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정착된 메카라는 신흥 도시가 생겨나 쿠라이쉬(Quraish) 부족이 패권을 잡고 커가고 있었다. 이 메카의 주요 산업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남으로는 예멘을 잇는 중개무역을 주로 하고 있었다. 비잔틴 제국까지 포함한 상권은 624년에는 낙타가 1000마리나 동원됐을 정도의 대상무역을 이룩하고 있었다. 또한 중개무역을 하면서 많은 선진문화를 호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윤리도덕과 의식구조 사회 시스템은 유목민적 요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경제활동으로 인해 사회는 변해가고 있었지만 체제는 변하지 못하는 기형적인 사회였다. 그러면서 실질적인 리더쉽은 돈 많은 상인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서기 600년이 넘어가면서 이런 긴장감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많은 부족들이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이들 씨족간의 갈등보다도 경제적인 갈등이 더 커져만 갔다. 특히 부유한 대상들에 대한 군소상인과 근로자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경제적 변화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사회질서에 대해 더 큰 불만이 쌓여갔고, 새로운 질서체제에 대한 기대가 커지기 시작했다.
주변 국가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 시기에 두개의 강국이 군림하고 있었다. 그 하나가 비잔틴(일명 동로마 제국 4세기말-1453)제국이고 나머지는 사산조 페르시아(AD 226-651)이다. 이 두 제국은 아라비아 유목민의 침입에 맞서서 각각의 완충국가를 형성해 놓고 있었다. 비잔틴 제국은 아랍계의 갓산(Ghassans)부족을 내세워 국가를 건설했다. 하지만 이 나라의 국교는 단성론[1]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였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이 교리를 이단으로 선포했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어갔다. 이 교리 싸움으로 당시 중근동의 많은 나라들과 교회들이 힘을 잃어갔다. 이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고, 후에 이슬람의 침입에 용이한 이유를 제공하게 되었다.
또한 사산조 페르시아도 라흐미(Lakhmis) 부족을 앞세워 히라(Hira)에 위성국가를 만들어 완충지대 역할을 감당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종교적 문제로 마찰을 빚었다. 히라국 역시 이단으로 정죄받고 있는 많은 네스토리안교도들이 피난을 와서 네스토리안교를 국교로 섬기고 있었다. 하지만 사산조 페스시아의 국교는 조로아스터교였고, 역시 종교적 갈등으로 관계가 악화되면서 후에 쉽게 점령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의 전쟁으로 인한 재정 문제들을 이 위성국가인 두 나라에서 채우려는 잘못된 정책으로 단성론자들과 네스토리안교도들에게 인심을 잃었다. 또한 두 거대 제국의 오랜 갈등으로 이들은 국가를 지킬 힘까지 소진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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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교리로 이집트 시리아 등에 널리 퍼져있으며, 오늘날의 콥트(Copt)교도 이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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