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센파와 쿰란 공동체
구 절 : 막7:1-23
A. 고대 문헌에서의 에센파
1. Philo of Alexandria의 언급
에센에 대한 최초의 설명은 필로의 논문집에 있다. 그는 BC30-AD40년까지 문학 활동을 했는 바 그 기간에 집필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약 4000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Essaeans"이라고 최초로 언급했다.
필로는 그들에 대해 율법중 안식일에 대해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했는데 안식일은 거룩하기 때문이었다. 안식일에 그들은 모든 일들을 삼가고 거룩한 성소로 나가 지정된 자리에 앉는다. 이때 그들은 경건, 정의, 내적 규율 등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배우고 어떤 행동을 행하고 피해야 하는가 방법을 배운다.
그들의 기본 규칙은 삼중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덕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등인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는 "정결"에 관한 수천가지의 예가 있었다. 그중에서 그들은 공동식사의 관습을 채택했기 때문에 동일한 옷과 동일한 음식을 나누었다. 심지어 그들은 동일한 옷을 입었는데, 겨울에는 두꺼운 외투, 여름에는 값싼 얇은 천의 옷을 입었다. 그래서 그들은 동일한 음식과 동일한 삶의 방식의 금욕주의적 생활로 소박함을 사랑하고 사치를 몸과 영혼의 역병으로 미워한다.
2. Flarius Josephus의 언급
요세푸스는 유대의 세종파 즉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특별히 거룩하게 살려고 한 사람들인 에센파를 많은 작품에서 언급했다. 그가 언급한 에센의 특징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에센의 정신적 이념은 금욕주의였다. 에센은 오락을 악으로 고난에 대한 인내를 덕으로 규정한다. 그들은 기름 바르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누군가 타인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그들은 몸을 씻어 정결례를 행한다. 그들은 항상 흰옷을 입는다.
둘째, 에센은 일상생활에서 특별한 경건의 형태를 취하는데 떠오르는 태양에 대해 기도 및 기도문 암송을 한다. 그들은 제5시까지 일을 한 후 동일한 장소에 모여 린넨 천의 옷을 입고 냉수에서 정결례를 행한다. 정결례를 행한 후 성소에 모이는데 순결한 자만이 성소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셋째, 식사 전에 제사장이 기도를 하는데 기도 전에는 아무도 음식을 맛볼 수 없었다. 그리고 식사 후에 그는 다른 기도문을 암송한다. 그 후에 그들은 식사를 위해 입었던 옷을 벗어놓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옷은 거룩하며 저녁 때까지 다시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에센의 종단 입교는 즉각 허락되지 않고 후보자들은 1년 동안 훈련을 받는다. 이 기간 동안 그의 자질이 증명되었을 때에만 흰 옷이 주어지고 정결례를 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추가적인 2년 동안의 훈련기간이 경과한 후 정식회원이 되었다.
다섯째, 에센의 결혼에 관해서는 다른 양상들이 언급되나 종족 보존을 위해서만 결혼이 허락된다. 그럼에도 여자들은 3개월 동안 정숙하게 한다. 그들은 세 번 정결례를 행하여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증명이 되면 그 때 결혼을 허락한다. 이 때 여자는 린넨 천을 두르고 목욕하고 반면에 남자들은 옷을 입는다.
이와 같이 에센공동체의 삶의 모습에서 저변에 깔려있는 근본 의식은 정결주의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필로와 요세푸스의 저작이 주장하는 바의 의식주의의 모습이다.
B. 쿰란공동체의 에센 기원
요세푸스는 하스몬 왕가의 조나단(Jonathan BC160-142))의 통치를 설명할 때 에센인들의 존재를 언급했지만 에센의 기원과 초기역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런데 Cairo-Damascus 문서 저자는 종파 공동체의 창시자인 의의 교사를 언급할 때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대항한 경건한 자들의 혁명을 출발점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 에센 운동은 마카비 전쟁 이후에 일어난 하시딤(Hasidim)의 종교적 반대 운동의 영적 후예들이다. 그런데 성전의 부정문제로 하시딤 자체 안에서 분열이 일어났는데 그중에 성전과 하스몬가와 손을 잡은 자들이 바리새인, 분열된 사람들이 에센인이었다.
그 운동을 촉발시킨 구체적 사건의 배경을 보면 하스몬왕조의 조나단이 왕-제사장의 역할을 자처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때 사독 계열의 한 제사장인 "의의 교사"가 그의 대제사장 역할(BC 152)에 대항했고 의의 교사와 그의 추종자들은 조나단을 "사악한 왕(The Wicked Priest)"으로 간주했다. 이 갈등의 사건으로 의의 교사와 추종자들은 사악한 왕의 박해로 광야로 도망갔는데 이 에센의 거주지가 쿰란지역이다.
그런데 쿰란문서의 <하박국 주석>을 보면 "속죄일"에 사악한 왕이 에센 종파인들의 광야 은신처를 방문했고 이 때 의의 교사의 생명은 위협을 받았다고 언급되어 있고 동시에 이 사악한 왕의 난폭한 죽음은 쿰란에 의해 신의 징벌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에센파의 쿰란 은거는 하스몬 왕조의 헬레니즘화와 세속화 경향에 대한 반발과 불법적으로 대제사장이라고 자처한 것에 대한 거부의 상징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러한 에센의 정치적 신학적 배경은 쿰란문서 자체안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고전 전승들과 사해문서에 포함된 역사 기록 등 일차적 자료에 나타나 있는 거의 일치한다. 특히 쿰란 공동체의 성립과 그 사건에 뒤따른 상황은 사해문서에 기록된 것과 동일한 에센의 종교 생활및 사상의 형성에 결정적인 것이었다.
C.에센파와 쿰란 공동체의 관계
쿰란 문서의 발견으로 고전작품에서 언급된 에센파와의 관계는 분명해졌는데 특히 제1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로 부터 쿰란 공동체를 에센파의 한 집단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어느 면에서는 유사성과 차이점들이 공존하고 있다.
이들 사이의 유사점을 보면 두 집단 모두가 유대교로 부터 분리된 집단이었다는데 근본적 일치점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새계약공동체로 남은 자라는 자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훈련 규칙을 가지고 있으며 제사장이 모든 회원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고 공동재산 관리 및 일정기간의 입교의식과 수습기간이 있었다. 이러한 공동체의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면 공동식사에 참여할 수 없었고 모두 정결의식을 행했다.
다음으로 두 집단 사이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첫째 에센파는 동물 희생 제사를 거부하여 성전에 예물을 보냈지만 성전 종교 의식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쿰란은 예루살렘 종교 의식과 제사장의 근본을 불법적이라고 했다. 둘째로 쿰란의 창시자는 의의 교사인데 에센에는 의의 교사가 없다. 세째로 에센은 흰옷을 입었으나 쿰란 문서에는 옷에 대한 묘사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두 집단의 차이점과 유사성을 비교해 볼 때 차이점은 본질적인 면에서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질적인 면에서는 둘 사이의 연속성이 더 강함을 볼 수 있다. 물론 에센파 내에서의 다양한 공동체의 양상들에서 때문에 미미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비록 미미한 차이점이 있을지라도 쿰란공동체는 에센파의 한 공동체였다고 결론짓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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