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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의 성전 매춘

지평선의순례자 2010. 3. 6. 15:37
고대 근동의 성전 매춘


고대 근동 종교 문화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땅과 사람의 풍요를 증진시키기 위한 제의다.  영어로는 fertility cult라고 흔히 부르는 이 제의 중, 많은 논란이 된 것 중의 하나가 성전 매춘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성전 매춘(Cultic Prostitution)은 왕권, 정의, 진리와 더불어 신이 집적 제정한 사회 제도 중 하나였다. 

이 풍요 제의의 중심에 선 신이 이난나(Inanna)이다. 아시리아인들은 이쉬타르(Ishtar)라고 불렀다. 매년 새 해가 되면 두무지(Dumuzi)를 상징하는 왕과 이난나를 상징하는 성전 "매춘녀" 사이의 거룩한 결혼식이 이루어진다. 흔히 라틴어 hieros gamos라고 명칭되는 이것은 풍요를 관장하는 신들 사이의 결합을 유도해는 일종의 마술행위였던 것 같다.

앞서 성전 "매춘녀"라고 불렀지만, 실제 성전에서 그런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은 여자 뿐 아니라 남자도 있었다. 그리고 "매춘녀"라는 뉘앙스가 가지는 부정적인 뉘앙스는 당시 그 사람들의 사회적 정통성 혹은 중요성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 심지어 왕들 조차도 자신의 공주들을 성전의 "매춘녀"로 만드는 것을 자랑스럽고 성스러운 일로 간주했을 정도로 이들은 오늘날의 직업여성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이 "매춘녀"를 지칭하는 수메르어 NU.GIG과 아카드어 qadishtum은 본래 "바쳐진 (그래서 거룩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외에 성전 매춘녀를 지칭하는 말로 harimtum, naditum등의 말이 있는데 이들의 구체적 기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확실한 것은 이들 모두가 돈 받고 몸을 파는 그런 직업인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원하면 결혼도 할 수 있었고, 많은 이들이 중세 아시리아 시대에서는 산파로 활동했던 것을 볼 때, 현대의 편견을 가지고 이들을 평가하는 것은 고대 문화를 매우 오해하는 일인 것 같다.

고대 이스라엘인들도 이런 풍요 제의에 영향을 받았다. 히브리어 카데솨와 케데스는 각각 "성전 매춘"하는 여자와 남자를 지칭하는 말로, 킹제임스역에서는 보다 노골적으로 harlot, whore, sodomite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다말의 시아버지는 다말을 카데솨로 인식하고 "그녀에게로 들어갔다." 후에 본문에서 카데솨는 조나(zonah)로 대치되어 그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해준다. 열왕기상 14:23-24절에서 "개"는 성전 남창을 의미하는 것 같다.  후에 아사 때에나, 여호사밧, 그리고 요시아 왕 때에도 풍요 제의를 경계하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이런 풍요제의는 페니키아인에 의해 그리스 세계로 전이된 듯하다. 아프로디테 성전에서는 수천명의 성전 창기들이 있었고, 아프로디테를 묘사하는 조각들은 이쉬타르의 조각에 직접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 "사랑의 여신"으로 알려진 아프로디테는 창기들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고린도에 있는 아프로디테 성전에는 수많은 성전 창기들이 있었으며 그리스 역사가 스트라보에 따르면 고린도의 도시적 번영은 이 창기들의 수에 연유한다고 주장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6에서 경고했던 것도 일반 창녀에 대한 것 뿐 아니라 성전에서 일하는 창기들에 대한 것이었다.

고대 근동의 성전 매춘은 풍요 제의의 일부로 매우 긍정적인 사회적 기여를 한 것 같다. 소위 "매춘"에 종사하는 이들도 경멸이 아닌 존경의 대상이었고, 실제로 이들이 '돈을 받고 낮선 사람'과 잠을 자는 직업인이었다는 증거도 희박하다. 그러나 후대에 이런 관습은 남용되어 돈을 가지고 성을 매매하는 일이 성전에서도 일어난 것은 부정할 수 었다.

모든 여자의 첫 남자

마지막으로 성전 매춘과 관련해 재미있는 관습 하나를 소개한다. ius primae noctis라고 불리는 이 관습은 처녀들이 시집가기 전에 낯선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 처녀성을 잃는 관습이다. 길가메쉬의 한 구절을 보면 길가메쉬를 모든 여자의 첫 남자라고 묘사한 대목이 나오는데 해석가들은 고대에 왕이 성전에 찾아오는 처녀들에게 그런 제의를 행하는 주체였던 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한 나라의 왕이 그 나라 모든 여성들과 잠자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이 관습도 하나의 상징적 제의 행위였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