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뽀뽀㉿ㅑ | 뽀뽀야
원문 : http://blog.naver.com/wed1204/130002806446
'마사다'란 히브리어로 요새를 뜻한다.
사해에서 서쪽으로 4㎞ 떨어져 유태광야 동쪽 끝에 우뚝 솟은 바위산.
하스몬가(家)의 지배자에 의하여 축조되고 BC 35년에 헤롯왕이 개축하였다.
사방을 깎아지른 벼랑으로 둘러치고 뻗쳐오르던 바위산은 해발 434m이다. 이곳에서 보면 사해와 여리고 그리고 요르단도 보인다.
8분 가량의 마사다 홍보 영화.
산등성이를 따라 수로를 만들어 비 한방울도 모아서 이용하였다.
기원전 40년 헤롯왕은 그곳에 요새를 만들고 소형 별장식 궁전과 로마식 목욕탕 시설을 완비했다. 사우나 복원모형. 헤롯왕은 대단한 건축가이다.
요새의 전방 부분 모형.
마사다의 전체 축소모형.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배(船) 같은 모양을 한 바위산 꼭대기는 평균 너비 120m에 길이 620m, 둘레 1,300m다.
요새에서 바라본 주변 지형.
저 멀리 보이는 저곳에서 로마군들이 진을 치고 마사다를 공격했다.
마사다는 이스라엘 독립성지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학생들은 극기 훈련으로 마사다를 찾는다. 또 이스라엘 군인들이 훈련소를 나올 때 최종적으로 찾는 곳이다. 유대인 960명이 로마군인들에게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전원 자살로서 그들의 자존심을 지킨 곳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국심을 호소할 때 '기억하자 마사다!(Remember Masada)'라고 외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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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에 만든 영화 <마사다>
66∼73년 제1차 유다전쟁의 최종기에 E.벤 야이르가 거느린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960명의 열심당원이 이 요새를 거점으로 로마군에 저항하였다. 예루살렘 함락 후에도 저항을 계속하다가 전원 집단자살하였다.
서기 66년 유태전쟁에 참여했던 역사가 요세푸스는 서기 73년 어느 봄날 밤에 마사다 요새에서 벌어진 일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지휘자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남자들을 모두 한군데 불러모았다. 날이 밝으면 마사다는 무너질 것이다. 그는 비장하게 마지막 연설을 했다.
“형제들이여,우리는 로마와 맞서 싸운 마지막 용사들입니다. 새벽이 오면 우리는 포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유로우므로 부끄럽지 않게 죽을 기회가 있습니다. 그것은 치욕을 당하고 노예로 끌려가지 않도록 아내와 자식들을 우리 손으로 죽이고, 우리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입니다. 자! 노예가 되기보다 자유라는 이름의 수의(壽衣)를 입읍시다!”
벤 야이르의 말이 끝나자 몇몇 마음 약한 사람이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벤 야이르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었다.
“부끄럽지도 않소? 우리가 여기 모여 로마군에 맞선 뒤로 그들은 죄 없는 유태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소. 다마스쿠스에서는 1만8,000 이 처자식과 함께 목이 잘렸고, 이집트에서는 6만명이 살해되었소. 우리는 험준한 요새와 넉넉한 식량을 가지고도 이 싸움에 졌습니다. 지금 로마군은 우리를 살려주겠다고 꾀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성경을 찢으며 승리를 노래하고 싶어합니다.”
벤 야이르의 말이 여기에 이르자 사람들의 눈동자에 불꽃이 어른거렸다.
눈물을 글썽이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결연한 의지가 감돌았다. 그들을 둘러본 벤 야이르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성을 불질러 로마군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마시오. 그러나 식량 창고 한두 군데는 남깁시다. 우리가 먹을 것이 떨어져 죽었다고 보여서는 안됩니다. 자, 다들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을 적의 손으로부터 구하시오.”
남자들은 경건한 얼굴로 흩어졌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아이들을 부드럽게 껴안고, 눈물이 그득한 채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죽였다.
남자들은 다시 한곳에 모였다. 제비를 뽑아 열 사람을 가려냈다.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처자들의 주검 옆에 눕자,열 사람은 집집마다 다니며 그들을 칼로 베었다. 살아 남은 열 사람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골랐다. 뽑힌 사람이 다른 아홉 사람을 죽였다. 마지막 생존자는 모두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자 성안에 불을 놓고 나서 자신의 몸에 깊숙이 칼을 찔렀다. 서기 73년 4월15일 저녁. 죽은 사람은 모두 960명이었다.
그 시간 로마 병정들은 유태인이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밤을 새워 물샐 틈 없이 지켰다. 밤 사이에 유태인 전원이 자결한 것을 실바가 알 리 없었다.
날이 밝자 로마군은 단단히 무장을 갖추고 성벽에 나무다리를 걸쳐놓았다. 로마군 선봉이 함성을 지르며 구름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했다. 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성은 무섭도록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불탄 건물과 960명의 장렬한 주검이 로마군을 맞았다. 그들은 뜻밖에 벌어진 일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들의 비겁한 패배가 저들의 승리를 더욱 영광스럽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죽음에 실망하고, 경탄하도록 만듭시다’라고 열변을 토한 벤 야이르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비록 적군이지만 그 장렬한 죽음 앞에서 로마군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이곳저곳을 수색하자 두 여자가 숨어 있던 도랑에서 나왔다. 여자들이 간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 실바는 두 여자와 아이들 다섯을 모두 살려 주었다.
로마군은 마사다에 40년쯤 머물렀다. 500년 가량 지나 비잔틴 수도사들이 한동안 살았지만, 이슬람교도들이 유태를 정복하자 그들도 떠나갔다.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을 세우기까지 1900년 간이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떠도는 사이에, 그들의 용기와 신앙을 상징하는 마사다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회의장으로 추정되는 장소.
목욕탕의 흔적.
4시 30분이면 케이블카의 운행이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