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1. 시대적 배경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지 70년이 지난(대하 36장 17-21절) BC 539년경, 바벨론이 메도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하고 사이러스 왕의 칙령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주었는데 이것이 BC 537년경에 이루어졌던 1차 포로 귀환이다.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본국에 돌아간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위해 힘썼으나, 오랫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을 쉽게 버릴 수 없어서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유다인들이 페르시아 제국 도처에 있었다.
에스더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 후 BC 457년경 아닥사스다 1세 때 에스라 선지자를 중심으로 2차 포로 귀환이 있었고 또 BC 444년경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3차 포로 귀환이 있었다.
2. 아하수에로왕
BC 539년 사이러스는 바벨론 제국을 정복함으로써 페르시아 제국 시대를 열었다. 바벨론이 통치했던 지역을 모두 사이러스의 통치 아래 둠으로써 페르시아 제국의 세력은 확장되었고 사이러스왕 이후 다리우스 1세 때 와서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는 인도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하고 국가 기반을 튼튼하게 다진 다리우스 1세가 죽자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가 왕위를 계승한다. 아하수에로 왕이 통치할 때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는 인도에서 구스에 이르기까지 일백이십칠 도(都)나 되었다(에 1:1).
3. 와스디 왕후의 파면
아하수에로 왕이 즉위한 지 삼년에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과 풍요를 나타내기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자그마치 180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 잔치에는 물론 페르시아 제국의 모든 장수와 각 도의 귀족과 방백들이 다 참예했다(에 1장 2∼4절).
잔치가 끝나갈 무렵 아하수에로 왕은 도성 수산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7일 동안 왕궁 후원 뜰에서 또 잔치를 베풀었는데 칠일째 되는 날 아하수에로왕은 주흥이 일어나서 아름다운 왕후를 뭇 백성과 방백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내시 므후만과 일곱 명의 신하를 와스디에게 보내 왕후의 면류관을 정제하고 왕의 앞으로 나아오도록 청했다(에 1:10∼11).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왕의 명령을 거부했고, 아하수에로왕이 진노했다.
에 1:12 “그러나 왕후 와스디가 내시의 전하는 왕명을 좇아 오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중심이 불 붙는 듯 하더라”
아하수에로왕은 곧 나라의 규례와 법률을 묻는 일곱 방백을 모아 어전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왕후 와스디가 왕명을 좇지 않고 교만 방자하다며 이에 대한 처벌을 물었다.
신하들은 왕후가 왕에게만 잘못한 것이 아니라 아하수에로 왕이 통치하는 각 도 방백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한 처사라 하고 왕후의 잘못된 행위를 나라의 귀부인들이 따라 행하여 남편을 멸시할 수도 있으니 와스디를 왕후의 자리를 폐하는 엄한 법률로 다스리고 왕후의 위를 와스디보다 더 나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 옳다고 청했다.
에 1:19 “왕이 만일 선히 여기실진대 와스디로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 중에 기록하여 변역함이 없게 하고 그 왕후의 위를 저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이로써 와스디는 왕비의 자리에서 파면됐다(에 1:13∼22).
4. 에스더 왕후의 등장
와스디 파면 후 시간이 흐르자 왕의 노가 그쳤고, 신하들은 새 왕후를 삼는 일을 서두르게 되었다.
에 2:2∼4 “왕의 시신이 아뢰되 왕은 왕을 위하여 아리따운 처녀들을 구하게 하시되… 왕의 눈에 아름다운 처녀로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를 삼으소서 왕이 그 말을 선히 여겨 그대로 행하니라”
이리하여 페르시아 제국 각도에서 아리따운 처녀들이 왕의 궁궐이 있는 수산으로 모이게 되었다.
그 중 도성 수산에 모르드개라는 한 유다인이 있었는데 베냐민 지파의 자손으로서 옛적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유다인들을 바벨론으로 사로 잡아올 때에 함께 사로잡혀와 이때까지 생활하고 있었다(에 2:5∼6).
이 모르드개는 일찍 부모를 잃은 자기 삼촌의 딸인 에스더를 양육하고 있었는데 대단히 아름다운 처녀였다.
에 2:7 “저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고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같이 양육하더라”
모르드개에 의해 에스더도 왕궁으로 들어가 왕후 후보가 되었다. 왕궁에서 몸을 가꾸며 정결케 하는 열두 달의 정한 기한이 지나고 드디어 차례를 따라 왕 앞에 나아가게 되었는데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욱 사랑하여 왕후로 삼는다.
에 2:16∼18 “아하수에로왕의 칠년 시월 곧 데벳월에 에스더가 이끌려 왕궁에 들어가서 왕의 앞에 나아가니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욱 사랑하므로 저가 모든 처녀보다 왕의 앞에 더욱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 머리에 면류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를 삼은 후에 왕이 크게 잔치를 베푸니 이는 에스더를 위한 잔치라”
5. 유다인의 대적 하만
이후 아하수에로 왕은 아각 사람 하만을 모든 대신들 위에 세워 그의 지위를 높였다. 그러므로 아하수에로왕의 녹을 먹고사는 왕궁의 모든 신하들은 왕의 명대로 하만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꿇어 절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꿇지도, 절하지도 않았다. 야훼의 성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 외에는 무릎을 꿇지 않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신하들이 하만에게 꿇어 절할 것을 매일 설득했지만 모르드개는 절대 응하지 않았다(에 3:1∼4). 평소 유다인들이 못마땅했던 하만은 이에 분노하여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 내의 유다인을 다 죽이기로 작정했다.
에 3:5∼6 “하만이 모르드개가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심히 노하더니 저희가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고한 고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경하다 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
6. 절대절명의 위험에 처한 유다인
하만은 페르시아 제국 내의 모든 유다인을 죽일 계획에 몰두하는데 먼저 제비를 뽑아 아달월 곧 십이월을 정했다. 그리고 아하수에로 왕에게 청했다.
에 3:8∼9 “하만이 아하수에로왕에게 아뢰되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도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보다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저희를 진멸하소서….”
하만의 말에 넘어간 아하수에로왕은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하만에게 주면서 유다인을 진멸할 모든 권한을 하만에게 일임했다.
에 3:10 “왕이 반지를 손에서 빼어 유다인의 대적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게 주며 이르되… 너는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라 하더라.”
왕에게 모든 것을 일임받은 하만은 곧 왕의 서기관들을 소집하고 왕의 대신과 각 도 방백과 각 민족의 관원에게 아하수에로 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쓰고 왕의 반지로 인 쳐서 각 고을로 보냈다.
에 3:13∼15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부쳐 왕의 각 도에 보내니 십이월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노소나 어린아이나 부녀를 무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했고 이 명령을 각 도에 전하기 위하여 조서의 초본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여 그 날을 위하여 준비하게 하라 했더라 역졸이 왕의 명을 받들어 급히 나가매 그 조서가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니… 수산성은 어지럽더라.”
이것으로 유다인의 몰살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고 유다인들은 집단 패닉 상태에 빠졌다.
에 4:3 “왕의 조명이 각 도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며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7.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정신
유다인들이 피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운명에 처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된 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으며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 대성통곡하며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다(에 4:1).
에스더 왕후의 시녀가 모르드개의 이 모습을 보고 에스더에게 보고하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에스더 왕후는 걱정이 되어 내시 하닥을 모르드개에게 보내 그 까닭을 알아 오도록 했다.
에 4:7∼9 “모르드개가 자기의 당한 모든 일과…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 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하닥이 돌아와 모르드개의 말을 에스더에게 고하매.”
모르드개의 말을 전해들은 에스더 왕후는 유다인의 위험을 알게 되었으나 당장 어떻게 힘써볼 수 없는 현실의 어렵고 답답한 심정을 내시 하닥을 보내어 모르드개에게 알린다.
그 당시 궁궐의 엄중한 법도를 보면 누구든지 왕의 허락이나 호출 없이 함부로 왕이 거처하는 안뜰에 들어가 왕 앞에 나아가면 죽임을 면치 못하게 되어 있었다. 다만 왕이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왕이 가지고 있는 금홀을 그에게 내밀면 살게 되는 법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 에스더 왕후의 입장은 왕에게 부름을 받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일이 되었기에 왕을 상면할 수가 없었고 왕에게 자기 민족의 억울함을 호소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왕의 부름이 없는 가운데서 유다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왕 앞에 나아가려면 엄중한 궁궐의 법도를 어기며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가야만 한다.
에 4:11 “왕의 신복과 왕의 각 도 백성이 다 알거니와 무론 남녀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 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일이라”
이를 전해들은 모르드개는 그래도 절대절명에 빠진 유다인을 죽음에서 건져내기 위해 왕에게 나아가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왕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사람은 왕후인 에스더밖에 없기에 한 번 더 간절히 에스더에게 간청한다.
에 4:13∼16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는 하나뿐인 자신의 생명을 결코 아깝지 않게 생각했다. 그리고 삼일 동안 금식하며 간절한 기도로 신에게 매달렸다. 모르드개와 유다인들도 에스더를 따라 한 마음으로 금식하며 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8. 에스더와 유다인의 승리
에 5:1∼3 “제 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보좌에 앉았다가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그에게 내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홀 끝을 만진지라”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각오로 신의 자비에 의지해 아하수에로왕 앞에 나아갔을 때 왕은 에스더 왕후를 기쁘게 맞이하여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며 소원을 묻는다.
에스더는 왕을 위한 두 번의 잔치를 베풀겠으니 하만과 함께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왕은 사랑스럽고 예쁜 에스더가 왕을 위해 잔치를 베풀겠다고 하니 참으로 기뻐하고 쾌히 승낙을 하며 하만을 급하게 호출했다(에 5:3). 첫 번째 잔치에 참석했던 왕이 에스더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에스더는 내일 또 왕을 위해 잔치를 베풀겠으니 하만과 함께 참석하면 내일은 소원을 말하겠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튿날,
에 7:1∼2 “왕이 하만과 함께 또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나아가니라 왕이 이 둘째 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가로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왕의 물음에 에스더는 드디어 그동안 있었던 하만의 간악한 간계를 다 말하고 참담하고 억울했던 마음을 호소하며 자기와 자기 민족 유다인을 구원해 달라고 왕에게 간청한다.
에 7:3∼6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 에스더가 가로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하만이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하거늘”
사실을 알게 된 왕은 노했고 하만을 죽이라 명했다. 그리하여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자기 집에 준비해 놓았던 높이 오십 규빗이나 되는 나무에 오히려 하만 자신이 달려 죽게 되었던 것이다.
에 7:10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이후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의 집을 몰수하여 에스더에게 주었으며 에스더의 소원을 들어주어 유다인들이 그의 대적으로부터 완전히 승리하게 해 주었다.
왕이 하만에게 주었던 왕의 반지를 거두어 모르드개에게 주었고 아달월 십삼일에 유다인을 죽이라는 하만이 썼던 조서를 취소할 수 없었으므로 아달월 곧 십이월 십삼일, 유다인을 죽이려 한 그 날에 모든 유다인의 대적을 도륙하고 진멸하라는 새로운 조서를 써서 왕의 반지로 인치고 페르시아 제국 각 도 각 고을에 보내어 유다인들에게 원수를 갚도록 했다(에 8장).
에 8:15∼17 “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면류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의 앞에서 나오니 수산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 왕의 조명이 이르는 각 도, 각 읍에서 유다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9. 부림절
드디어 아달월 곧 십이월 십삼일이 되었다. 이날은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 한 날이었으나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에스더의 용기로 이제는 전세가 역전되어 오히려 유다인이 대적들을 멸하게 된 날이다.
이날에 도성 수산에서만 하만과 관련된 유다인의 적들을 오백 여명이나 도륙했으며 하만의 열 아들을 죽여 나무에 달아놓았다. 아달월 십사일에도 원수들을 죽여 대적을 멸했는데 수산에서 삼백명, 각 도에서 칠만 오천 명을 도륙했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죽음에서 벗어난 이날을 기념하여 잔치를 베풀고 즐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부르 곧 제비의 뜻을 좇아 부림절이 된 것이다.
에 9:20∼22 “모르드개가 이 일을 기록하고 아하수에로왕의 각 도에 있는 모든 유다인에게 무론 원근하고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지키라 이 달 이 날에 유다인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히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에 9:24∼28 “ …하만이 유다인을 진멸하기를 꾀하고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저희를 죽이고 멸하려 했으나… 악한 꾀를 그 머리에 돌려보내어 하만과 그 여러 아들을 나무에 달게 했으므로 무리가 부르의 이름을 좇아 이 두 날을 부림이라 하고… 이 부림일을 유다인 중에서 폐하지 않게 하고 그 자손 중에서도 기념함이 폐하지 않게 했더라”
유대의 3대 축제 : 해방절(유월절과 무교절), 오순절, 초막절
비공식축제 : 부림절, 봉헌절(하누카), 니가노르패배기념일.
Queen Esther-ANDREA DEL CASTAGNO / c. 1450 Fresco transferred to wood.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The Banquet of Esther and Ahasuerus-VICTORS, Jan / 1640s, Oil on canvas, 170 x 230 cm. Staatliche Museen, Kassel
에스더는 BC 479년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King Xerxes : BC 486년 인도에서 부터 수단까지 127개 주를 통치한 페르시아 왕)의 비가 되어 이스라엘민족을 구한 여인이 되었으며, 당시 수산궁(현재 이란의 테헤란 남서쪽에 있는 하마단)에 묘가 있다.
무려 2400년 전에 조성된 에스더 묘소는 유대 회당 안에 있으며, 그 안에 모르드개(Mordecai)와 에스더의 명찰이 달린 관이 나란히 놓여 있다.
테헤란 하마단의 에스더 묘역
'중동................... > 이스라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구약 중간시대 연대표 및 외경위경 (0) | 2008.07.31 |
---|---|
신구약중간사란? (0) | 2008.07.31 |
이스라엘 7대 절기의 개요 (0) | 2008.07.31 |
이스라엘의 전쟁 (0) | 2008.07.30 |
대제사장 계보 (0) | 2008.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