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만이 선민이다?
이스라엘만이 선민이다?
하나님의 선택이 배타적이라는 생각은 유대주의적 해석
우리가 귀 아프도록 되뇌어 온 명제 중 하나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호칭이다. 오늘날 중동 땅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핵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가나안이라는 땅을 매개로 세계대전을 유발시킬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들로서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 와중에 이스라엘을 편드는데 익숙한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은 신이 선택한 백성이라는 믿음에 근거해서 이스라엘과 맞서고 있는 팔레스타인(아랍)을 사탄의 자식들로 몰아붙이는 경향도 있다. 정말 오늘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인가? 그리고 팔레스타인은 버림받은 사탄의 백성들인가?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다.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의 조상도 아브라함이다. 결국 둘은 형제인 셈이다. 그런데 신의 부르심을 받아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의 자식 중 장자인 이스마엘은 첩(종)의 소산이었고, 둘째인 이삭은 본처의 소산이었다. 유대인들은 당연히 본처의 소산인 이삭이 선택된 자의 대를 이은 것이고, 첩의 소산인 이스마엘은 선택된 자의 혈통에서 배제되었다고 믿는다. 왜 첩의 자식은 '선택된 백성'이 될 수 없는 것일까?
모호한 '선택'받는 기준
이삭 역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이번에는 둘 다 본처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장자였던 에서는 팥죽 한 그릇을 얻어먹고 동생 야곱에게 장자권을 넘겼고(당시 정황을 추측컨대 에서는 의미 없는 약속(장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동생 야곱은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여 마치 큰 아들 에서인양 행세함으로써 형에게 돌아갈 축복을 도적질하였다. 결국 형 에서는 장자권을 소홀히 생각한 죄값으로 선택된 자의 혈통에서 배제되었고, 아버지를 속여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이 당당하게 선택된 백성의 계통을 이었다. 왜 장자권을 도둑맞든 자식은 '선택된 백성'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 중 장자권을 지닌 자는 르우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킨 다윗의 혈통 시조가 된 자는 유다였다. 여기서 '선택된 백성'의 혈통은 누구를 통해 이어져야 할까?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 '본처 자식과 장자권'이라는 기준을 통해 '선택된 백성'의 혈통이 이어졌지만, 야곱에 이르러서는 이 기준들이 다 무시된 채 본처와 후처와 종들의 자식까지 열 둘 모두가 '선택된 백성'의 혈통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왜 장자도 아니고 본처의 자식도 아닌데 '선택된 백성'이 될 수 있었을까?
'선택된 백성'의 열두 지파 조상들은 이집트로 내려가 수백 년을 거한 후, 마침내 신의 인도로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됐던 땅 가나안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파라오의 압제에서 벗어나 시내산에 이르러 신께서 선택한 백성임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데, 이 때 탈출한 백성들의 무리 속에는 야곱의 후손뿐만이 아니라 당시 이집트에서 고생하던 하비루들이 다수 합류해 있었다. 아브라함의 자손도 아닌 자들(이방인)이 어떻게 '선택된 백성'이 될 수 있었을까.
가나안을 차지한 이스라엘은 다윗 왕국을 거쳐 솔로몬왕이 죽은 후에는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으로 나뉘었다. 아시리아의 침략을 받은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하고 수백 년 후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함으로써, 선택된 백성의 왕국은 종말을 고했다. 그 후 마카비를 중심으로 잠시 독립 왕국을 이루었던 유다는, 예수가 탄생할 즈음에는 다시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게 됐다. 식민지배를 받는 상황에서도 남쪽 유다는 북쪽 이스라엘을 사마리아인이라 칭하며 '선택된 백성'의 범주에서 배제시켜버렸다. 이방인의 피로 더러워진 자들이기에 그들은 선택된 백성이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방인의 피가 섞이면 선택된 백성이 아닌가? 이방인과 결혼했던 그들의 조상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한편으로 이방신을 섬겼던 그들의 조상들, 모두가 선택된 백성의 범주에 남아 있는데, 왜 사마리아는 선택된 백성에서 제외되어야만 하는 걸까? 유다 지파의 시조인 유다 역시 이방인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건만, 그 직계 자손들이 이제 와서 다른 이들을 보고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고 배척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선택된 백성'이라는 무리가 과연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인가? 그 경계가 너무도 오락가락하였기에 세례 요한은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외쳤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야곱의 열두 아들로 좁혀졌던 선택된 백성의 울타리가, 애굽 이민 시절을 거치면서 이번에는 애굽의 노예로 있던 다른 종족(이방인)들이 더하여져 넓혀졌다가, 남북 왕국을 거친 후에는 북쪽 사마리아를 버리고 남쪽 유다만으로 국한됨으로써 다시 좁혀졌다. 그 후 그들은 가나안을 떠나 이천 년 동안 세상을 유랑하고 다녔다가 최근에야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군사력을 등에 업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만들었다.
나의 피택은 곧 너의 유기다?
'선택된 백성', 그들은 과연 지금 어디에 남아있는가? 오늘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채우고 있는 이들인가? 아니면 그들 중 일부인가? 이번에는 어떤 기준으로 그들을 분류해 내야 할 것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만인가? 이스라엘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몇 명이나 있는가? 이슬람교(이스마엘의 후손)는 예수를 위대한 알라의 선지자로 인정하고 신약 성경을 알라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유대교(이삭의 후손)는 예수를 랍비 정도로 생각하고 신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의 선택은 배타적인 것으로 전제되어 있었다. 그들은 신이 이스라엘을 선택했다는 말을 다른 민족은 버렸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이삭을 선택했다는 것은 이스마엘을 버렸다는 얘기요, 야곱을 선택했다는 것은 에서를 버렸다는 얘기다. 오직 자기들만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고 나머지는 모두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그 선택의 징표가 바로 할례였다. 그래서 그들은 할례를 목숨 이상으로 소중하게 생각했다. 과연 신의 선택은 배타적인 것인가?
신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 다른 모든 사람들은 신의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전쟁을 마친 후 멜기세덱을 만나는 기사가 나온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즉 그는 신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대인의 눈으로 보면 그도 역시 신이 선택한 자가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를 신의 백성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이런 식의 선언은 신의 선택을 편협하게 제한하려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오만에 근거한 것이라 여겨진다. 신께서, 멜기세덱과 그 자손들은 버림받은 자들이라고 말할 권리를 유대인들에게 주셨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삭을 선택한 신은 완전히 이스마엘을 버린 것일까? 이스마엘은 신의 선택을 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했고 그 당시 이삭 외에는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야곱의 자녀들은 첩과 종의 자식들까지 모두 선택된 백성의 범주에 들어갔는데, 왜 그들의 큰할아버지인 이스마엘은 첩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배제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욥은 어떤가?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다. 그런데 신은 그를 의인이라고 했다. 그의 친구들 역시 신을 알고 섬기는 자들이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욥도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며 신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발람 선지자는 또 어떤가? 그에게 신은 응답하셨고, 그는 선지자로서 신의 계시를 사람들에게 대언했다. 그를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신과 무관한 자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도자였던 빌립 집사가 만났던 이디오피아의 내시 역시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사야서를 읽으며 가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 아니었던가?
아브라함은 '모델 하우스'일 뿐
신은 아브라함을 불렀듯이 인간을 부르신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모든 인간을 향해 부르고 계신다. 문제는 그 부름에 응답하는 자와 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응답하는 자는 선택받은 것이요, 응답하지 않는 자는 선택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신의 부름에 응답한 사람의 모델로서 성경에 기록되었다. 따라서 신이 아브라함만을 불렀고 그럼으로써 다른 인간들은 모두 부르심에서 배제되었다는 생각은 유대인들의 민족주의가 초래한 자기중심적 해석에 불과하다.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기사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모델 하우스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아파트가 이런 식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본보기라는 말이다. 신이 아브라함을 불렀듯이 항상 우리를 부르고 계시며, 그 옛날 아브라함이 신의 부르심에 응답했듯이 우리도 항상 신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선택이 배타적이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어진다. 유대인식 언어로 표현하자면 신의 부르심과 선택은 이방인들에게도 열려 있는 가능성이었다라고 할 수 있겠다. 신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든 자들에게 신의 은총은 열려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