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로아스터의 결정적 영향과 예수 신화
조로아스터의 결정적 영향과 예수 신화
글쓴이: 에찌
http://cafe.daum.net/tantraforlove/DkSU/11
조로아스터에서 예언된 원태조 메시아
기원전 6C 경에 번성하기 시작한 조로아스터교(짜라투스트라가 계시를 받고 종교를 창시한 것은 기원전 7세기라고 함)는 인류사에 있어서 엄청난 흔적을 남긴 종교였다. 이 종교는 유대교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쳤으며,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탄생시키게 된 결정적인 원류가 되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유대교와 기독교에 남긴 영향은 4장에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이번에는 예수와 관련된 부분을 탐구해 보겠다.
우선 이 종교는 강력한 이원론을 갖고 있던 종교로 선과 악, 빛과 어둠을 분명히 대비시키는 것은 물론,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고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에 종말을 맞게 될 것이라는 사상을 지녔다.
짜라투스트라가 창설한 '파르시교'의 교리에 따르면(아베스타 경전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 전지전능의 창조주인 '아후라 마즈다'는 유일신이자 보편적인(부족신 차원에서 탈피한) 빛의 신이고, 어둠의 신이자 악신 '앙그라 마인유'(후에 '아리만'으로 불림)는 인간을 타락으로 이끌려고 한다.(이외에 성령인 '스펜타 마이뉴'도 있다)
조로아스터의 우주론은 4개의 3000년의 시간 블록들 속에서, 12000년 동안 지속된다고 한다.
'조로아스터의' 출생은 12000년 중 마지막 3000년이 시작됨을 나타낸다.
그리고 '조로아스터'의 사후 3000년이 지나면, 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구하기 위해 구세주 '사오샨트'가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어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구세주는 구원의 방법을 알려주고, 이를 따르는 인간들이 원래의 세상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을 하는 직선적 역사가 있게 되고, 어느 시점이 되면 '아후라 마즈다'는 불로 세상을 심판한다. 그리고 어둠의 세상은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구세주가 재림하며 선한 사람을 무덤에서 부활시켜 영생을 누리게 된다.
또 모든 사람은 선과 악 사이에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투쟁의 참가자이며 그러한 투쟁이 벌어지는 장은 지상과 개개의 인간 육체라고 주장했다.(이러한 관념은 귀신들림에 대한 믿음에도 강력하게 영향을 주었다.)
전승에 의하면 짜라투스트라가 스스로 광야로 가서 기도할 때 '앙그라 마인유'가 나타나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주겠다고 말하지만 짜라투스트라는 강력하게 거부한다. 이것은 예수가 사탄에게 시험당하는 대목과 거의 같다. 아마도 이런 당시 유행한 광야시험이란 주제를 로마가 예수교에 집어 넣었을 것이다.
또, 영혼이 육체를 떠나기 전 무덤가에 3일 동안 머물러 있다고 하는 조로아스터교의 믿음은 미트라와 예수를 비롯한 수많은 구세주들이 3일만에 부활하는 신화에 그대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사오샨트(Saoshyant)와, 성령 천사장(Spenta Mainyu)의 삼위 일체와 구세주의 동정녀탄생 역시 나중에 등장하는 메시아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예수를 찾아온 세 사람의 동방 박사들도 바로 마기로 추측된다.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실질적으로 당시의 바빌론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에 접하게 되면서 유대교에 심오한 변화를 가져왔다.
사후세계에 대해서도 여호와에게 선택된 선지자까지도 지하세계인 쉐올에 간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과 달리,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은 천국 아니면 지옥에 가며 구세주 재림 후 천국, 연옥, 지옥의 모든 인간이 부활해서 최후의 심판이 행해진다는 이분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부활 교리는 유대인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2장 23절에서 보수적인 사두개파는 영혼의 세계를 부인했고 바리새파는 그것을 인정한 사실에서 보듯이 신약 시대까지도 그러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부활과 심판의 교리와 메시아사상을 유대인에 맞게 변형시켜서 도입했다.
다니엘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대인들은 조로아스터적 메시아 개념을 외국의 압제로부터 유대를 구원할 다윗과 같은 왕에 대한 기대로 변형시켜서 도입했다.
그리고 조로아스터교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마기(제사장)에 의해 각 지역의 토착종교와 혼합되면서 아리안적인 다신관이 나타나기도 하는 등, 극심한 변질을 겪게 된다. 유사한 종류의 수많은 메시아들이 각 지역에서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 기독교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미트라의 전승
미트라의 기원은 고대 인도, 이란의 민족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조로아스터교와 합쳐져 미트라 숭배는 BC 3세기경에 페르시아에서 성행하였다. 따라서 페르시아의 발전에 따라 그리스로 건너가게 되었으며, 거기서 자연히 로마로 전파되어 밀교로서 특히 군인층에서 널리 신앙되었다.
미트라는 페르시아의 신이었지만,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더욱 번창하였다.
미트라교에 대해서는 고대 페르시아의 아르탁세륵세스 2세(재위 BC 404∼BC 358)의 비문(碑文)에 그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로마에 나타났던 미트라의 종교 형태는 이미 그 내용이 크게 변질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소아시아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토착종교와 혼성(混成)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폼페이우스(BC 106∼BC 48)황제의 동정(東征) 이후에는 로마제국의 수호신으로까지 격상되었다.
미트라의 비밀이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기독교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고 그것의 비밀은 기독교의 근원에 어떤 빛을 비추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미트라의 전승은 기독교의 것에 비해 적어도 600년은 앞서고 있으며, 초대기독교와 같은 시기에 번성하였다. 이 종파는 엄청난 인기를 모았으며, 3세기에는 수백 개의 미트라에움(미트라를 숭배하는 지하 사원)들이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던 소아시아, 아프리카, 이탈리아, 그리스 독일과 스코틀랜드 국경에 퍼졌다. 미트라 신전에 건조되었던 우상(偶像)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에 많이 파괴되었지만, 당시의 건조물을 포함한 종교적 유적은 현재 유럽에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콘스탄티누스황제는 로마의 미트라 "솔 인빅투스"의 숭배자였고, 그의 영향 아래 예수는 솔 인빅투스와 동화되어 버렸다.
미트라는 신체적으로 동정녀 출생이라고 전해지는 지중해의 신들 가운데 가장 유명했다. 신체적 동정녀 출생은 바빌론의 이쉬타르 여사제들을 그럴듯하게 흉내 낸 것이다. 미트라는 아래의 특징을 예수와 공유하고 있다.
① 미트라는 12월 25일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② 그는 위대한 방랑교사였다.
③ 그에게는 열 두 제자가 있었다.
④ 기적을 행했다.
⑤ 미트라는 태양신의 아들로서 미트라 성 삼위일체설을 형성하였다.
⑥ 그는 무덤에 묻혔으며 3일 후에 다시 일어났다.
⑦ 미트라 교도들은 그가 부활한 날에 축제를 베풀었는데, 그 날은 지중해의 여러나라에서 춘분축제 였으며, 나중에 기독교의 부활절이 되었다.
⑧ 사람들은 그를 선한 목자로 불렀다.
⑨ 그는 길이요, 진리요, 빛이요, 구세주 혹은 메시아로 여겨졌다.
⑩ 미트라를 기리는 거룩한 날은 예수가 나기 수 백년 전부터 sunday 즉 일요일이었으며 그 날은 또한 主의 날이기도 하였다.
최근에 20-30 명이 들어설 수 있는 지하 동굴들이 "이탈리아"를 포함해서 북쪽으로는 "영국", 남쪽으로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당시 로마 군대가 주둔 했던 곳 에서는 어김 없이 발견되는 이 동굴들에는 이상한 인물과 장면을 묘사하는 그림과 유물들이 수도 없이 공통적으로 발견되었는데, 학자들은 이 동굴들이 '미트라'교의 예배 장소임을 밝혀 내었다.
이 "미트라" 숭배의 흔적이 발견 된 지역은 영국, 이탈리아, 로마니아, 독일, 헝가리, 불가리아, 터키, 이란, 알메니아, 시리아, 이스라엘 및 북부 아프리카등 거의 유럽 서아시아 모든 일대에 있다. 밀교였던 관계로 그들의 경전과 여타 정보가 전무했지만, 부분적인 정보들이 당시 역사가들의 서술이나, 기독도들의 그들에 대한 비판에서 엿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정보는 "영웅전"으로 유명한 역사가 "플루타르크"의 진술이다. BC 67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소 아시아 남 동부 해안의 '실리시아'에 미트라의 밀교 의식을 행하는 큰 무리의 해적 떼가 있었다"
"실리시아"는 바울이 출생한 "탈수스" 도시가 위치한 지역이었다.
가장 오래 된 유물들은 AD 1세기 말의 것으로, 3세기에 교세가 가장 확장되었으며, 5세기 초 기독교의 득세로 수그러 들었다. 신도들은 군인, 관료, 상인이 주를 이루었고 여인들은 배제되었다. 5세기경 기독교는 맹위를 떨쳐 많은 미트라의 지하 사원을 접수하여 기독교 사원으로 개조한 곳이 여기 저기 드러난다. 기독교 교회라고 생각된 곳에서 채 지워지지 않은 예의 "미트라" 그림들이 발견된 것이다. 몇 단계의 의식을 거쳐야만 최고의 진리에 접할 수 있었던 그들의 가르침은 철저히 신도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수되었기에 학자들 사이에서 그들의 교의에 대해 학설이 분분하였다. '미트라'라는 이름은 '페르시아' 어로 '계약'을 뜻하고, 지역에 따라 '마이트로스', '미어', '메어' 등 으로 불리기도 한다.
힌두교의 "마에트라"는 불교와 결합해 미륵신앙으로 발전해 나갔다. 로마의 미트라 '솔 인빅투스'는 이란의 미트라에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했다. 로마의 저술가들도 미트라의 근원이 페르시아에 있다고 서술하였다. 오늘날 불교와 기독교, 부처와 예수를 비교해서 유사성을 증거하려는 불교학계의 서적이 여러번에 걸쳐서 출판된 적이 있다. 이러한 관점은 '인도에서 예수의 생애' 라는 독일 신학자 홀거 케르스텐의 주장이 유명한데,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실지로 부처와 예수는 상당 부분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부처와 인도의 크리슈나와 예수가 어째서 유사성을 El는가는 미트라를 통해서만 그 의문이 전부 해결될 수 있다. 그것은 인도, 이란지역에서 발생되어 동서양 각지로 퍼져나간 미트라 숭배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미트라를 비롯한 수많은 메시아 숭배사상은 영지주의(그노시스파)의 영향 아래 있었다. 우리나라의 불교학 교수들은 도마복음서등에서 불교적인 색채가 짙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사실상 영지주의의 교리가 상당수 불교적인 교리와도 비슷하다. 이것은 미트라교가 인도와 이란 등지에서 발생한 종교였기 때문이었다.
미트라 교도들의 신자의 제례는 종종 맑은 샘물이 솟아나오는 바위굴 안에서 행해졌는데, 이러한 "미트라" 동굴에서 꼭 발견되는 하나의 그림이 있다. 한 인물이 황소의 목을 따는 그림인데, 이 그림이 페르시아의 미트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은 최근의 학자들은, 로마의 미트라가 이름만 빌렸을 뿐이지 새로운 신앙 체계임을 밝혀 내었다.
그리고 미트라는 사자상으로도 상징되었는데, 사자의 입에는 벌(Bee)이 물려져 있다. 그 벌은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갈대아어에서 '벌'은 '로고스'(말씀)이란 뜻도 된다.
미트라는 '우라노스'(Ouranos, 빛을 비추는 자)로도 불리는데, 우라노스는 '크로노스'(Kronos)와 동의어로서 크로노스는 '광선을 보내는 자' 혹은 '뿔이 나온 자'란 뜻을 가지고 있다.
[Alexander Hislop / 두 개의 바빌론 / 193~194 쪽]
그들은 태양신의 아들인 미트라가 빛을 준다는 것을 타오르는 등불과 켜진 밀랍초로써 상징하게 하였고(특히 밀랍초(wax-candle)를 사용토록 한 것은 밀랍이 벌에 의해 생산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태양신 숭배종교의 모든 의식에는 타오르는 등불과 밀랍 촛불의 행렬이 필수적 요소가 되었다.
[Alexander Hislop / 두 개의 바빌론 / 194~197 쪽]
3일만의 부활
그는 '세상의 빛'으로 불리워 졌고, 예수와 마찬가지로 '미트라' 성 삼위 일체의 두 번째, 즉 아들의 존재로써 중개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의 생일은 12 월 25 일로 경축되었으며, 만인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었다가 3일만에 부활하였다.
그의 부활은 기독교의 부활절 주기(더 정확히 말하면 춘분)와 일치하며 12 제자를 거느렸다.
미트라의 지하사원의 벽화에는 꼭 황소, 개, 까마귀, 뱀, 전갈들이 나타나며, 여러 곳의 그림 중 사자와 물잔도 종종 포함되어 있으며, 뒷 배경으로 많은 별들이 그려져 있다. '황소 도살자'의 돌에 새겨진 그림 미트라가 거대한 황소의 목에 칼을 찔러 넣고 있고, 피가 땅으로 쏟아지고 있는 투우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벽화에는 태양 신의 아들인 미트라가 황소를 제압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로마의 미트라의 지하사원에는 황소 도살 장면이 항상 동굴 안에 놓여져 있었는데,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리스-로마 세계가 우주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고대인들은 태양과 달, 움직이는 별들(행성들), 혜성들, 그리고 기타 천체들이 고정되어 있는 지구 주위를 움직이고 있는 천상의 신들이라고 믿었다.
태양신(Sol invictus)이 천상의 신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특별히 경배되었고 12월 25일 동지 동안 하늘의 가장 낮은 지점에서 매년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되었다.
황도면(태양이 하늘에서 이동하는 길)이 12궁도를 형성하고 있는 열두 가지의 별-패턴 지대를 지나쳐가기 때문에, 태양은 열두 궁도의 신들을 “낳는” 혹은 그들의 아버지가 되는 신으로 생각되었다.
그리스의 천문학자 힙파르쿠스는 기원전 128년, 12궁도의 별자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뒤쪽으로 천천히 흘러서, 동지에 다다른 태양의 위치와 비교할 때, 하늘의 새로운 위치에 나타난다는 놀라운 발견을 해 냈다.
매 2만 5천 년마다, 이러한 별자리들은 서서히 움직인다. 이는 오늘날, 지구가 그 축 위에서 “흔들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분점의 세차로 알려져 있는 현상이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무섭고도 놀라운 사건이었다. 지구가 움직이지 않으며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힙파르쿠스는 세차가 천체 전체가 움직이는 것이라고밖에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즉, 힙파르쿠스의 발견은 전체 우주가 이전에는 아무도 알아차린 적이 없었던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폭로한 것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세차운동'은 심오한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새로운 힘이 천체 전체를 움직일 수 있음이 탐지된 것이다. 이런 새로운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우주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신의 활동을 알려 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힙파르쿠스가 이런 발견을 하던 당시, 태양신의 부활을 신호하는 춘분이 양자리 별자리에서 나타났다. 양자리 전에는, 춘분이 황소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천상의 신들 사이에서 일어난 이러한 천계의 움직임과 황소자리의 “죽음”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일으켰다. 미트라는 황소를 도살할 정도로 강력하고 천계 그 자체를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천상의 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초대기독교나 그 전에 등장했던 조로아스터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미트라교에서는 세상이 선과 악의 끊임없는 전쟁터였다고 주장했다. 악마의 숙주들과 하느님을 섬기는 선민들 사이의 치열한 투쟁인 것이다. 신성이 육체들, 그리고 빛의 선한 운명을 망치는 어둠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미트라는 태양신의 신성한 아들이자 우주의 어둠에 대항해 싸웠던 선한 구원자를 나타낸 것이며, 그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악의 앞잡이들과 싸웠다. 미트라는 천체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우주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미트라의 조각이 알 모양의 petra genetrix, 즉 '생식 바위'로부터 뛰쳐나오는 벌거벗은 아기의 모습으로 그의 출생을 나타내고 있다.
미트라에움이 위치해 있던 바위 동굴들은 미트라가 출현한 '자궁'을 상징한다. 그가 바위에 감금되어 있다가 탈출한 일은 그가 천체로부터 탈출해서 천계를 지배할 수 있는 우주를 초월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미트라의' 출생은 'solo aestu libidinis'(애욕의 열에 의해서만) 일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지구가 전형적인 인간을 낳았다.
12월 25일
미트라는 12월 25일, 태양이 하늘에서 가장 낮은 날에 있는 동지 전날에 태어났다. 미트라의 출생에 새벽빛이 밝아올 때, 사제가 사원에서 나와 '신이 태어났도다!’하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기원후 5세기에 이르면 기독교가 힘을 얻고, 미트라교를 이단으로 선언하고 무자비하게 응징한다. 그 이전 시기에는, 기독교와 미트라교가 공존했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서로에 대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혼합과 영향은 기독교가 미트라교를 추월한 방식에서 명백해진다. 기독교는 미트라교의 추종자들을 자신들에게 편입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며 수많은 미트라에움들을 교회로 변신시켰다. 오늘날 많은 로마 교회들, 특히 로마의 성 클레멘타인 교회의 지하의 아치형 매장 토굴은 이것이 미트라에움들이었음을 잘 말해주고 잇다.
이렇게 두 종교가 로마에서 서로를 맞대고 존재하던 수 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미트라교가 그리스도교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두 종교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유사성들을 낳았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로마의 미트라 "솔인빅투스"의 숭배자였음이 그것을 잘 뒷받침해 준다.
동정녀 탄생, 목자, 12제자
미트라는 세상의 어둠과 악을 정복하기 위해 태양신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목동들만 출생의 과정을 지켜보는 가운데 12월25일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미트라는 12제자를 거느리며 길, 진리, 빛, 말씀, 하느님의 아들, 착한 목동 등 다양하게 묘사되었으며, 종종 죄를 어깨 위에 짊어지고 어린양을 이끄는 것으로 그려졌다. 미트라의 추종자들은 12월 25일(동지)을 축하했는데, 종을 울리고, 축가를 부르고, 촛불을 켜고, 선물을 나누고, 빵과 물로 성찬례를 행했다.
부활절은 이스터신의 축제
또, 그는 죽은지 3일후에 부활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춘분)이었으며, 이스터 여신의 축제(봄의 여신축제, 이스터는 지구의 여신을 이르는 라틴어에서 딴 말)는 미트라의 부활절이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종교회의에서는 이 날이 예수의 부활절이 되어버린다.
또, 미트라의 부활절 사이에는 정의와 사랑의 신인 오시리스를 찾는 40일이 있었다. 이 종파는 또한 불길한 금요일(예수가 처형된 성 금요일과 유사)을 지켰는데, 그 날은 지구를 비옥하게 한, 미트라의 희생적인 황소 도살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전투에서 지친 미트라는 상징적으로 시체로 표현되며, 신성한 바위 무덤에 안치된다. 이것은 후에 기독교의 부활절 전의 '예수의 고난주간'에 영향을 끼친다.
후광과 태양
또, 미트라의 숭배자들은 태양의 에너지가 인간의 두뇌에 축적 된다고 믿었고 이것이 후광으로 나온다고 믿었다. 어것은 후에 중세시대의 성화에서 예수의 얼굴모습을 표현할 때 나타냈던 얼굴의 후광에 영향을 끼쳤다.
부활, 구원, 심판, 예배, 성직자
'미트라' 숭배자들은 천국과 지옥, 마지막 심판, 구원, 부활등의 교리를 믿었다. 마지막 성만찬의 이야기도 매우 흡사하다.
카톨릭의 성직자 계급 제도나 예배 형식 및 예배 시 쓰이는 도구들 즉 향불, 예배 의복 등등 모두 미트라와 흡사하다. 십자가 목걸이, 염주알 등도 마찬가지다.
이 미트라가 어떻게 해서 기독교에 유입되어 예수와 동질화 되었는지는 태양신 숭배자였던 콘스탄티누스황제와 그가 개최한 종교회의 편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출처 :개종 원문보기 글쓴이 : gotta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