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족 배경과 유년기
짓두 크리슈나무르티는 텔루구어를 사용하는 브라만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인 짓두 나라이니아는 영국 식민지하의 공무원으
로 일하고 있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어머니인 산제에밤마를 무척 좋아했으나 그녀는 그가 10살때 죽고 말았다. 그의 부모는 육촌
지간이었으며, 모두 11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중 6명만이 유년기 이후까지 살아남았다. 가족은 엄격한 채식주의자들이었으며, 달
걀을 먹지 않았고 유럽 분위기가 풍기는 어떤 음식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는 1885년 5월 12일 인도 안드루 프라데쉬(인도 동남부)의 치토오르에 있는 마다나팔레의 한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여덟
번째 아이가 남자아이일 경우, 힌두신인 크리슈나의 이름을 따르는 힌두 전통에 따라, 그는, 크리슈나무르티라는 이름을 얻게 되
었다. (murti는 신성 구현의 뜻이 있음.)
1903년, 가족은 쿠다파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전에 크리슈나무르티가 말라리아에 감염되었던 곳이었다. 이 병은 이후 오랜 세월
에 걸쳐 그에게 정기적으로 발작 증세를 일으켰다. 그는 감수성이 예민한 병약한 아이였다; "흐릿하고 꿈꾸는 듯한" 아이였던 그
는, 종종 지진아로 취급받곤 했으며, 학교와 집에서 정기적으로 선생님과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하곤 했다.
몇 십 년 후, 크리슈나무르티는 어린 시절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소년이었던 적부터도 어떤 생각이 마음속으
로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단지 바라보거나, 듣고 있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거나 듣고 있어도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형상이 없었습니다. 때때로 자주 생각을 하긴 했지만, 아무런 사고적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유년기와 사춘기 시절에 대하여 18살 때 쓴 회고록에서 크리슈나무르티는, 1904년에 죽은 그의 누이나, 1905년에 죽은 그의 모친
을 목격하는 심령 경험에 대해 기술했다. 그 밖에도 그는 일생을 걸쳐 뚜렷하게 지속된 자연과의 친밀감과 유대감에 관한 어린 시
절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도 기술하였다.: “나는 항상 나무, 강, 그리고, 산과 이상하리만치 아무 거리감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언
제나 그랬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부친인 나라이니아는 1907년 은퇴하였으나 생활의 곤란으로 인하여 당시 신지학 협회의 대표였던 애니 베산트
에게 아디야르에 있던 협회 본부에서 일할 수 있기를 원하는 편지를 썼다. 1875년 뉴욕시에서 준 신비주의적 단체로 창립한 신지
학협회는 전 세계적인 매체와 대중의 관심을 끌었으므로 인도 사회에도 영향력이 있었다. 엄격한 정통 브라만인 나라이니아는
1882년부터 신지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결국 협회의 서기로 고용되어 가족을 이끌고 1909년 1월에 아디야르로 이사했다. 나라이니
아와 아들들은 처음에는 신지학협회 단지의 외곽 근처에 위치한 위생시설이 미비한 작은 오두막을 배정받았다. 궁핍한 생활로 인
해 크리슈나무르티와 형제들은 곧 영양실조가 되었고 몸은 기생충들로 들끓었다.
2. 그의 발견과 결과
크리슈나무르티가 영향력 있는 신지학자인 챨스 웹스터 레드비터를 만난 것은 아디얄로 이사한 지 몇 달 후인 1909년 4월 말이나
5월 초 경이었다. 아디얄 강 근처에 있는 신지학협회 부지의 강변을 정기적으로 산책하던 레드베터는 예지능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역시 친구들과 함께 자주 그곳을 찾아갔던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때 받은 인상을 다음과 같이 남겼
다. “이제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놀라운 영기를 느꼈고, 그 안에는 이기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목격담에 의하면 당시 크리슈나무르티의 외모는 볼품없었고, 인상적이지도 못했으며, 지극히 평범했다. 그 소년은 또한 유별나게
흐릿한 정신 상태로 보였고 종종 표정 없이 멍했으며, 거의 정신박약아처럼 보였다. 레드비터는 그가 영적 지도자이자 위대한 계
시자가 될 것을 흔들림 없이 믿었고, 신지학의 교리에 따라 인류의 진화를 인도해 줄 세계의 스승으로서 지구에 정기적으로 나타
나는 영적 존재인 “위대한 마이트레야(미륵불)의 매개체”로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일은, 레드비터에 따르면, “뭔가 잘못되지 않
는 한” 일어날 일이었다.
크리슈나무르티 전기에서 푸풀 자야칼은 그가 75년이 지난 그의 인생 말년에 당시 시절에 관해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그 소년은 항상 말했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굴종적인 복종의 요소가 있었다. 그 소년은 막연했고 불
안정했으며, 희미했다;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마치 커다란 구멍이 뚫린 그릇 같아서,
무엇을 부어넣던 간에 아무것도 남지 않고 빠져 나갔다.”
그의 “발견”에 뒤이어, 크리슈나무르티는 아디얄에 있는 신지학협회의 지도자들과 그들 내부 집단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레드비터와 몇몇 소수의 믿음직한 동료들은 교육시키고, 보호하면서, 그를 다가 올 세계의 스승의 재목감으로서 그를 준비시
키기 시작했다. 크리슈나무르티(종종 크리슈나지로 불림)와 그의 남동생 니티야난다(“니티야”, 1898-1925)는 마드라스에 있는 신
지학 단지에서 개인 교습을 받았고, 후에 해외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그들에 대한 교육으로 인해 유럽의 상류 사회의 한 분파
속에서 비교적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그 동안 계속되었던 학교 수업에 대한 문제, 능력에 대한 걱정, 열악한 신체 상태 등에도 불구하고, 14세의 크리슈나무르티는, 6개
월 만에 상당한 수준으로 영어로 말하고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후에, 그의 “발견”에 대하여, 만약 레드비터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게 되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때 죽었겠죠’라고 대답했다.
이 기간 동안 크리슈나무르티는 애니 베산트와 강한 유대감 갖게 되었고, 그녀를 대리모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생모와의 친밀
했던 어린 시절에 이어, 이 유대는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형성된 여성들과의 몇몇 중요하고도 친밀한 관계들 중 첫 번째 경우였
다. 그의 아버지는 애초에는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베산트의 법적 후견을 양도했으나, 그의 아들을 둘러싼 광풍 같은 관심에 의
해 그 배경에 주목하게 되었고, 1912년에 베산트와 신지학협회에 대해 부권보호와 관련하여 소송을 걸게 되었다.
한 차례의 법적 다툼 끝에, 베산트는 크리슈나무르티와 그의 남동생 니티야에 대한 후견권을 얻게 되었다. 그의 가족과 가정으로
부터의 이별에 대한 결과로, 크리슈나무르티와 그의 남동생은 몹시 가까워졌으며, 뒤이은 세월 동안 그들은 종종 여행도 함께 하
였다.
1911년, 아디얄의 신지학 협회의 지도부는 다가올 세계의 스승의 출현 대해 전 세계를 준비시키기 위한 ‘동방의 별 교단’이라는 새
로운 조직을 결성하였다. 크리슈나무르티는 그 수장으로 지명되었으며, 원로 신지학자들은 여러 다른 지위로 배치되었다. 세계 스
승의 도래라는 교리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회원들은 신지학협회의 회원들이었다. 곧 신지
학협회 내 외부, 힌두교 측, 그리고 인도와 국제 언론 등에서 논란이 분출했다.
3. 성장기
메리 루티엔스는 그녀의 크리슈나무르티 전기에서 크리슈나무르티가 실제로 적절한 영적, 속세적 지도와 교육을 받은 후에 세계
의 스승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 믿었던 시기가 있었다고 기술했다. 다른 전기 작가는 레드비터와 다른 동료들이 그의 교육을 위해
시행했던, 엄격한 신체 단련과 스포츠를 포함한 다양한 학교 과목, 올바른 위생관리와 영국식 사회 문화에 대한 지도, 신지학적 종
교적 수업, 요가, 명상에 대한 개인교습 등의 일일 프로그램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동시에 레드베터는 개인적으로 어린 크리슈
나무르티에 대한 신비주의 지도를 하는 역할을 자처했는데, 이러한 방식의 지도는, 그 당시, 오직 신지학협회의 지도자들과 일단
의 긴밀한 협회 회원들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그가 타고난 소질을 보인 스포츠와 달리, 크리슈나무르티는, 항상 정규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데 문제가 있었고 학구파는 아니었
다. 결국 몇 차례에 걸친 입학 시도 끝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외국어 교육은 받았으며 불어와 이탈리어를 포함
한 몇몇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이 시기 그는 분명히, 구약성경의 일부를 즐겨 읽었으며, 특히 쉘리,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의
작품과 같은 몇몇 서양의 명저에 감명을 받았다. 또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관찰과 기계적 조작 기술이 뛰어났었고, 복잡한 기계
를 정확하게 조립하고 분해하는 능력이 있었다.
애초부터 신지학자들에 의해 구축된 그의 대중적 이미지는 “매우 세련된 풍모에 목적이 뚜렷하며, 세계주의적 외모를 지닌 외계에
서 온 듯한, 품행은 지복을 주는 힘이 있는 듯한 초연함이 있어야 함” 이었다. 실제로 그의 말년의 모습은 이 모든 특징이 다 들어
있다.
비록 외모가 다양한 온화함을 주지 못하는 대신, 자제된 감정 표현 속에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내재적인 힘
이 있다는 점은 초기부터 확실했다.
그러나 크리슈나무르티는, 성장하면서, 사춘기의 반항과 감정적 불안의 징후를 보였다. 그에게 부여된 식이요법에 짜증을 내거나,
그를 둘러싼 공적인 지위에 상당히 불안해했으며, 종종 그가 짊어지고 가야 할 미래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크리슈나무르티와 니트야(남동생)는 1911년 4월에 최초로 영국에 왔다. 그들이 처음 만나게 된 많은 사람들 중에는, 후에 그의 전
기를 쓰고 평생 친구로 지내게 된 메리루티엔스(당시 3세)과 그의 또 다른 대리모가 되는 그녀의 어머니 에밀리가 있었는데, 이들은 그와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게 된다. 이 최초의 여행 도중, 크리슈나무르티는 런던에 있는 ‘동방의 별 교단’의 젊은 회원들에게
그의 첫 번째 대중 연설을 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크리슈나무르티 형제는, 언제나 동행하는 후견 신지학자들과 함께, 유럽 각국을 방문했다.
전쟁 후, 크리슈나무르티는 역시 동생을 동행하고 전 세계를 돌며 ‘동방의 별 교단’의 수장으로서의 그의 의무와 관련한 일련의 강
연, 모임, 토론을 전개해 나갔다.
그가 당시 행한 연설들의 내용은 다가올 미래를 위한 준비를 위하여 조직의 작품과 회원들 사이에 회전되었고. 그의 어휘들은 그
당시 널리 퍼진 신지학적 개념과 용어를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며 주저하거나 같은 말을 반복하였지만, 점차로 그의 연설
과 자신감은 개선되었고, 여러 모임들에 있어서 조금씩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4. "그 과정"의 시작과 니티야의 죽음
1922년에 크리슈나무르티와 니티야는 스위스로 가는 길에 시드니에서부터 캘리포니아까지 여행을 했다. 캘리포니아에 머무는 동
안, 그들은 비교적 한적한 곳인 오하이 계곡에 있는 교단 미국회원이 제공한 별장에 머물렀다. 오하이에 있는 동안, 그들은, 후에
크리슈나무르티의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로잘린 윌리암스를 만났는데, 이 젊은 미국인은 두 형제 모두와 친해졌다.
처음으로 형제는 신지학 협회 사람들의 감독에서 벗어난 상태에 놓였다. 자연을 산책하며 친구들과 소풍과 산책을 하였고, 영적
묵상과 세계 스승 프로젝트에서의 그들의 진로에 대하여 계획하는 시간을 보냈다. 크리슈나무르티와 니티야는 오하이 계곡을 매
우 좋아했으며, 결국 지지자들은 위탁 사업체를 설립하여 그 별장과 주변의 땅들을 그들 형제들을 위하여 매입하였다. 그때부터
그곳은, 크리슈나무르티의 공식적인 주거지가 되었다.
1922년 8,9월 경이었다. 오하이에서의 첫 체류기간 동안 크리슈나무르티는, 강렬한 인생을 바꿔버린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러한
일들은 동시에, 언제나처럼, 영적 깨달음, 심리적 탈바꿈, 그리고, 육체적 조건부여로써 묘사된다. 최초의 사건은 두개의 뚜렷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처음 3일간의 영적 체험이 있었고, 이는 2주 후에 일어난, 보다 길게 지속된 증상으로 이어졌으며, 그의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 '과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러한 체험은 그가 사망할 때 까지 강도를 달리하며 시기를 두고 재현되었다.
목격자에 따르면 그것은 1922년 8월 17일에 시작되었는데, 딱딱한 공처럼 부풀어 오른 목덜미로 인해 크리슈나무르티는 엄청난 통
증을 호소하였다. 이틀이 지났지만, 가증되는 통증과 극도의 육체적 불편과 예민함, 식욕의 완전 상실, 이따금씩 일어나는 정신 착
란적 소요 등으로 증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리고나서, 그는 의식불명 상태가 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주변 상황에 대해 매
우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어떤 신비로운 합일의 경험을 했다고 회고했다. 다음 날, 증상과 그러한 경험은 더욱 심화되어 "지극한
평화"의 감각 상태에 다다르며 정점에 달했다.
"나는 내가 본것으로 인해 지극한 행복 상태에 있었다. 모든 것이 변했다. 나는 맑고 순수한 물을 마셨고 갈증은 가라앉았다... 나는 빛을 보았다. 나는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치료해 줄 연민에 도달했다. 그것은 나를 위한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한 것이었다. 나의 가슴은 모든 영광속에 있는 사랑에 취했다. 나의 가슴은 영원히 닫힐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환희와 영원한 아름다움의 샘물을 마셨다. 나는 신에 취했다."
이런 사건들에 뒤 이어, 9월 초에 '과정' 이라고 알려진 이전 사건들과 명백하게 연관된 일련의 이상한 상태가 거의 매일 밤마다 주
기적으로 발생했다. 이 새로운 사건들은 10월까지 약간의 휴식들과 함께 지속되었고, 이후에는 간헐적으로 재발되곤 했다. 8월에
있었던 3일간의 경험에서처럼, '과정'은 다양한 정도의 통증과 신체적 불편과 예민함을 동반했고, 간혹 '어린이' 상태로 빠져들기
도 했으며, 어떤 때는 분명 의식 밖으로 사라져버리는 듯 한 모습도 보였다. 그의 몸이 더이상 고통을 못 이기게 되어 기절하거나,
혹은, 그가 스스로 의식을 놓아버리는 것이었다라고 크리슈나무르티나 보살피던 사람들이 설명했다.
이런 경험들은 후에 현존, 축복, 무한, 신성 등의 말로 바뀌어서 묘사되었고,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종종 그런 경험이 일어났
다고 전해졌다. 크리슈나무르티는 후에 종종 이러한 특별하고 반복해서 일어나는 상황을 한마디로 줄여서 'the other' 또는 'the
otherness - 타자성' 이란 말로 대체하곤 했다. 또한, 그가 일기나 다른 곳에 기술한 바와 같이, 타자성과 관련된 불가입적 감각과
그것이 영향을 준 이상한 예민함, 그리고 타자성에 의해 촉진된 예사롭지 않은 의식 상태 등의 의미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사용되
었다.
1922년의 사건과 그 후에 진행된 일련의 과정에 관하여 몇 개의 해석이 작성되었다. 레드베터와 다른 신지학자들은 메시아로서의
초자연적인 경험을 예견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발전과정에 대해서는 당혹해 했으며 일괄적인 설명을 하지 못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말년 기간 중에 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주제로 한 사적인 토론들이 절친한 사람들과의 사이에 있었다.
이 토론들은 그 주제에 관하여 어느 정도의 설명이 되었지만, 결론적으로는 그 본질과 출처에 관하여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비
록 레드비터의 설명이 완전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과정'은 또다른 결과를 초래했다. 전기 작가 롤란드 버논은 이렇게 말했다.
"오하이에서 일어난 '과정'은, 그 원인이나 타당성을 떠나서, 크리슈나에게는 격변의 대 이정표였다. 그때까지 진행된 그의 영적
성장은 비록 없지는 않았지만 기복이 있었고, 신지학의 대가들의 엄격한 숙고에 의한 계획 하에 있었다... 이제 크리슈나의 준비과
정과 상관없는 완전히 뭔가 새로운 일이 있어난 것이었다. 그의 전인격적 의식으로부터 큰 짐이 사라지게 되었고, 그는 이제 한 개
인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스승으로서 그의 미래의 역할과 관련하여, '과정'은 그에게 기반이 되었다... 그 일은 그에
게만 일어났고, 그의 멘토들에 의해서 그에게 주입된 것이 아니었다... 그 일은 크리슈나에게, 새롭게 발견한 확신과 독립의 정신
이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만들어 준 대지와 같은 것이었다."
마침내, 1925년 27세의 나이로 오하이에서 오랜 세월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결핵에 의해 갑작스럽게 찾아온 니티야의 죽음은 신지
학에 대한 그의 믿음과 신지학협회 지도자들에 대한 그의 신뢰를 근본적으로 흔들어놓았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니티야의 사망 소
식은 그를 완전히 절망시켰다. 몇 일 동안이나 그는 슬픔으로 인해 괴로워했으나, 그는 결국, 새로운 힘을 발견하는 내적인 혁명으
로 이를 승화시켰다." 그의 동생의 죽음은 그에게 남아있던 환상들을 부숴버렸고, 이제 새로운 통찰이 탄생했다. "오래된 꿈은 죽
고, 이제 새로운 꿈이, 단단한 대지를 뚫고 올라오는 한 송이 꽃처럼 탄생했다. 새로운 통찰이 생겨났으며 위대한 자각이 펼쳐졌
다. 고통 속에 탄생한 새로운 힘은 혈관을 통해 고동쳤고, 과거의 시련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동정심이 태어났다. 그것은 타인이
겪어야만 하는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기를 원하는 위대한 바램이었고, 그 고통을 고결하게 견뎌내고 큰 상처 없이 그것으로부
터 벗어나게 하고픈 소망이었다. 나는 울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울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울게 된다면, 나는
그들과 아픔을 함께 할 것이다.”
5. 과거와의 결별
이후 몇년간 크리슈나무르티의 새로운 통찰과 의식세계는 계속해서 발전했다. 새로운 개념들이 그의 강연, 토론, 그리고 서신을
통해서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신지학적 용어로부터 점진적으로 벗어나는 어휘의 진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집회의 주요 테마는 잘
짜여진 신지학 교리와 별의 교단의 회원들이 밟아가야 할 공고한 단계에서 벗어나기 시작해서, '행복 일년', '권위에의 질문', 또
는, '해방'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보다 추상적이고 유연한 개념들로 이어졌다. 그의 새로운 방향은 1929년에 그가 별의 교단을 지속
하기 위한 레드베터와 베산트의 시도를 저지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1929년 8월 3일, 네덜란드의 옴멘에서 열린
연례 캠프에서 애니 베산트와 3천명의 회원들, 그리고 라디오 청취자들을 앞에두고 교단을 해체했다.
여러분은 악마와 그의 친구가 길을 걸어가다가 나눈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왠 남자가 저
앞에서 몸을 웅크리더니 땅에서 뭔가를 주워서 살펴보더니 호주머니 속에 넣는걸 보았습니다. 친구는 악마에게 말했습니다. "뭘
주운거야?" "조각난 진리 한 조각을 주웠어" "그럼 너한테는 좋은 일은 아니네?" 친구가 물었습니다. "아니, 아주 좋은 일이야" 악
마가 대답했습니다. "저 남자가 진리를 조직하는 일을 도와줄 생각이거든"
진리는 길없는 대지이며, 여러분이 어떤 길을 따라간다고 해서 그곳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종교나 어떤 종파에 의
해서도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저의 생각이며, 저는 이 생각에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충실하고자 합니다. 한계가 없고, 조
건 지워질 수도 없으며, 어떤 특정 방식에 의해서는 접근할 수 없는 이 리는, 따라서, 조직되어질 수 없으며, 어떠한 조직이라도
사람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이끌거나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어떤 추종자도 원하지 않으므로 이것이 무슨 위대한 업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저는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
람을 추종하는 순간 여러분은 진실을 따르기를 스스로 멈춰버리는 것이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제 말에 귀를 잘 기울이고 있는지
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세상을 위해 한 가지 일을 하고 싶으며, 흔들림 없는 신념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저는 오직 한 가지 본질적인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속박과 공포로 부터 인간
을 자유롭게 하고 싶고, 이를 특정 종교나 분파에서 찾지 아니하며, 새로운 이론이나 철학을 세우지 않는 방식으로 추구하고 싶습
니다.
해체에 이어 몇몇 신지학자들은 크리슈나무르티에게서 등을 돌렸고, 메시아의 출현에 뭐가 잘못된 게 있는 것인지 공식적으로 의
문을 표했다. 메리 루티안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세계의 스승이 나타나 뭔가 완전히 새롭고 갑작스러운 말을 하면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이나 희망과는 너무나 다른 내용으로 인해
세상이 그를 거부할 수 있다는 위험을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며 그 오랜 시간동안 메시아의 도래를 주장해왔던 신지학 지도자들
은, 이제 그들이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경고해왔던 바로 그 함정에 그들 자신이 하나둘씩 빠져버리고 말았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모든 조직적 신앙, 현인 개념, 그리고 스승-제자 관계를 비난하며, 대신 사람들을 완전하게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일을 하겠다
고 맹세했다. 그가 명백하게 자신이 세계의 스승이 아니라고 부인한 기록은 없으며, 그의 지위에 대해 분명하게 밝혀달라는 질문
을 받을 때마다, 그 문제는 그와 상관없다거나, 그가 밝혔듯이, 의도적으로 불명확하게 말하곤 했다. '별의 교단' 해체 이전에서 부
터 시작된 외모의 변화는 계속 이어졌고, 이는 그의 지속적인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의 외모, 용어, 그리고 여러 성명 발표들의 변화들로 인해 당황해하고 혼란스러워 했던 애니 베산트와 메리 루티엔스의 어머니
에밀리를 포함한 많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세계의 스승'이라는 특별함이 주는 신비감은 사라졌다. 결국 그는 신지학협회와 신지
학의 가름침이나 수행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었으나, 몇몇 전현직 회원들과는 평생 동안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크리슈나무르티
는 종종 그가 하는 일 전체를 '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대신 '그 가르침'이라고 언급했다. 그의 관심은 항상 '그 가르침'에 있었으
며, 그것을 전달하는 스승(선생)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그 스승과 관련한 심리적인 권위를 포함한 모든 권위를 비난
했다. 어떤 종류이던간에 모든 형태의 권위는 가장 파괴적인 사악한 것이며, 특히 사고와 이해의 영역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
다. 지도자들은 추종자들을 파괴하며, 추종자들은 지도자들을 파괴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바로 여러분의 스승이며 제자입니다. 인
간이 가치있다고,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의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적인 권위도 포함한다: 어떠한
외부의 권위도 의지할 게 못된다는 것을 깨닫는 한편,... 자기 자신의 내적인 권위, 즉, 자기 자신만의 작은 경험이나 누적된 의견,
지식, 관념과 이상의 권위를 거부하는 일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언들이 사회적,
또는, 개인적 무질서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그가 주장했던 절대 자유는 사회적 개인적 무질서를 초래하기 보다는 오
히려 완전한 질서를 가져온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질서는 필요한 것이며,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내적인 질서가 필요합니다.
이 질서는 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덕은 자유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물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니요, 기존의 질서에 반항 하는것도 아니며, 삶에 자유방임주의적인 태도를 부여하거나 히피가 되는 일도 아닙니다. 자유
는 오직 우리가 우리의 일상생활, 우리의 활동, 우리의 사고방식, 우리의 잔인성, 우리의 냉담함과 무관심을, 지적으로가 아닌 실
제적으로, 이해할 때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의 거대한 '자기 자신'과 접촉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크리슈나무
르티는 신지학 협회를 포함하여, 이미 없어진 별의 교단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여러 신탁과 기타 조직들로부터 사임하였다. 그
는 네덜란드에 있던 대 저택과 5000에이커의 땅을 포함한 돈과 소유물을 원 기부자에게 반환하였다. 그는 남은 인생을 세계를
돌며 믿음의 본질, 진실, 슬픔, 자유, 죽음에 관한 대중 강연과 대담을 가졌으며,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향한 탐구를 하며 보냈다.
그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의존과 착취로 보며 어떤 추종자나 숭배자들도 받지 않았다. 그는 그의 일에 영감을 받은 사람들로부
의 선물과 재정적 지원은 받아들였으며, 반세기가 넘도록 강연 여행과 서적 및 강연의 출간을 지속했다. 그는 독립적이며 깨끗하
게 생각하도록 끊임없이 사람들을 독려했다. 그는 과거와 결별하고 발견의 여정을 향한 신선한 출발을 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마치 친구사이 같이, 편안하고 다정하게 함께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토론하며 탐구했다. 그러한 여정을 떠나기 위해서 우리는
짐을 가볍게 하여야 합니다. 수많은 의견, 편견, 결론들처럼 오래된 가구들을 모두 짊어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
는 스스로의 모습, 이제까지 자신에 대해 가져왔던 모든 생각들을 잊어버리고,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된 듯, 우리는 새로
시작할 것입니다.
6. 중년기 I
1930년 부터 1944년까지 크리슈나무르티는 별의 교단 시절부터 절친한 동료이자 친구였던 라자호팔라챠르야 데시카차르야 (라자
고팔 또는 라자)과 함께 관여한 별 출판 신탁의 원조하에 출판과 강연 투어에 몰두했다. 이 새로운 사업을 위한 작업의 본부는 라
자고팔과 그의 아내가 된 로잘린 윌리암스가 크리슈나무르티의 공식적인 주거지가 있는 오하이 부지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살고
있었던 캘리포니아였다.
그 사업과 조직 운영은 주로 라자고팔에 의해 이루어졌고, 크리슈나무르티는 오로지 강연과 명상에 집중하였다. "특히 그가 지루
하다고 여긴 재정적인 문제를 포함한 모든 실무적인 문제를 라자고팔의 유능한 수완에 맡기는 것에 찬성한다."
라자고팔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으며, 그 두 사람은 1931년 딸인 라다의 출생 후 실질적으로 별거생활을 했다. 1991년이 되
어서야 세상에 알려졌지만, 상대적으로 오하이의 한적한 생활 속에서, 크리슈나무르티와 로잘린드의 친밀한 우정은 애정관계로
깊어졌고,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크리슈나무르티의 교육적 이념에 기초한 몇몇 학교들 중 최초로 리시 벨리 학교가 인도에 설립되었다. 전인적 관점
으로 접근하고 건전하게 아이들을 양육하여 갈등과 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완전한 개인으로 키우는 적절한 교육은, 그의 지속적
인 관심사였다. 이 학교를 포함한 다른 인도와 외국의 학교들은 크리슈나무르티 법인의 후원 하에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그러
나 1980년까지는 올바른 교육에 대한 크리슈나무르티의 관심은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니었다. 세계 여러 곳의 크리슈나무르티 학
교에서 행한 50년 가까이의 교육의 결과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하나의 새로운 마음도 창조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별의 교단과 신지학과의 결별이후에도 그의 강연에 참석하는 대중의 수는 감소하지 않았는데, "추상의 안개로 보이는 것들속으로
나아가는 그를 따라갈 수 없었다."고 말하며 그를 버린 몇몇 오랜 추종자들을 대신하여, 새로운 사람들이 자리를 채웠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람들은 일반 대중에 공개된 캠프에도 합류하였고, 세계 곳곳에서 새롭게 그를 초청하였다. 메리 루티엔스는
"그의 청중들은 점점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들은 사람들 대신, 무슨말을 하는지에 관심이 있는 다른 역량의 사람들로 바뀌었다." 라고 말한다.
1930년대를 통해 크리슈나무르티는 유럽, 남미, 인도, 호주와 미국에서 강연하였으며, 비록 몇몇 경우에는 점점 커가는 전 세계적
인 소용돌이 속에서, 적대적이거나 반대에 맞부딯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문제는 청중들이 그의 메세지
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뚜렷해 보였다는 점이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사적 공적으로 분노를 표현했으며, 그가 어휘를 교체한 이
유들 중의 하나는 사람들에게 보다 정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그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필생의 노력이기도 했다.
그는 에밀리 루티안스에게 쓴 편지를 통해, 모임은 "질보다 양"이었다고 했으며, 또한, 구 별의 교단이나 신지학 협회 회원들이 과
거를 잊어버리기를 거부하는 것에 괴로워했다. 그가 좀 더 명확하게 말해주려고 하는 것들이 오히려 또다른 알아듣기 어려운 이론
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아챈 그는, 청중들에게 그것에 관해 행동해 줄 것을 요청했다.
"지성을 깨우기 위해서는, 사색보다는 알기위한 깊은 독려가 있어야만 합니다. 저에게는 확신, 사실로 다가오는 것이 여러분에게
는 하나의 이론으로 들리게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단순한 제 말의 반복은 여러분의 지식이나 실재로 만들어질 수 없다는 점을 제
발 명심해 주십시요. 그것은 단지 가설일 뿐이고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게 됩니다. 오직 실험과 행동을 통해서만이 여러분은 그것
의 실체를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가르침은 저의 것도 아니요 여러분의 것도 아닌,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이 됩
니다."
6. 중년기 II
크리슈나무르티는 이후의 강연과 토론에서 자주 재등장하는 주제가 되어버린 몇 개의 새로운 개념과 용어들을 도입했다. 그 중 하
나는 '선택 없는 앎'이라고 하는 관념인데, 이것은 편견이나 판단을 동반하는 내재적인 혹은 외재적인 선택이 없이, 순간에서 순간
으로 연결되는 앎의 한 가지 형태를 말한다. 다른 새 개념은 의식과 잠재의식간의 구분의 존재에 대한 그의 도전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한 구분은 인위적이며 실제로는 오직 '하나의 의식'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개념이었다. 또한, 오하이에서의 상대적으로
고립된 생활에 고무되어 그가 매일같이 실행에 옮겼던 장시간의 명상과 관련하여, '올바른 명상'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 그는 1937년에 유럽으로부터 도착한 올더스 헉슬리와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우정은 헉슬리가 사
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들은 민족주의의 파괴적인 영향으로 인한 결과가 유럽의 당면한 분쟁을 일으킨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
다. 크리슈나무르티의 2차 대전에 대한 견해는 종종 평화주의, 혹은, 미국이 애국열정에 빠져있을 시기에는 전복주의로 해석되어
일시적으로 FBI의 감시 하에 있었던 적도 있었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4년간 그는 공식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오하이의 소유지의 자영농장에서 조용히 일
하며 생활했고, 전쟁기간동안, 그곳에서 나오는 잉여 생산물을 유럽에 구호 원조로 기부했다. 그는 후에 전쟁기간 중 오하이에서
보낸 세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도전도 없고, 요구도 없고, 외출도 없는 시기였다. 모든 것이 억눌러져 있었고,
내가 오하이를 떠나자 다 터졌다."
1944년 5월 그는 그간의 침묵을 깨고 대중 강연을 오하이에서 시작하였으며, 이 후 오하이는 다시 한번 그의 연설과 토론의 정규적
인 진원지가 되었다. 이 일련의 연설과 이후의 자료들은 'Star Publishin Trust'의 뒤를 이은 조직인 'Krishnamurti Writings Inc
(KWINC)'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 KWINC는 크리슈나무르티와 관련된 전 세계적인 새로운 중심이 되었고, '그 가르침'의 보급과
여행 스케줄 관리를 주목적으로 하였다. 한편, 그는 새로운 개념들과 관심사들을 소개하게 되는데, '관찰자와 관찰대상간의 비 이
중성', 혹은, '생각하는 사람과 생각의 비 이중성'이 그중의 하나이다.'탐구하는 마음의 본질과 특징'도 인기 있는 주제가 되곤 했
다.
"내가 보기에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고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가 아니고, 마음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이
보잘것없고, 작고, 편협 됐고, 제한적이라면, 아무리 문제가 거대하거나 복잡하더라도, 마음은 자신만의 보잘 것 없는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비록 그 마음이 특출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발명을 하고, 미묘하고 재간있는 생각을 떠올리더라도, 여전히 그 마음
은 보잘것없는 마음입니다. 마르크스를 인용하고, 인도 경전을 인용하고, 몇몇 다른 종교 서적을 인용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작
은 마음이며, 그 작은 마음이 복잡한 문제를 마주하게 되면 오직 그 자신의 용어로만 바꿀 수 밖에 없으므로, 그 문제는 더욱 더 복
잡해집니다. 따라서 문제는, 작고 보잘것없는 그 마음이 스스로의 한계에 의해 속박되지 않는 어떤 것으로 변모될 수 있나 입니다.
인도의 지인들과 연락을 취해오던 크리슈나무르티는 1947년 10월에 인도에서 강연 투어에 나서서 젊은 새로운 지성인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그 여행 중에 그는 푸풀 자야카르와 난디니 메흐타 자매를 만나게 되고, 그 두 사람은 평생의 지인이자 마음을 나누
는 동지가 되었다. 그 자매는 그 이후, 1948년 오오타카문드에 머물 때 크리슈나무르티에게 재발한 '그 과정'을 목격했다.
인도에서 있었던 이 강연들과 토론들에서 그는, 앞으로 그의 메시지에서 인기 있는 주제가 되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한 가지
를 소개했다. 그것은 일상생활 속에 사고의 적절한 위치와 그 필요성, 의미, 그리고 사고의 멈춤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사고의 종말'의 중요성을 실재를 이해하고, 새로움을 발견하는데 있어서 극히 중대하다고 여겼다.
"간단하게 말해서, 생각은 기억, 즉, 과거에 대한 반응입니다. 과거는 무한대이거나 일초전이기도 합니다. 생각이 활동할 때, 기억
으로서, 경험으로서, 지식으로서, 기회로서 활동하는 것은 바로 이 과거입니다. 모든 의지는 이 과거에 의거한 바람이며 쾌락을 향
하거나 고통을 피하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생각이 작동할 때, 그것은 과거이며, 따라서 그곳엔 새로운 삶이란 절대 있을 수 없습니
다. 다시 말해, 과거는 현재에 살고 있으며, 그 자신과 현재를 수정합니다. 따라서 그런 방식으로는 삶에는 어떤 새로움도 있을 수
없으며, 어떤 새로움이 발견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과거의 부재, 즉, 마음이 생각, 두려움, 쾌락, 기타 모든것과 함께 얽혀있지 않
는 상태이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얽혀있지 않을 때 새로움은 생겨날 수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인해 사고는 고요해야만 하며, 꼭
필요할 때만 객관적으로, 효율적으로 작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연속성은 생각입니다. 연속성이 있을 때 새로움이란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실제로 삶 그
자체의 문제입니다. 여러분께서 그저 과거속에 살 것이냐, 아니면 완전히 다르게 사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대중 강연과 개인 면담을 통해 청중을 끌어들였다. 한편, 그의 첫 저서가 주류 상업적 출판업자에 의해 1953년
에 발간되었다. 유랑하는 성스러운 사람들, 은자들, 그리고 독립적인 종교적 스승들이 많았던 오랜 전통이 있는 인도에서 그는 인
기가 좋았다. 현대의 많은 그 부류의 사람들이 그 때 크리슈나무르티와 만나게 되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를 우호적으로 생각했
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진실한 수행자나 불교 승려들에게 특히 다정했으나, 그들의 예배, 수련, 수행에 대해서는 일관되고 분명하
게 비판했다.
그는 우호적인 상대가 되었으며, 이어지는 수 십 년간 널리 알려진 힌두와 불교 학자와 지도자들과 많은 토론을 했다. 이러한 토
론들 중 몇 가지는 인쇄나 다른 형식으로 후에 출판되었다. 그는 또한 당시에는 젊었던 텐진 갸초, 제 14대 달라이라마인 라모
돈드럽과 수상 자와할랄 네루를 포함한 여러 중요 인물들과 면담했다.
7. 말년기 I
크리슈나무르티는 계속해서 대중 강연을 통해, 그룹 토론을 통해, 그리고 관심있어하는 개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전 세계를
돌았다. 그의 내적 삶도 역시 활발했는데, 계속되는 '그 과정'은 1961년까지 발생했고, 첫번은 영국, 나중에는 스위스에서 있었다.
1960년대 초반에 그는 물리학자 데이비드 보옴과 알게 되는데, 그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철학이, 자신이 생각하는 물리적 세계의 본
질과 관련된 철학적, 과학적 관심과 인류의 심리적, 사회적 상태가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곧 친한 사이가 되어, 이 후
거의 20년간에 걸쳐 정기적으로 개인간 대화나 다른 참석자를 포함한 그룹 토론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
이 토론 중 몇몇은 후에 다양한 형식으로 출판되었으며, 과학자들을 포함하여 이전의 경우보다 더 폭넓은 청중에게 소개되었다.
또한, 보옴을 통하여 다른 몇몇 과학계 인사들과도 만나 그들과 함께 토론을 진행했다. 그들의 오랜 우정은 후에 거친 휴식기간을
거치기도 했으나 둘 사이의 차이점을 극복하고, 비록 이전과 같은 수준을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크리슈나무르티가 죽을 때 까지
친구로 남아있었다. 보옴과 과학계와의 만남은 크리슈나무르티로 하여금 보다 더 정밀한 용어 선정과 의식과 같은 용어 사용에 있
어 신중하게 규정하여 사용하게끔 만들었다.
1960년대 초에 크리슈나무르티에게 깊은 변화들이 또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을 가까운 사람들은 알아채기 시작했다. "그는 결코 예
전 같지 않을 것이다. 우리와 같이 웃고 산책하던 크리슈나지는 사라졌다. 엄하고, 급하며, 의문을 같는 새로운 크리슈나지가 나타
났다. 연민은 있지만, 또한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는 선생이기도 했다. 모든 위대한 웃음들과 놀이는 끝났다." 라
고 자야카르는 썼다.
청중들도 바뀌고 있었다. 대안적인 삶의 방식과 경험들에 대한 강렬한 추구를 내포하고 있는 1960년대의 문화적 변화를 반영하여,
그의 예전 책들과 신간 둘 다 새로운 넓어진 관심을 끄는 한편, 그의 강연과 토론에는 젊은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진화하는 철학은 확연히 젊은 참가자들에게는 너무 엄격하고 호된것이었다. 그러나 스위스의 사아넨에서 있었
던 것과 같은 정규적인 새로운 모임들은 결국에는 인류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는 문제들에 관심이 있는 심각한 사람들을 위한 중심
이 되었다.
변해가는 청중과 앞으로의 전망과 더불어, 크리슈나무르티의 주제는 몇가지 새롭고도 색다른 개념들을 포함하기 위해 진화했다.
개인의 특성은 착각, 진정한 사랑, 아름다움, 평화, 그리고 선(善), 대극은 없으며 그러한 이원론은 단지 사고의 작도일 뿐, 근본적
인 정신 상태 전환의 필요성 등등과 같은 생각들이었다. 1970년대 초에 그는 새로운 접근방식에 대해, "그 가르침을 펼치는 것은
같은 방향에 있지만, 세부적인 고찰 보다는 총체적인 방식"이라고 표현했다.
그에게 있어 근본적인 가르침은 변함없었다. 그는 내부적 변화가 있었다거나, 최초의 가르침으로 부터 진화가 있었다는 지적을 부
인했다. 단지 표현, 어휘, 언어, 그리고 몸동작이 변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흐름은 크리슈나무르티의 말기 주제인 심리학적
시간의 비존재와 일맥상통하며, 이 주제를 가지고 그는 어떤 심리적, 내적 진화나 '되어감'을 반박했다. 1980년 말에 그는, 그의 메
세지의 핵심 요소들을 재확인하는 기회를 가졌고, 그것은 '그 가르침의 핵심'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래는 요약이다: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의 핵심은 그가 1929년에 "진리는 길없는 대지"라고 말하며 주장했던 연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어
떤 종교나 교의, 교리, 성직자나 예배, 철학적 지식이나 심리학적 기법에 의해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관계라는
거울을 통해, 자기 마음 속의 생각들에 대한 참 이해를 통해, 그리고 지적 분석이나 자기 성찰적 분석을 통해서가 아닌 순수한 관조를 통해 찾아내야만 합니다.
인간은 그 자신 속에 종교적인, 정치적인, 개인적인 명목으로 수많은 이미지들을 만들어 보호 장벽을 구축하였습니다. 이 이미지
들은 상징, 아이디어, 신념 등으로 나타나며 명백해집니다. 이 이미지들은 무거운 짐이 되어 인간의 사고, 관계, 그리고 일상생활
을 억누르게 되며,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분리되는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7. 말년기 II
1970년대에 크리슈나무르티는 그동안 거리를 두고 있었던 당시 인도 수상이었던 인디라 간디를 몇차례 만났고, 몇몇 경우에는 분
명 대단히 심각한 토론을 벌였다. 인도 정치에 미친 그의 영향은 알려져있지 않지만, 자야카르는 간디가 크리슈나무르티와의 만남
을 통해 받은 그의 태도와 메세지가 정치적 혼란기때 내려졌단 긴급조치를 철회하는데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사이에 크리슈나무르티와 그의 지인들은 이전의 기구들을 지역적으로 분산된 네개의 비영리 재단으로
재조직하여, 학교들을 후원하고, 그 가르침을 퍼뜨리는 일을 하는 공식 기구로 지명했다.
한편, 크리슈나무르티와 라자고팔의 친분은 점점 악화되어 마침내 라자고팔의 소유로 되어있던 기부받은 부동산과 기금, 저작,
원고, 서신 출판권을 회수하기 위한 소송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971년에 공식적으로 시작된, 기소와 뒤 이은 상호 고소는 오랜 세월을 끌었다.
상당부분의 자료와 재산이 그의 생전에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고, 그가 사망한 직후인 1986년에야 이 소송당사자들은 모든 문제들
의 합의에 이르렀다. 1960년대 말에 시작되어 사망시까지 크리슈나무르티는 친한 지인들과의 사적인 토론들을 진행하였으며,
크리슈나무르티 자신, 그의 '발견'과 이후 발전, 계속되는 '과정'의 의미, 그리고, 그 가르침의 원천 등에 관한 내용 중, 최소한 일
부는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말년에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의 특이성을 받아들이려는 시도를 통해 그의 배경에 대한 수수께끼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그 토론들은 또한 크리슈나무르티가 공식적으로는 보통 잘 접근하지 않았던, 악의 존재나 그에게 있었던 '보호감', 또는, '타자성',
즉, 본인 자신의 존재와 때로는 그의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에 대한 존재에 대해 그가 감지했던 비인격화에 대한 내용들도 다루어
졌다. 토론들은 어떤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했으며, 크리슈나무르티 자신도 몇차례에 걸쳐 그러한 탐구와 관련한 어떠한 진실도 알
지 못하며, 그것을 찾을 수 있을지, 혹은, 찾아야 할지를 모른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번의 시도를 했고, 몇몇 분야
에 대한 생각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대동소이 했다. 그는 최대한 신비적인 요소들을 만들지 않기를 원했다고 주장했지만, 메리
루티앙스가 말했듯이, '여전히... 수수께끼는 남는군'라는 말을 남겼다.
1980년대 초에, 그는,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하였던, 강도를 높이려는 시도 없이 찾아오는 '초대하지 않고 추구하지 않는' 내적 경
험이, 질적으로 도약하여 완전히 다른 새로운 차원이 된 것을 발표했다. 그는 "그 움직임은 모든 에너지의 원천에 도달했다."라고
표현했다. 1922년 8~9월에 처음 일어났던 사건들을 상기시키는 그런 언어 속에서, 그는, '오직 믿을 수 없는 광대함과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움 만이 있다'라고 덧붙였다. 후에 행한 토론 중, 이 일과 관련된 의견 속에서, 그는 그러한 직관에 다다르는 길을 나타
나게 하려는 시도에 관한 그의 수십년에 걸친 노력에 대해 말했다.
내가 60년 동안 말해온 바와 같이, 나는, 다른 사람들도 이곳에 도달하기를 바랍니다. - 아니, 도달이 아니라. 무엇을 말하는 지 아
시겠습니까? ... 이제...어떻게 가르치거나, 돕거나, 밀어주지 않으면서, '이 길이 평화와 사랑의 절대감으로 이끌어 준다" 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을 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그 지점까지 이르렀고, 여러분의 뇌가 그로 인해 고
동치고 있는데, 어떤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할까요? 이해하시겠습니까? 말뿐이 아닌 실제로 도울 수 있게, 어떤 방법으로
다른 사람도 그곳에 갈 수 있도록 돕겠습니까?
1980년에 오랜 신지학자이자 크리슈나무르티의 친구이며 동지인 라다 부니에르가 인도 아디야르의 신지학협회의 대표로 선출되
었습니다. 이 선출은 크리슈나무르티가 1980년 11월에 아디야르의 신지학협회 본부를 거의 반세기만에 방문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그는 정중하고도 감동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후 인도를 방문하게 되면 종종 협회를 찾았다.
1984년과 1985년에 뉴욕시의 유엔에서 초청된 청중들에게 강연을 했습니다. 1985년 10월 말에, 그는, 마지막으로 인도를 방문하
여, '고별'이라고 후에 불리우게 된 강연과 토론들을 1986년 1월가지 몇차례 열었습니다. 이 마지막 강연들은 과학과 기술, 그리고,
그것이 인류에게 준 영향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있었던 말은 근본적인 질문들을 포함했습니다. 점차로, 크리슈나무르티의 육체
적 지적 활력과 회복력은 평생 연약했던 신체적 건강과 끊임없는 여행으로 인하여 줄어드는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이미 몸무게는 상당히 줄어들은 그는 친구들에게 "죽음을 초대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의 몸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지 모르겠
습니다."라고 말했으며, 말을 할 수 없게 되면 더이상의 목적도 없다는 말을 몇차례 했다. 1986년 1월 4일에 있었던 그의 마지막 강
연에서 그는, 탐구의 본질, 기술과학의 영향, 삶과 명상의 본질, 그리고 창조의 본질에 대해 함께 고찰하고자 청중들을 초대했다.
컴퓨터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신들과, 이론들, 예배들을 만들수 있고, 심지어, 여러분보다 뛰어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뇌를 바꾸어 놓을 컴퓨터가 세상에 나올 것입니다. 유전 공학에 대해 들어보셨을 겁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던 말
던간에 그것이 여러분의 전체 행동을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게 유전공학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사고 방식을 바꾸어 놓으려 합니다. 유전공학이 컴퓨터를 만나면 여러분은 무엇인가요? 인간으로서 여러분은 무
엇인가요? 뇌가 바뀌어 버릴 것입니다. 행동방식이 바뀔 것입니다. 두려움과 슬픔과 모든 신들을 없애 버릴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히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국에는 전쟁이나 죽음이 닥쳐 올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현재 이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쪽의 유전공학이 다른 쪽의 컴퓨터가 만나면, 필시 그렇게 되겠지만, 인간으로서 당신은 무엇인가요? 사실상, 여러분의 뇌는 지
금 기계입니다. 인도에서 태어나면, "나는 인도인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기계입니다. 욕으
로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을 모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켬퓨터 처럼 반복하는 기계입니다. 그랬
으면 좋겠지만, 여러분 내부에 어떤 신성한 것, 어떤 영원한 성스러움이 있다고 상상하지 마십시요. 컴퓨터도 여러분에게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 그럼, 인간은 무엇이 되어가는 것인가요? 여러분은 무엇이 되어가고 있나요?
자, 우리는 무엇이 새를 만드나 묻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창조란 무엇입니까? 제가 그것을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계신가요, 들어가 볼까요? 제가 들어가 보기를 원하십니까? 왜 저에게 부탁하시는 거죠? 제가 물어보았기 때문인가요? 어떤 서술
도 그 기원을 절대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 기원은 이름이 없습니다. 즉, 그것은 완전히 고요하며, 윙윙 거리며 소음을 만들지 않
습니다. 창조는 가장 거룩한 것이고, 삶에 있어서 가장 성스러운 것이며, 만약 여러분의 인생이 엉망이 되었다면, 고치십시요. 내
일이 아니라 오늘 고치시기 바랍니다. 확신이 없으시다면, 이유를 찾아서 확신을 가지십시요. 여러분의 사고가 올바르지 못하다
면, 올바르게, 논리적으로 생각하십시요. 그 모든것이 준비되어 있지 않는 한, 그 모든것이 자리잡지 않는 한, 여러분은 이 창조의
세계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이 남겨놓게 되는 것에 대해, 전 세계로 퍼지기 보다는 특별한 집단이나 개인들에게만 그의 가르침이 전달
되는 몇몇 저명한 사람들 중 하나로 부지불식간에 바뀌어 버리는 것에 대하여 걱정했다. 그는 그의 동료들에게 몇 차례에 걸쳐서
그의 사후에 그를 대신하는 대변인이나 후계자로서 나서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1986년 1월에 크리슈나무르티 인도 재단의 신탁인
들과 함께 한 마지막 공식 석상에서, 그 기구의 미래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사후에, 그와 그의 철학에 대한 권
위를 갖춘 기구가 되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재단의 해체와 청산이 고려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평소에 그 가르침을 전달하
듯이, 그 기구도 오로지 그 가르침의 보존과 배포에만 그 임무를 한정한다는 조항을 삽입하기로 하자는 그의 요청과 함께 재단은
해산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그가 죽기 몇 일 전, 오하이 자택의 병상에서 한 최후의 진술에서, 그는 단호하게, 그의 동료들이나 일반 대중을 포함한 어느 누구
도, 그 가르침의 물줄기로서 그에게 일어났던 그 과정에 대해 이해하거나, 그의 가르침을 이해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 선언을 하였
다. 일생동안 작동되었던 그 "위대한 에너지"도, 후계자는 없다는 것을 암시하듯이,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만약 그 가르침을 살게 된다면", 사람들이 그 에너지에 다가가서 어느정도의 이해를 얻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하며 희망도 던져주었다.
이전의 토론에서 그는 자신을 토마스 에디슨과 비교하며,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으며,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은 스위치를
키는 일 뿐이라고 말했다. 다른 비유로, 지금은 비행기로 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지만, 신세계를 발견하기 위한 컬럼부스의 고난
의 역경 극복에 대해 이야기 하기도 했다. 비록 크리슈나무르티 자신은 그의 이해 수준까지 도달하기 위해 어느정도 특별한 경우
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이들은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궁극적인 암시이기도 했다.
짓두 크리슈나무르티는 1986년 2월 17일, 향년 90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 오하이의 자택에서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그가 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인도, 영국, 그리고, 미국에, 그의 친구들과 동료 친지들에 의해, 뿌려졌다.
8. 맺는 말
크리슈나무르티와 그의 업적에 대한 관심은 그의 죽음후에도 오래 지속되어 왔다. 오디오, 비디오, 그리고 컴퓨터 자료들 뿐만아
니라 많은 그의 책들은 여전히 쉽게 접할 수 있고, 주요 인터넷과 전통적 판매자에 의해 다루어진다. 공식 재단은 계속해서 문서
관리, 각국 언어로 된 가르침 전파, 디지탈 및 다른 매체로의 새로운 전환, 웹사이트 개발, TV프로그램 후원, 그리고, 세계 각국의
관심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나 대화를 조직하는 일을 하고 있다.
재단으로부터 언론 보도용으로 나온 내용에 따르면, 우편 목록과 개인적 요청 등이 계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
로, 재단 결연 학교들과 교육 기관들도 그들이 표명한 전인교육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계획발표와 함께 계속적인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도, 몇몇 국가에서는 그의 이념에 기초한 독립적 교육 기관들뿐만 아니라, 비 공식적인 크리슈나무르티 협회가 있
다. 일대기, 회고록, 연구논문, 평론, 그리고 크리슈나무르티와 그의 철학에 관한 책 분량의 연구들이 계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 검색량과 그룹 토의 게시판에 대한 조사를 보면, 유사한 주제들 가운데에서도,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관심은 높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1991년에 출간된 라드하 라자고팔 슬로스의 자서전 '크리슈나무르티와 함께한 그늘속의 삶들'은 크리슈나무르티와 관련된 부정적
인 평판과 논란의 원인이 되었다. 논란은 저자의 부모들과의 관계를 묘사한 부분에 촛점이 맞춰져 있는데, 주로 크리슈나무르티와
그녀의 어머니인 로살린드 라자고팔과의 사이에 오랜 세월 지속되었던 비밀스러운 혼외정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한 공개는
많은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했으나, 또한 메리 루티안스의 자서전을 통해 반박 되기도 했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청소년이었을 때 그를 알게된 헬렌 니어링 같은 사람들은, 그가 신지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때부터 시작된 그의 열렬한 추종자들
에 의한 지지때문에, 그의 태도가 특권의식 - 니어링은 그가 응석받이였다라고 함 -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전기작가들과 크리슈나무르티의 동료들은 그에 관한 다른 불만사항을 인정하는데, 그가 강연중이나 토론중에 보이는 태도와 관련
되어 있으며, 그것은, 크리슈나무르티가 종종 너무 모호하거나 독단적인 경향이 있거나, 둘 다 일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크리슈
나무르티의 책 몇 권을 편집한 데이비드 스키트는 이 문제를 책 '인간이 되는 것이란'의 "편집자의 소개"에서 다루어 보려고 시도
한다.
그는 또한 크리슈나무르티가 종종, 그도 인정하듯이, 너무 겸손하게 굴거나 아니면 거만한 듯한 첫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서도 말하고 있는데, 그러한 심각한 질문들로 파고들 수 있을 정도가 되는 마음의 본질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종종 이 문제를 인간의 뇌는 진화, 경험, 전통, 그리고 문화에 의해 심각하게 조건지워진다는 자주 주장되는 주
제와 연결지으려 했다. 스킷트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발표력에 관해 '크리슈나무르티의 강연과 토론중 자주 등장하는 말들'이란 구
문 속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주로 매 강연의 시작과 더불어 하는 선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며, 비판적인 시각
을 가지고 그 생각을 나누어야 하고, 각 청취자들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그가 덧붙인 추가적인 선언적 문구 역시, 그는, 자신이
그 어떤 내용에도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중요한 점은 제가 하는 말을 잘 듣고, 공유하며, 단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말하는 그것에 실제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
니다. 여러분은 동의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충분한 권리가 있지만, 여러분과 제가 여기 같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숙의
하는 것입니다... 단지 제 말을 듣고만 있지 마십시요... 그 안에 있는 것을 조각조각 찢어서 저와 함게 공유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말하는 것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마십시요. 저는 여러분의 스승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지도자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조력자도 아
닙니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생전에도 그랬지만 그의 사후에도, 그가 평소에 혐오하고 부정했던 세계의 스승, 혹은, 현자로 우러러 받는 사
실은 동료들, 비난자들,그리고 전기작가들한테는 아이러니로 여겨지고 있다. 반대로, 그의 청년시절부터 함게 한 사람들은 그의
변화해 온 과정을 쉽게 파악하는데, 메리 루티안스는 그가 사망하기 몇 년 전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그 수줍어하는 상냥
함과 거의 비어있는 듯했던 16살 소년의 마음과 ... 당대의 어떤 저명한 사상가에 의해서도 흔들림없는 철학자로 진화한 지금의
그 강력한 스승의 모습은, 특히나 그가 소년이었던 때의 모습을 아직도 많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일치시키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한 관찰들이 크리슈나무르티의 영감과, 그의 수많은 업적의 원천에 대한 질문으로 이끌 지도 모른다. "영적인 야망을 가진 사
람들에 의해 싸구려나 판결의 대상이 되고 말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가 신비로움을 벗지 않으려 한 이유다."
많은 논평자들은 크리슈나무르티의 메세지와 관련하여, 널리 인지된 그의 독창성을 토론의 주제로 삼았다. 그의 가르침은 많은 동
서양의 다양한 전통들과 수련들과 비교되어 왔으며, 그 독창성도 계속 의문시 되어 왔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청중들로부터 나오는
그런 질문들에 대하여 때때로 재치있게 받아 넘겼다. 1956년의 한 강연 도중, "당신의 가르침에 뭔가 새로운 것이 있나요?"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제가 그렇다 아니다 라고 역설하는 것 보다 여러분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문제이지 저의 문제
가 아닙니다. 제게는 이 모든 것들이 완전히 새롭습니다. 이유는 그것들은 순간과 순간으로부터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발견 후에
보관해 둘 수도 없고, 경험 후 기억이라는 형태로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단지 오래된 술병에
새 포도주를 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듯이 발견되어져야 하고, 그리고 그것을 그렇게
발견한 사람에게도 그것은 새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항상 어떤 성인이나 샹카라, 부처, 예수에 의하여 설교된 것들과 비교하곤 합니다. 방금 말한 사람들은 모두가 이 내용을 이전에 말했으며, 현대적 표현이라고 하는 또 다른 왜곡만 덧붙
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여러분이 비교를 멈출 때만, 여러분이 샹카라, 부처, 그리스도, 그들의 모든 지식, 정보를 버려버릴 때, 여러분의 마음은 비
로서 혼자가 되고, 깨끗해지며, 더 이상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거나, 조종되거나, 강제받지 않고, 현대 심리학이나 고대부터 내려
오는 금기와 명령으로 부터 자유로워 집니다. 그때가 되어야만 과연 새롭고 영원한 무엇인가가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나태가 아닌 활력이 필요하며, 그것은 지금까지 진실과 신에 대해서 듣거나 읽은 것들 모두를 과감히 잘라버리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영원하고 새로운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불변의 것으로 만들수는 없는 것이고, 불변을 찾는
마음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사상과 당시의 시대 배경으로 인하여, 크리슈나무르티는 형식적인 예배나 교리를 거부하는 영적 스승들의 본보기로
여겨지게 되었다. 진리는 길없는 대지라는 그의 개념은 다양한 사회적 운동들이나 개인들의 모방의 대상이 되거나, 그들에게 영
향을 미쳤다. 그러나, 바로 그가 그렇게 강조한, 외부로부터의 도움이나 지도의 불필요성 - 방해는 아니지만 - 으로 인하여, 때로
는 그런 강조가, 그에게 연민이나 동정이 결여되어 있는것은 아닌가하는 인식을 심어주기도 했다.
성공에 대한 크리슈나무르티 자신의 평가는,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진정으로 이해해서 그것에 대해 열광하던 안하던 간에 상관
없이, 평생 변하지 않았다. 그는 1929년 별의 교단을 해체하면서 "만약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영
원을 향해 얼굴을 돌리는 사람이, 단 다섯명밖에 안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숫자에 대해서는 관심
없음을 표명했었다. 그의 말년에 때때로 이와 관련된 질문을 받곤 했는데, 그 자신도 인정하듯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거의 아무
것도 변한것이 없는데 왜 가르치는 일을 지속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1980년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한 사람이 뭔가 진실되고 아름다운 것을 보게 된다면, 그것에 대해 감동이 우러나서, 연민이 우러나서, 사랑이 우러나서, 사람들에
게 말하고 싶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여러분은 꽃에게 왜 자라는지, 왜 향기를 머금고 있는지 물어보실 수 있나요? 그것이 바
로 제가 여러분에게 말을 전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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