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를 구한 왕후 - 에스더
유다를 구한 왕후 - 에스더
Benouville - Esther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왕이 페르시아를 다스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겨울 궁전이 있는 수산에 모르드개라는 유다인이 있었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유린한 직후 예루살렘 최후의 왕 시드기야와 함께 메소포타미아로 끌려온 포로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과 페르시아의 관대한 정책에 힘입어 부와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페르시아 유다인 사회의 '성공자'로 꼽혀 마침내 왕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상의 신 야훼를 독실하게 믿어 몸과 마음을 올바르게 지키며 항상 바른 일만 하려고 노력하는 착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모르드개는 꿈을 꾸었다.
온 땅이 부르짖으며 떨고 있다. 천둥 번개에 땅이 흔들리고 있다. 부르짖는 소리가 온 땅에 가득 찬 가운데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바로 그 때 용 두 마리가 나타났다. 전쟁의 표징을 차고 있는 큰 용이었다. 두 마리를 으르렁거리면서 회오리와 함께 나아왔다. 바른 민족이 멸망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어둠이 번지는 가운데 고뇌와 괴로움이 시작되었다. 바른 민족은 재앙과 암흑 가운데 몸부림치면서 천지의 하나님에게 부르짖었다.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았을 때. 보라! 땅 위의 작은 하천이 순식간에 큰 강으로 변했다. 도도하게 흐르는 물살로 강폭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해가 솟았다. 빛이 나타난 것이다. 흑암이 빛에 빨려들었고 용은 자취를 감추었다.
꿈에서 깬 모르드개는 침상에서 일어나 앉아 오랫동안 꿈이 암시한 뜻을 새겨보느라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모르드개는 궁에서 낮잠 시간을 맞았다. 왕의 신임이 두터운 두 환관이 정적에 싸인 궁의 기둥에 기대어 수군거리는 것이 모르드개의 눈에 띄었다. 태도가 심상치 않았다. 모르드개는 눈치채이지 않게 뒤로 다가가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놀랍게도 두 환관은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르드개는 깜짝 놀라 바로 왕에게 알렸다. 끌려온 두 환관은 모르드개의 완벽한 증언 앞에 꼼짝 못하고 처형되었다. 궁중 사관은 모르드개가 왕을 구했다고 그날 일을 일지에 기록하고 있다. 그 공로로 모르드개의 직계가 올라감과 동시에 왕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전혀 다른 종교적 뿌리와 생활양식을 가진 소수민족은 어디서 살든 반드시 반감과 대립한다고 예로부터 전해오고 있다. 특히 종교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소수민족이 타국에서 살 경우, 정교일치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 타민족과 적응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식량은 물론 먹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계율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그 지역 풍습과 융화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그처럼 두드러진 소수민족이 장사와 이식이라는 타고난 재능을 발휘한다면 현지민의 반감과 대립감정은 곧바로 박해와 이어지게 마련이다.
나라를 잃고 타국의 여러 도시에서 기식자가 된 '유랑하는 유다인'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다시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맞닥뜨린 운명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페르시아 왕은 관용을 베풀어 그들의 종교적 계율은 물론, 그에 따른 생활양식 일체를 용인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전체가 왕의 관용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보라, 유다인들은 그 수가 날로,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언젠가는 우리 페르시아를 위협할 것이 분명하다."
"보라, 유다 사람들을. 페르시아 신을 신으로 여기지 않고 페르시아 풍습을 풍습으로 보지 않으면서도 궁까지 진출하다니. 그들은 우리의 눈엣가시가 아닌가."
"좌시해서는 안된다. 함부로 날뛰게 해서는 안된다!"
그 옛날 이집트의 바로가 걱정한, 그리고 역사의 갈피가 몇 장이나 넘어간 중세와 근현대에 와서도 많은 사람들이 걱정한 것과 똑같은 우려가 적어도 페르시아 왕국 일부 계층의 가슴 속에는 이미 자리잡았던 것이다.
국왕의 암살계획이 모르드개의 사전 탐지와 제보로 미수에 그친 뒤, 하만이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하만은 페르시아 왕국, 인도 접경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왕국의 곳곳에 흩어져 그들만의 특수한 계율을 바탕으로 하여 살고 있는 유다 사람들이 장래 왕국의 암이 될 것이라고 보는 세력의 우두머리였다.
권세욕이 강한 하만은 재상이 되자마자 왕궁 안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왕을 대할 때와 똑같은 법도로 자신을 대할 것을 명했다. 하만에 대한 두려움으로, 혹은 환심을 사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명령대로 했다. 그러나 단 한사람 모르드개만은 예외였다. 그의 민족적 자부심과 자긍심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아하수에로 왕에게는 와스디라는 왕비가 있었다. 아름다웠으나 자아가 강한 여인이었다
아하수에로 왕 3년. 즉위 기념일을 맞아 왕은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127개 지역의 총독과 군의 우두머리, 그리고 귀족, 장군을 모두 수산의 겨울궁으로 불러 180일에 걸친 큰 잔치를 베풀었다. 새로 페르시아로 편입된 지역의 지방장관들에게 왕국의 위세와 국왕 자신의 부를 과시함으로써 충성심과 복종심을 제고시키자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궁전 연회장의 흰 대리석 원기둥과 원기둥 사이에는 지중해의 자폐에서 짜낸 윤택이 나는 염료로 물들여 은고리로 엮은 보라색 모시와 비단 휘장을 쳐 멋을 부렸다. 휘장의 줄은 진홍의 모시였다.
바닥은 순백 자개와 투명한 녹색의 대리석 모자이크였다. 크고 작은 의자들의 다리는 현란한 조각으로 장식한 금은제였다. 술잔은 각 지역 명산의 각각 다른 황금으로 만든 것이었으며 의장 또한 각기 다르게 한 것으로 사람들을 감탄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흘러넘칠 정도로 부어 마시는 고급 포도주와 연회장에 넘실거리는 향내. 더군다나 왕이 임석한 자리치고는 드물게 마음대로 먹고 마시는 것이 허용된 잔치였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도 위세에 눌려 억지로 마실 필요도 없었다. 왕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왕비 와스디를 오시라고 일러라."
왕은 잔치가 무르익었을 무렵 모든 사람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장내에 갈채가 일었다. 그러나 왕비는 출석을 거부했다.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왕이 간청했으나 듣지 않았다.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자리이다!'
왕비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연회에 나갈 기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왕비의 굳센 거부로 잔치 자리는 일순 썰렁해졌다. 왕은 여러 대신과 지방 총독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거드름을 피우는 왕이 알고 보니 왕비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못난 남자라고 남자들이 비웃을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들이 서로 넌지시 눈길을 주고 받는게 보였다.
연회가 끝난 다음 왕은 페르시아인과 메데인으로 구성된 왕실관계 법률 고문을 불렀다. 고문들은 공식석상에서 왕비가 왕명을 거역한 것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아하수에로 왕은 왕비와 인연을 끊어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동시에 산간벽지에 이르기까지 페르시아 전역에 걸쳐 모든 가정의 아내는 남편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는 새로운 법도가 선포되었다.
귀스타브 도레 - 아하수에로 왕의 명에 불순종하는 와스디 왕비
와스디와 헤어진 아하수에로 왕은 편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역시 왕비가 그리워졌다. 궁의 안주인이 자리를 비우자 쓸쓸한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체통이 말이 아니었다. 와스디처럼 아름답되 와스디처럼 건방지지 않은, 상냥하고 영리한 왕비감을 물색해야겠다는 마음이 날로 굳어갔다.
인도에서 에티오피아에 걸쳐 광대한 지역에는 미인도 많았다. 윤곽이 뚜렷하고 눈이 시원스런 인도 미녀, 청초하면서도 아름다운 레바논 여인. 고귀한 분위기의 에티오피아 여인. 재기 넘치는 아라비아 여인. 미인이 흔한 중동 지역이 아닌가! 측근이 왕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진언했다.
"전국 각 지역 관리에게 포고를 내려 그 지역의 미인 처녀를 골라 천거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후궁을 돌보는 환관 헤개가 그 처녀들을 한곳에 모아 놓으면 왕께서 그 중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왕비로 삼으시는 것이 합당한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즉각 칙령이 내렸다. 얼마 안있어 전국 127개 지역에서 골라 보낸 미인들이 헤개의 거처에 모이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법도에 따라 그녀들은 6개월 동안 날마다 몰약이 든 향유로 목욕했으며 다음 6개월 동안 발삼 기름으로 목욕했다. 후궁에서 특별 고용된 안마사들이 매일 밤 그녀들을 마사지하며 근육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6개월과 6개월. 1년에 걸친 '정결기간'이 끝나자 처녀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왕의 침소로 들어가는 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소로 들여보내는 전날, 헤개가 처녀에게 왕 앞에 나갈 때에 사용하고 싶은 향료, 옷 장식품이 어떤 것인지 물어보는 것이 관례였다. 처녀들은 모두 그 순간만은 내숭을 떨쳐내고 이것저것 원하는 것을 주문했다. 개중에는 정도에 지나치는 것까지 요구하기도 했다. 헤개 역시 처녀들이 요구하는 것은 돈을 아끼지 않고 다 들어주는 것이었다
모르드개는 독신이었다. 외로웠기 때문에 죽은 숙부의 외동딸 에스더를 제 자식처럼 정들여 키웠다. 모든 정성과 사랑을 기울여 율법을 가르치고 유다 백성의 역사를 깨우쳐 주었다. 옷값도 아끼지 않았다. 에스더는 한창 나이의 처녀가 되었다. 수산 부근, 수산 주변 어디에도 에스더만큼 아름다운 처녀는 없었다. 당연히 수산 관아의 명으로 에스더 역시 궁으로 뽑혀 갔다.
"말해서는 안된다. 네 민족과 혈통을 말해서는 안된다! 그냥 수산 출신이라고만 하면 된다."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떠나보내면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궁에 근무하고 있는 것을 기화로 모르드개는 헤개가 관리하고 있는 에스더 거처의 정원으로 가서 동태를 살펴보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칙령에 따라 각지의 처녀들이 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지 1년이 지났다. 왕이 첫 번째 처녀를 불러들였다. 하룻밤을 함께 한 뒤 그 처녀를 정중히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부름을 받지 못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처녀들은 차례차례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침마다 이어지는 처녀들의 실망. 헤개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 역시 아침마다 실망을 맛보아야 했다. 열 번째의 어느 날, 에스더의 차례가 되었다. 왕의 침소로 들어가는 날 저녁 그녀는 특별히 주문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 헤개를 놀라게 했다.
"헤개님, 당신이 주신 것만으도 충분합니다."
지금까지 욕심을 부리던 처녀들만 상대해 왔던 헤개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심쩍은 눈으로 에스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감탄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처녀인가! 몸과 마음이 모두 고결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지난 열두 달 동안 에스더를 돌보았던 후궁의 시녀들이 그녀를 왕의 침소로 데려다 준 다음 감탄하고 있는 헤개에게 말했다.
"지금 그 분은 우아하면서도 상냥한 처녀세요. 다른 처녀들과는 다른 데가 많습니다. 그분이 왕비가 되셨으면 좋으련만..."
이튿날 아침, 에스더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다. 왕의 침소에 그냥 머물러 있었다. 왕의 마음속에 사랑이 싹튼 것이다. 이윽고 새로운 칙령이 선포되었다. 왕비 대관식을 알리는 포고였다.
모르드개는 그 뒤에도 왕비 처소 주변을 남몰래, 그러나 자연스럽게 순회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시녀를 통해 왕비에게 선물도 보냈다. 선물 꾸러미 속에는 모르드개가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한 왕비에 대한 배려와 여러 절기와 상황에 따라 처신해야 할 지침을 적은 문서가 숨겨 있었다.
왕의 총애는 날이 갈수록 깊어갔다. 궁안의 모든 사람들이 왕비를 좋아했다. 재상인 하만조차 왕비에게 호감을 보였다. 모르드개의 치밀한 사전 계획과 대책으로 하만은 왕비 에스더가 유다 민족 베냐민 지파의 혈통임을 모르고 있었다.
테오도르 세사리오 - 화장하는 에스더
하만은 재상이 된 뒤부터 제국의 치안유지를 위해 대 유다정책을 실행에 옮길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유다인 모르드개에 대한 사적인 증오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아하수에로 왕 12년 첫번째 달. 하만은 유다정책 실행에 앞서 점을 쳐볼 생각으로 제비를 뽑았다. '열두번째 달 열 사흗날.'이라는 괘가 나왔다.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 앞으로 나갔다.
"전국 각 지역을 살펴보건대 여러 이민족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 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으나 아직도 페르시아 제국의 법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는 일단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갔다.
"지금 그들을 일소하지 않으면 제국의 치안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제국을 지키는 것조차 힘들지 모릅니다. 지극히 위험한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하만은 불순분자 일소를 위한 경비 1만 달란트를 국고에서 부담할 것을 진언했다. 왕은 하만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1만 달란트의 국고부담과 하만의 자유재량권을 승인했다.
첫 째달 열 사흗날. 각 지방장관 앞으로 보낼 명령서가 작성되었다. 인도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의 각 지역 총독과 지사 앞으로 발송된 포고령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 아하수에로 왕은 인도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전국 127개 지역 장관들에게 고한다. 만백성의 어버이로 천하를 다스리는 왕인 나는 위엄과 힘이 아니라 중용과 자비로 백성에게는 생활의 안정을, 국토에는 평안을 보장하여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음을 경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는 반역심을 품고 있는 족속이 있음이 분명하다. 높은 견식과 헌신을 갖춘 충성심이 남보다 뛰어난 재상과 협의한 결과 우리 제국의 법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국가단결과 평안을 위협하고 있는 반역의 백성은 열두 번째 달 열 사흗날부터 무력으로 일소하기로 결정했다."
각 기방장관은 포고령을 접수하자마자 겸허히 시행할 것을 복명함과 동시에 각 고을과 거리, 광장에 포고령을 게시했다. 유다 백성은 포고령의 대상이 자신들임을 깨달았다. 각지에서 탄식 소리가 터져나왔다. 특히 유다 백성이 많이 살고 있는 수산 거리는 그날로 깊은 시름에 잠겼다. 모르드개는 옷을 벗어버리고 베자루로 몸을 감고 땅에 엎드려 머리에는 재를 뿌렸다. 그는 간절한 목소리로 기도했다.
"만유의 주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여, 지난날 애굽에서 이 백성을 구해내신 하나님... 이 백성을 멸망에서 건져내소서. 땅에서 유다 백성이 끊기지 않게 해주소서."
모르드개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몸을 떨었다. 한 가지 일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에스더!"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계신다."
모르드개는 편지를 써서 심복을 통해 왕궁의 에스더에게로 보냈다.
"에스더 네가 왕비가 된 것은 이런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백성을 구하라. 일어나 백성을 구하라."
왕비는 그 자리에서 답서를 썼다.
"왕의 신하, 왕의 아내, 왕의 재산... 모든 사람은 이 왕국에서 왕이 부르기 전에는 왕에게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페르시아 법에 따르면 왕의 부름이 없는데도 나아간 자는 사형을 면치 못합니다. 예외적으로 왕의 부름 없이 나아온 자에게 황금 홀을 내밀면 처벌을 면할 수 있습니다. 왕이 황금 홀을 내미는 자는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 국한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수산의 모든 유다 백성을 집합시켜 사흘 밤 사흘 낮을 금식기도하도록 지시해 주세요. 나도 사흘 밤 사흘 낮을 금식기도 하겠습니다. 나흘째 되는 날, 나는 내 일신을 걸고 백성의 목숨을 빌러 왕을 배알하러 가겠습니다."
모르드개는 즉시 수산의 모든 유다 사람들을 모아 전말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야곱 이스라엘의 피를 물려받은 모든 이들은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죽음을 직시하고 전심 전력으로 기도했다.
COYPEL,Antoine - The Swooning of Esther
사흘 밤 사흘 낮이 지난 뒤 에스더는 아름답게 꾸미고 정원을 지나 왕의 거실 문을 열었다. 앉아 있던 왕은 안으로 들어오는 에스더의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를 머금었다. 동시에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 앞으로 나아온 그녀의 행동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황금 홀을 내밀었다.
"사랑하는 에스더, 무슨 일로 이렇게 달려왔는가. 이 왕국의 절반을 떼어 달랄 생각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떼어줄 수도 있소."
에스더는 얼굴 가득 웃음을 담아 왕이 내민 황금 홀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면서 대답했다.
"폐하, 폐하께서 제게 내리신 거처로 왕림해 주소서. 한동안 오시지 않으셨나이다. 재상 하만과 함께 오늘 저녁 제가 마련한 잔치에 왕림해 주소서."
왕은 젊은이처럼 들뜬 얼굴로 대답했다.
"가고 말고. 물론 가야지. 하만에겐 내가 알리겠소."
그날 밤, 왕비전 발코니는 시원한 바람에 실려 온 꽃향기로 가득 찼다. 수많은 촛불을 밝혀 대낮 못지않게 밝았다. 왕과 왕비만의 오붓한 잔치에 혼자 초대된 하만은 더할 수 없이 만족스러웠다. 잔치가 무르익었을 무렵 왕은 사랑이 담긴 그윽한 눈길로 에스더를 바라보면서 다시 물었다
"에스더,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한껏 교태스런 목소리로 에스더가 대답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전하께서 자주 저를 찾아 주시는 겁니다. 내일 저녁 전하와 하만님을 또 한 번 모시고 싶습니다."
왕은 미소로 답했다. 하만은 너무도 만족한 나머지 왕 앞임에도 그것을 잊고 소리 높여 웃었다.
그날 밤 잔치 자리에서 물러날 무렵, 하만은 궁궐 문 앞에서 모르드개와 마주쳤다. 모르드개는 여전히 재상 하만을 보고도 무릎을 꿇지 않았고 가벼운 예를 할 뿐이었다. 하만은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어떻게 해줄까, 이 건방진 유다 녀석!'
그냥 놔두어도 열두 번 째 달이 오면 유다 사람 전원은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 죽음을 조금 앞당긴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50큐빗 높이의 교수대를 만들어 모르드개를 매어달자. 재상에 대한 무례와 페르시아 법을 어긴 죄는 죽어 마땅한 것!'
하만은 부하들을 불러 내일까지 교수대를 만들라고 명했다.
VIGNON, Claude - Esther Before Ahasuerus
같은 날, 연회가 끝난 뒤, 왕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에스더의 아름다움과 오랜만에 경험한 침실에서의 요염한 즐거움이 잠을 쫓아버린 것 같았다. 마침내 왕은 시종에게 페르시아 연대기를 가져와 침상 곁에서 읽도록 했다. 시종은 침상 곁에서 공손한 목소리로 연대기를 읽어 내려갔다. 그 중의 한 구절이 왕의 주의를 끌었다. 왕이 총애하던 두 환관이 왕을 암살할 음모를 꾸몄지만 충성스러운 모르드개가 사전에 탐지하여 비극을 막았다는 부분이었다.
'그렇지, 그런 일이 있었지..."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시종에게 물었다.
"그 때 모르드개에게 내린 상이 무엇이었던가?"
"전하, 아무 상도 내리시지 않았습니다. 직계를 올려준 것 외에 다른 상을 내리신 것은 없사옵니다."
"그런가?"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아침, 왕은 궁궐 바깥 정원에 새로 대를 만드는 것을 보고 무엇이냐고 측근에게 물었다.
측근이 대답하려는 참에 하만이 들어왔다. 재상은 모르드개를 처형하기 앞서 왕의 재가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하만을 본 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왔소, 하만. 각별한 공로자에게 포상을 내리자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각별한 공로자, 자신을 제외하고 그런 공로자가 있을 수 없다고 하만은 생각했다.
'특별포상까지 받게 되다니... 요 며칠 새 좋은 일이 줄을 잇는군!'
"폐하!"
그는 터지려는 웃음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광장에 모든 신하와 많은 백성을 집합시킨 다음 그 중앙에 공로자를 세우고 폐하의 문장이 든 옷 한 벌과 궁궐 마장에서 골라낸 말 한 필을 하사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백성들이 '보라, 임금에 충성을 다한 공훈자의 영광을!'이라고 부르짖는 가운데 전하가 직접 하사하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사료됩니다."
"그렇다면 모르드개를 당장 이리 불러오도록 하오. 경 말대로 유다 사람 모르드개를 포상하겠소."
뜻밖의 말에 하만은 기가 막혔다. 왕은 또 평소의 왕과는 전혀 달랐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왕이 명한대로 실천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어차피 열두 번째 달이 오면 모두 죽여야 할 사람이 아닌가?
FRANCKEN Frans - Feast of Esther
같은 날 저녁, 왕은 하만을 거느리고 왕비전으로 갔다. 잔치가 무르익자 왕은 사랑이 가득한 목소리로 에스더에게 물었다.
"사랑하는 에스더, 그대의 소원은 무엇이오?"
에스더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부르면서 분명하게 대답했다.
"폐하, 저의 목숨을 되돌려주십시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돌려주세요! 도살과 학살에서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을 구해 주소서."
"뭣이라구?"
왕은 깜짝 놀라면서 되물었다.
"왕비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저기, 저 사람!"
에스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뻗어 하만을 가리켰다.
"박해자, 도살자, 모략가 하만이 바로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왕은 이 뜻밖의 사태에 기가 막힌 듯 아무 말도 못했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선 왕은 정원으로 나갔다. 찬바람에 정신을 수습한 왕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을 때 하만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왕비 에스더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는 표변한 에스더의 의연한 자세와 뜻밖의 괴변에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만의 흐트러진 모습이 왕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왕비의 침상에 눕다니! 폭행이라도 하겠다는 뜻인가?"
왕비 에스더는 왕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동안의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 했다. 왕은 에스더의 손을 잡고 그녀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젯밤부터 일어난 모든 일이 새삼 똑똑하게 떠올랐다.
VICTORS Jan - The Banquet of Esther And Ahasuerus
VICTORS Jan - Esther and Haman before Ahasuerus
귀스타브 도레 - 하만을 고발하는 에스더
왕비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꼼짝도 못하고 쓰러져 있는 하만의 얼굴에 사형의 징표인 흑포가 씌워졌다.
50큐빗 높이의 교수대에 매달린 자는 모르드개가 아니라 하만이었다. 하만의 호화저택은 왕비 에스더의 소유가 되었다. 모르드개는 왕의 부름으로 벼슬길로 나아갔다.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혈연관계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유다 민족이라는 것도 왕에게 알렸다. 왕은 충성스런 유다인 모르드개를 하만 대신 재상에 임명하고 직접 재상의 반지를 끼워 주었다.
셋째 달 스무 나흗날, 궁정 서기관이 새로운 칙령을 작성했다. 인도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127개 지방장관과 군사령관, 장로들에게 보내는 칙령의 내용은 지난 번 내렸던 유다 백성 살해령을 취소하는 것이었다. (하만이 공포한 유다인 살해 칙령은 왕이라도 취소가 불가하다. 따라서 칙령의 취소가 아닌, 그 칙령에 대한 유다인의 자위를 위한 무력행위를 보장하는 새로운 칙령이었다.)
이 에스더의 이야기는 제사장 직분을 맡고 있는 레위 지파의 드지테오와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가 클레오파트라 7세가 다스리고 있던 이집트의, 현재의 아스완 댐 근처의 엘레판티네 섬에 모여 살고 있던 유다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던 것이다. 원전인 히브리어판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아들, 드지테오의 손자로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리지마코스였다.
이누카이 미치고 저, <성서 이야기 >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