 무슬림이 되었어도 차별을 받아야 했다. 무슬림이 되었다고 해도 하인 계층의 비아랍계 무슬림들이 하늘같은 상전이던 아랍계 무슬림들이 누리던 동일한 지위, 평등을 누릴 수는 없었다.

 

아랍계 무슬림들은 무슬림의 의무 사항인 소득의 1/40 자카트를 내는 것 외에는 별다른 경제적 의무가 없었다. 병영 도시(한양이나 예루살렘 같은 도성을 말한다) 거주 자격이 부여되었고, 연금이나 수당을 지급받았다.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고 토지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이슬람 세력이 확보한 새로운 땅들을 대여받고 1/10 정도의 토지세만 내면 되었다. 나중에는 불하받은 토지들이 사유화되었다. 이들 아랍계는 막대한 경제권을 향유하고 있었다. 종교적 특권층으로서 권력과 부와 종교적 의를 다 보장받은 셈이었다.

 

이슬람 초기에 있었던 갈등의 가장 큰 요인은 무슬림 공동체에서 비롯됐다. 기독교 전통에도 이와 유사한 기록이 나타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공동체가 수적, 질적으로 성장하면서 유대계가 아닌 사람들, 이른바 헬라파 기독교인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유대계와 헬라계 사이의 갈등이 매우 심했다고 사도행전은 적고 있다. 초기 기독교 전통은 기독교 공동체 내의 계급과 계층 간의 차이로 인한 차별을 반대했다. 이슬람 초기 공동체도 동일했다. “아랍계면 다냐? 언제 마호메트 선지자가 차별을 말했냐?” 이런 볼멘소리들이 터져 나왔지만, ‘아니꼬우면 아랍인으로 태어나면 될 것 아닌가’ 하는 식의 빈정거림만 돌아올 뿐이었다. 아랍계 무슬림들의 더 많은 특권를 위해 이슬람 지배 계급은 비아랍인이 무슬림이 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말리는 형편이었다.

 

전쟁에 나가서도 아랍계는 말을 타고 비아랍계는 보병이 되어야 했다. 전선 배치도 비아랍계는 아프리카 서북부처럼 열악한 곳에 집중 투입되었다. 차별에 반발한 비아랍계의 분노는 내전으로까지 확산되기도 했다. “움마 좋아하네! 도대체 어느 세상에 이런 차별이 있을쏘냐? 선지자가 허락한 동등권을 보장하라!” 비아랍계가 낸 세금으로 소수의 아랍계 지배 계급이 배불리 살 수 있었다. 불만이 폭발하여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랍계 무슬림들은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다. 차별이 없어지는 것은 지배 계급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인데, 그것은 초기 이슬람 지배 계급의 와해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 많은 경제적,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향유하기 위해 아랍계 상류층은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그 안간힘은 종교의 옷을 입으면서 더욱 비인간화로 치달았다. 이런 상황은 압둘 말리크(685~705)가 통치하기까지 계속되었다. 초기에 이슬람에 합류한 아랍계 상류층의 종교는 바뀌었지만, 그들의 기득권은 이어졌다. 이슬람 공동체 내의 선민의식이 공동체의 하나 됨을 막는 가장 강력한 걸림돌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슬람의 확장이 이슬람의 공동체 정신 ‘움마’의 영향으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다.

 

고대 역사가 말해 주듯이 새로운 제국이나 국가가 출연하면 필연적으로 국교와 통치 구조를 정당화하는 명분과 이론이 필요하다. 이슬람 세력의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의 약진은 종교 자체의 변화를 강하게 몰고 온 것은 아니었다. 통치 권력의 구조를 변화시켰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마호메트 출현 이후 거의 2세기 동안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인구 비율은 10%도 못 미쳤다는 점에서도 종교 확장 전쟁은 아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유럽과 페르시아 등에 지배를 받고 있던 아랍 민족들이 아랍 제국을 건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랍 역사가들이 초기 이슬람 200년간의 역사를 이슬람 제국이 아닌 아랍 제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랍은 알라가 친히 선택한 선민 집단이었고, 이슬람은 아랍 민족이 알라와 함께 누리는 혜택이고 특권이었다. 당시 지배자들은 아랍인에 의한 아랍인의 제국 건설과 확장이 의식 깊숙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이 이슬람 제국이라는 종교성으로 변화되면서 종교 확장 전쟁의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은 후대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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