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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사

지평선의순례자 2008. 7. 29. 13:20

신구약 중간사

 

말라기 선지자 이후부터 세례 요한까지의 중간사를 공백기간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역사에 공백기간이란 없다. 그 시대에도 역사는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세계사적 사건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를 알아본다.

 

150년 전쟁

페르시아가 점점 허약해져 있었을 때 마케도니아에서는 필립왕이 일어나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처음으로 연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필립은 BC 336년에 모살되어 큰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의 젊은 아들 알렉산더(Alexander=인간의 수호자)가 뒤를 이었다. 알렉산더는 헬레니즘의 전도자로 출발하여 때로는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진군했고 때로는 환영 받았지만, 그리스 본국의 가족들은 너무 오랜 전투로 원망이 높아갔으며 군사들은 불평과 불만으로 배신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배를 만들어 본국으로 회군하기도 했다. 알렉산더는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BC 323년 술과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알렉산더의 휘하에는 안티고누스, 카산더, 리시마커스, 프톨레미 이 네 사람의 장군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 네 사람 외에 프톨레미 군대의 총사령관이었던 셀류크스가 있었는데, 그가 세운 셀류크스 왕국과 프톨레미 왕국 사이에 치러진 유명한 전쟁이 150년 전쟁(BC 315-165)이다.

알렉산더 사후 제국은 4분되었다. 처음에는 카산더가 마케도니아와 헬라를 통치했고, 리시마커스가 트라키아와 비두니아를 통치했으며, 애굽과 시리아를 프톨레미가 통치하게 되었으며, 지중해에서 중앙아시아까지를 안티고누스가 통치했다. 안티고누스는 자신이야말로 알렉산더의 후계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BC 315년 프톨레미, 카산더, 리시마커스가 동맹을 맺고 안티고누스 세력을 저지했다.

프톨레미가 요구한 아시아의 영토 일부의 양도를 안티고누스가 거절했고 마침내 전쟁이 벌어졌다. 프톨레미는 전쟁에 이기고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승리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안티고누스가 강력한 군대를 조직해 반격하자 프톨레미의 군대장관 셀류커스는 마침내 독자적인 자세를 취했고 프톨레미는 다시 이집트로 퇴각해버렸다.

셀류커스는 BC 311년 바벨론을 정복하여 차지했으나 안티고누스는 이를 저지할 힘이 없었다. 셀류커스는 바벨론을 정복하고 셀류커스 왕조를 시작했다.

그 후 셀류커스와 카산더와 리시마커스가 연합하여 안티고누스를 견제하여 입수스(Ipsus)에서 전쟁을 벌여 안티고누스를 제거한다. 그래서 세계는 4인(카산더, 리시마커스, 프톨레미, 셀류커스) 천하가 되었다.

자신의 군대장관에 불과했던 셀류커스가 안티고누스의 땅을 차지한 사실로 이집트의 프톨레미는 셀류커스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다. 이로 인해 셀류커스와 프톨레미는 150년 동안 왕조를 거듭하며 전쟁을 치르게 된다.

 

셀류커스 1세 니카톨

안티오커스 1세 소테르

안티오커스 2세

셀류커스 2세

셀류커스 3세 소테르(BC 226-223)

안티오커스 3세

셀류커스 4세 필로파토르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

 

셀류커스 왕조 말기에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는 이집트를 정복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집트에서는 프톨레미 5세 에피파네스의 아직 나이 어린 아들 프톨레미 6세 필로메토르가 왕으로 있었다. 안티오커스 4세 이피파네스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6세 필로메토르를 격파하고 이집트를 장악하려고 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멤피스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마침내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로마의 영사가 안타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의 길을 가로막았다. 로마의 힘을 과거 12년 동안이나 보아 왔던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는 비통함을 머금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알렉산드리아는 이미 로마 군이 포필리어스 라에나스(Popilius Laenas)장군의 지휘하에 이집트에 진주해 있었기 때문에 분통이 터지는 에피파네스는 굴욕을 삼키면서 돌아서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집트에서의 비통한 울분을 그는 예루살렘에 와서 터뜨렸다.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에서 저지른 일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는 오랜 전쟁의 실패와 이집트 원정으로 국고가 바닥이 나 있었는데 그가 노린 것은 예루살렘의 헬라와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의 황금이었다고 한다. 헬라화는 구실에 불과했다. 즉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강요하여 저항을 유발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죽여서 싸움을 시작하면 결국 성전을 유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들을 약탈해 안디옥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안티오커스의 명령으로 아폴로니어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성전을 더럽히고 정기적으로 드리는 제사를 다 폐했고 제우스 올림푸스 신에게 제사를 드리게 했다. 유대인들은 이 에피파네스를 ‘에피마네스’(미친놈)라고 불렀다. 이 사람은 적그리스도의 표상으로 나타난 자였으며 그의 신하 아페레스는 성전에 돼지 피를 흘리게 했다. 안티오커스의 만행에 저항하는 경건한 유대인 650명을 전차로 갈아서 죽이기도 했고(BC 168) 갖은 만행을 다 자행했다. 이에 대하여 분연히 일어선 사람이 맛다디아스였다. 의용군을 조직하여 저항했으나 146세의 고령으로 별세했고 셋째 아들 유다가 이어받아 의용군을 지휘했다. 이 운동을 유다 마카비우스의 독립운동이라고 한다.

 

하시딤(Hasidim)

하시딤(Hasidim)의 어원은 헤세드라는 히브리어이다. 헤세드는 우리말로는 정확하게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영어로도 한 가지 뜻으로만 번역할 수 없어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 세계에 헬리니즘 문화가 밀물처럼 밀려 들어와 세속화가 급진전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경건과 충절을 지켜 나가려는 사람들을 하시딤(Hasidim)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하시딤 중에서 율법주의적, 형식주의적 하시딤으로 흘러간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고 신비주의적, 금욕주의적인 방향으로 흘러간 사람들이 에세네파이다.

헬레니즘의 화려하고 찬란한 문화에 쉽게 동화되는 사람들과 끝까지 유대인의 전통을 고집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도 피할 수 없었다. 유대인 사상을 고수하려는 사람들도 헬라어를 모르면 의사소통이 안되니 할 수 없이 헬라어를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팔레스틴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별히 지식인들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헬라어를 구사하면서 헬라식 생활 방식에 반해있었다. 그런가 하면 반나체로 경기에 임하는 모습을 혐오하면서 경건을 지키려는 하시딤의 보수적 경향도 두드러지게 강화되었다. 무분별하게 헬라화 되는 유대인들을 개탄하면서 일어난 하시딤 운동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고 지지자도 많았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유대인들을 완전히 헬라화하기 위해 하시딤 같은 유대 정통파를 탄압하고 유대교를 박해하며 이방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그 신상을 섬길 것을 요구했다.

모딘(Modin)이란 작은 마을에서도 이 같은 일이 강요되었다. 그들은 그곳의 노제사장에게 모범적으로 좋은 본을 보이라고 강요했다. 노제사장 맛다디아스는 이방 신의 제단에 제물을 드리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런데 어떤 겁쟁이 유대인이 안티오커스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제단으로 나아가자 이에 격분한 맛다디아스는 제단으로 나아가 배교한 유대인과 안티오커스의 사절까지 죽여버렸다. 그는 다섯 명의 아들들과 함께 그 이방신의 제단을 헐어버리고 산으로 피신하여 안티오커스의 군대로부터 피신하면서 투쟁을 준비했고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합세했다.

처음에는 이들이 게릴라전을 벌였다. 산지 요새에 숨어 있다가 틈만 보이면 습격하여 안티오커스의 군대와 관리들을 살해했다. 뿐만 아니라 헬레니즘에 물든 사람들도 살해했다. 그들은 한때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안식일이라고 방어도 하지 않고 있다가 큰 무리가 포위당하여 학살당한 것이다. 그 후부터는 안식일에도 방어는 하는 것으로 수정을 했다. 오래지 않아 맛다디아스는 죽고 그의 아들들 가운데 유다 마카비우스가 계승했다. 그가 유격전을 감행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자 많은 유대인들이 마카비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

 

맛다디아스(Judes Ben Mattathias)

유다 마카비우스(Judas Maccabeus)

요나단(JonAD an)

시몬(Sinon)

요한 히르카누스(John Hircanus)

 

시몬이 죽고 나자 마카비 가문의 영웅시대는 막을 내렸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시대는 다 지나가고 권력 쟁탈의 추악한 회오리가 시작된 것이다. 시몬의 세 아들 중 두 아들은 시몬의 사위였던 아붑의 아들 프톨레미에게 살해당하고 셋째 아들 요한 히루카누스만 살아남아 아버지의 뒤를 계승했다.

셀류크스 왕국은 요한 히루카누스가 셀류크스의 왕국의 신민으로 자처하는 것을 보고 그를 유대의 대제사장으로 인준했다. 셀류크스 왕국은 요한 히르카누스에게 모든 군사 행동에 지원할 것과 요나단 시대와 시몬의 시대에 합병한 해안 도시들의 셀류크스 왕국 반환을 요구했다. 요한 히루카누스는 할 수 없이 욥바 항을 제외하고는 다 셀류크스 왕국에 반환했다. 요한 히루카누스가 셀류크스 왕국의 인준을 받고 안정을 되찾게 되자 헬라주의자들과 하시딤들의 긴장 관계도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대체로 헬라주의는 사두개인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하시딤의 계통은 거의 바리새인들이었다.

이 때부터 헬라화된 사두개파와 하시딤의 전통을 이어받은 바리새파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요한 히루카누스는 영토 확장책을 써서 처음에 시리아에 양도했던 팔레스틴의 해안 지방을 합병하고 다시 에돔, 즉 이두메를 합병했다. 이들 두 지방은 팔레스틴의 두 무역로가 지나는 곳이었기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요한 히루카누스는 이두메를 합병해 이두메(에돔)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여 유대화 정책을 단행했다. 이 일은 후일 안티파테르의 후손들이 할례를 받았으므로 자신들도 유대인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고, 헤롯 가문이 유대인의 왕의 자리를 차지하게 만든 근본 원인이 되었다.

 

안티파테르

아리스토불루스 1세(Aristobulus 1)

알렉산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알렉산더 살로메

히르카누스 2세(Hyrcanus 2)

아리스토불루스 2세

안티파테르(안디바)

헤롯 대왕

 

헤롯의 가계는 BC 37년에서 시작되어 AD 70년까지 약 100년간 이어진 왕가이다. 이 왕조는 안티파테르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안디바”라고 불린 사람이다. 그는 알렉산더 얀네우스에 의해 이두메 지방의 통치자로 임명된 사람이다.

그리고 안티파테르 2세는 하스모니아 왕가의 히르카누스 2세에게 밀착되어 이를 조정함으로써 조금씩 권력을 쌓아 갔다. 그리고는 결국 로마의 인정을 받기 위해 분주하게 활동했다. 마침내 쥴리어스 케사르는 그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 사람은 혈통적으로는 이두메(에돔)출신이지만 명목상으로는 유대인이었다. 요한 히루카누스가 BC 125년에 이두메을 정복해 모든 이두메인들을 강제로 할례를 받게 하여 유대인화 한 것이다.

 

로마의 개입

로마가 유대 역사에 개입하게된 것은 하스모니아 왕가의 마지막 정황을 알아야 대략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히르카누스 2세 사이에 계승권을 놓고 다투는 사이에 하스모니아 가문의 소식이 로마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소식을 접한 로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폼페이우스를 파송하게 된다.

히르카누스 2세가 3개월 동안이나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어도 싸움이 끝나지 않자 로마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마침내 폼페이우스를 앞세우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해 들어왔다. 지쳐 있던 히르카누스는 로마를 지지하여 마침내 아리스토불루스는 무너지고 히르카누스가 세력을 잡게 된 것이다.

폼페이우스가 장교들을 이끌고 성전에 들어가자 유대인들은 격분했다. 폼페이우스는 성전에 들어갔으나 성전을 약탈하지는 않았다. 아르스토불루스의 패배와 함께 유다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예루살렘은 로마가 지배하는 시리아령의 일부 지방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헤롯대왕(BC 37-3)

그는 헤롯 아티파테르 2세의 차남이다. 그의 나이 25세 때 그의 아버지가 그를 갈릴리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그는 당시의 골칫거리였던 도적 떼들을 체포하여 즉시 처형함으로써 산헤드린의 분을 사기는 했지만 로마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갈릴리의 유대인들로 부터는 환영을 받게 된 것이다. 그 후에 그는 하스모니아 왕가의 안타고누스가 길릴리를 침공했을 때도 이를 물리쳤다.

그 후에 그의 아버지 안티파테르가 암살당했을 때 로마의 집정관 마르크 안토니우스는 헤롯과 그의 형제 파사엘을 유대의 분봉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파사엘은 안티고누스를 왕으로 삼는 파르티아 군에 포위되어 결국은 체포되었고, 감금되어 있던 중에 자살하고 말았다. 이를 본 헤롯은 팔레스틴을 버리고 로마로 망명을 가서 거기서 정치적인 공작을 해서 마침내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을 받아 내었다. 38년에는 로마 군이 파르티아 군대를 몰아내었고, 1년 후에 헤롯은 안티고누스를 물리치고 왕위를 획득했다.

헤롯은 일반적으로 팽화로운 통치를 계속해 나갔다. 그는 유대인들의 인심을 항상 염두에 두고 조심스러운 정치를 해 나갔다. 로마와의 관계도 우호적으로 유지해 나갔다. 헤롯은 그 후에도 자신을 후원한 안토니우스가 사망하자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의 호감을 사는 데도 성공했다. 그야말로 헤롯은 정치적인 제주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는 통치 기간 중에 유대의 국경을 확장하기도 했다. 그는 문화적으로는 헬라화를 시도했고 위대한 건물들을 건축했다. 그러한 업적은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업적을 보아서 헤롯 당원들이 생겨날 정도로 정치적으로는 업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각 도시를 모두 새롭게 단장했고, 본래 “스트라토”라는 성체를 재건하여 카이사리아라고 이름하여 로마의 팔레스틴 수도로 삼았다. 그는 전형적인 헬라 양식의 극장들을 지었다. 지금도 팔레스틴의 카이사리아의 유적지에는 헤롯이 만든 극장과 수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헤롯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별로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 건물은 BC 20년 경에 시작하여 예수 당시에도 건축 중이었고 64년 경에야 완성되었으니 적어도 84년이나 걸린 대 역사였다. 헤롯이 시작한 성전공사는 대단한 것이었다. 어떤 곳은 45m까지 파고 기초를 놓았을 정도이고, 그 표면의 면적만도 480,300㎡가 되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완성된지 불과 6년만에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헤롯이 짓고 있는 건물의 위용을 보고 감탄해 마지 않았으나 예수는 그 성전이 곧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막13:1-2)

헤롯의 정치는 밖으로는 유화적이었으나 가문 내에서나 측근들에게는 매우 잔인했다. 헤롯의 질투심은 대단했다. 헤롯은 질투심과 의심과 정권욕에 사로잡혀 거의 이성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불안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정통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헤롯은 혈통적으로는 이두메(에돔)출신이지만 명목상으로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스몬 왕조의 요한 히르카누스가 BC 125년에 이두메(에돔)를 정복하여 모든 이두메인들을 강제로 할례를 받게 하여 유대인화 한 것이다. 다른 나라를 정복해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한 유대화 정책이 이렇게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헤롯은 자신이 참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이 언제나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하스몬 왕가의 후손인 마리암네와 결혼하여 입지를 굳히려 했다. 그러나 하스몬 왕가의 사람이 대제사장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두려워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하스몬 왕조에 대한 향수를 진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게 될 것을 내다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하나넬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이러한 처사에 대하여 미리암네의 모친 알렉산드라는 내심 심하게 분하게 되었다. 하스몬가의 사람이 하나넬이 대제사장이 된 것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알렉산드라는 요한 히르카누스의 손자인 아리스토불루스를 대제사장으로 세우기로 결심하고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 계략을 총동원했다. 알렉산드라는 마침내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연락해 안토니우스로 하여금 헤롯에게 압력을 가하게 했다.

할 수 없이 헤롯은 안토니우스에게 소환되었다. 그렇게 하여 결국 하나넬은 해임되고 아리스토불루스가 대제사장으로 임직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알렉산드라의 정치적인 대 승리였다. 이 일 후 헤롯과 알렉산드라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평정을 되찾는 것 같았으나, 나중에 헤롯은 알렉산드라가 클레오파트라와 연락이 있었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 후부터는 헤롯이 알렉산드라를 감시하여 예루살렘 밖으로 나갈 수 없게 감시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외교 활동을 재개하려고 관을 만들어 숨어서 예루살렘을 빠져나가려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헤롯은 알렉산드라를 더욱 철저하게 감시하게 되었고 알렉산드라는 예루살렘에 완전히 연금되고 말았다. 헤롯은 사람들을 시켜서 결국 대제사장 아리스토불루스를 물에 빠뜨려 죽게 했다. 헤롯은 이 소식을 접하고 꽤나 슬퍼하는 척했다.

대제사장 아리스토불루스가 헤롯에 의해 살해당한 후 알렉산드라는 다시 클레오파트라에게 편지를 보내 헤롯을 출두시켜 대제사장의 죽음에 대해 해명하라고 명령하도록 부탁을 했다. 이번에도 알렉산드라의 뜻이 받아들여져서 헤롯은 안토니우스에게 소환당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한편 헤롯은 이집트로 출발하기 전에 숙부인 요셉에게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정사를 맡아 줄 것을 부탁하고, 또 안토니우스가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소식이 도착하면 즉시 자기의 아내 마리암내를 죽이라고 말했다.

요셉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을 했고 헤롯은 이집트로 출발했다. 그런데 얼마 후 헤롯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그러자 알렉산드라는 왕위를 자기 가문의 것으로 만들 것을 꿈꾸게 되었다.

한편 헤롯의 숙부 요셉은 마리암네에게 아첨해 헤롯이 왕비를 죽이라고 했던 것을 토로했다. 알렉산드라의 계획이 착착 추진되고 있는 순간에 죽었다던 헤롯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그가 죽었다는 소문은 거짓이었다. 헤롯은 안토니우스를 찾아가서 일의 전말을 교묘하게 꾸며서 잘 둘러대고 오히려 큰 권한을 얻어가지고 돌아왔던 것이다.

헤롯이 돌아와서 어떻게 했는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헤롯은 그동안 진행된 사실들을 추궁해 왕비 마리암네가 요셉과 부정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고 변명의 기회도 없이 숙부인 요셉을 죽여버렸다. 알렉산드라 역시 반 미친 여자로 몰아 감옥에 처넣고 말았다.

한편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권력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다.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서 로마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기회주의자인 헤롯은 재빠르게 옥타비아누스의 편에 서게 되었다. 덕분에 헤롯의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갈수록 헤롯의 의심과 질투는 심해져 갔다.

그는 경쟁적인 왕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학살한 자다.

헤롯의 말년은 왕위 계승의 문제가 매우 복잡했다. 헤롯이 이 문제를 풀기가 얼마나 어려웠던지 왕자들 가운데 3명을 살해했고 그밖에도 많은 측근들이 죽임을 당했다. 헤롯은 하스몬 왕조의 주요 인물들을 45명이나 처형했고 그 재산들을 몰수 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히르카누스의 손녀 마리암네와 결혼까지 했지만 마침내 그는 마리암네와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아난 아들까지 처형했고, 하스몬 왕조의 피가 섞여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여 없앴다. 뒤늦게 파르티아에서 돌아온 히르카누스도 헤롯의 손에 죽었다. 헤롯은 자기의 죽음을 5일 앞두고 자신의 장자 안티파터를 죽였다. 헤롯은 왕위 계승을 두고 지명자를 여섯 번이나 바구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헤롯의 아들(Huios)이 되는 것보다는 헤롯집의 돼지(Hus)로 태어나는 것이 더 안정하다”는 속담이 생겨났을 정도다.

결국은 아켈라오를 유대와 사마리아의 왕으로 인준하고 나머지 영토를 빌립과 안티파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얼마나 자신의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했던지 자신의 죽었을 때 유대인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여리고 경기장에서 다수의 유대인을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경건한 유대인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두고 국가적인 애도 기간을 확실히 하려는 그의 계산이었다. 헤롯은 BC 4년 4월 1일 장암과 수종, 동맥 경화증 등의 합병증으로 죽었다.

헤롯이 죽은 후 헤롯의 가문은 매우 복잡하게 얽힌 역사를 기록하게 했다. 헤롯 가문의 불륜과 정치적인 곡예는 로마인들까지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였다.

 

헤롯 대왕

아켈라오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

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 아르립바 2세

 

아켈라오

아켈라오는 헤롯 대왕과 말다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헤롯 대왕이 그를 첫번째 상속자로 지명함으로써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게 되었다. 요셉과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해 있다가 헤롯이 죽었다는 천사의 계시를 받고 유대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그 때 유대 땅은 아켈라오가 다스리고 있었다.(마2:22)

아켈라오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이 유대로 가기를 무서워할 때 다시 꿈에 계시를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BC 4년 경 헤롯 대왕이 죽고 나서도 AD 4년까지 아켈라오는 왕위에 오르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의 비위를 거스리고 또 유대인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을 감안하여 로마의 인준을 받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기 전에 아켈라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유대인들은 아켈라오를 향한 적개심을 늦추지 않았다. 결국 유월절까지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유월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유월절에 성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되었다.

AD 4년경 아켈라오는 안티파스의 도전을 받았는데, 안티파스는 헤롯 대왕의 처음 유언장을 근거로 자기의 왕권을 주장했고 아켈라오는 수정된 유언장을 가지고 자신의 왕권을 주장했다. 아켈라오의 어머니 말다케는 아켈레오와 로마로 동행을 했는데, 말다케는 오히려 안타파스의 편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죽고 말았다. 유대의 왕위 계승 문제가 계류중에 있을 때 팔레스틴에서는 마침내 로마 군이 개입하여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의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편 유대로부터 또 다른 대표단이 로마에 도착하여 헤롯 가문의 누구에게도 왕권을 수여하지 말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에 의하여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원했다. 이렇게 되자 헤롯 가문은 또 위기에 봉착했고 헤롯 빌립이 아켈라오를 지지하기 위하여 로마에 도착했다.

이 모든 소송 사건을 다 들어 본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유대 땅의 절반을 아켈라오에게 주었고, 남은 절반을 가지고 헤롯 안티파스와 빌립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셋 다 왕의 칭호을 받지 못하고 분봉왕이라는 명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결국 아켈라오는 로마로부터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까지 다스리는 분봉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아켈라오에게 통치를 잘하면 장차 왕의 칭호를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아켈라오는 유대로 돌오와 대제사장직에 있던 요에젤을 경질하고 그의 동생 엘르아살을 임명했다. 아켈라오는 글라피라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와 결혼하려고 자기의 아내 마리암네를 버렸는데 이 일이 유대인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었다. 아켈라오를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아켈라오를 고발하기 위하여 로마로 대표단을 파송했고 마침내 로마에 알려지게 되자 AD 6년에 아켈라오는 갈리아 지방의 비엔나로 추방되고, 총독 코포니우스가 예루살렘 사마리아와 이두메를 다스리게 되었다.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AD 4-39)

헤롯 대왕과 그의 사마리아인 아내 말다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는 예수 사역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이었다. 그의 이름은 신약에서 헤롯 왕이라고 표기하고 있다.(막6:14, 22; 마14:1, 9)

그는 자신에게 왕위를 하사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티베리우스를 건설했다. 지금도 티베리아스는 갈릴리의 최대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나바테아의 공주(아레타스 4세의 딸)와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유혹해 아내로 삼았다.

유대인들은 이 부도덕한 헤롯을 비난했고, 세례 요한은 공개적으로 질책했다. 한편 아레타스 왕은 자신의 딸을 배신한 헤롯을 응징하기 위해 앙심을 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복 동생 빌립의 아내이자 자신의 질녀인 아리스토부루스의 딸 헤로디아를 가로챘던 인물이다. 세례 요한이 이 사람을 책말하다가 참수를 당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것은 헤롯 안티파스의 이야기이다. 그는 양심과 야심이 혼합되어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복잡한 인물이었다. 동생의 아내를 취하여 즐기고 또 그녀의 딸을 향하여 음욕을 불태우는 한편, 세례 요한의 용감한 예언을 인하여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

로마까지 가서 자신의 조카이자 제수이기도 한 헤로디아를 유혹해 결국 데리고 온 것이나 그러한 괴물을 따라 나선 헤로디아의 불륜은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것이다. 헤롯 안티파스의 야수 같은 눈길은 이제 제수인 헤로디아에게서 그녀의 딸 살로메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헤롯에게 복수하는 헤로디아의 방법이 곧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게 한 것이다. 헤롯의 눈에는 세례 요한의 후계자처럼 나타난 예수의 행적에 대하여 적지 않은 두려움이 었었던 것 같다. 한편 호기심이 많아서 예수가 무슨 기적을 행하시는가 보고자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헤롯 빌립(AD 4-34)

빌립은 헤롯 대왕과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이두메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다스리던 사람이다. 그는 자기의 형 아리스토불루스의 딸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던 것이 밝혀져 있고, 그 밖에 빌립에 대한 기사를 찾기가 어렵다. 그는 AD 34년에 후사가 없이 죽었고, 그의 영지는 시리아에 병합되었다가 후에는 아그립바의 관할에 들어가게 되었다.

 

헤롯 아그립바(BC 10-AD 44)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손자인 아그립바는 헤로디아와는 친남매간이었다. 그리고 헤롯 안티파스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해된 후 로마로 보내졌다. 그리하여 그는 황실에서 양육을 받으면서 티베리우스 황제의 아들 드루수스와 친구가 되었다. 청년으로 자라면서 그는 방탕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팔레스틴으로 갔지만 거기서 안티파스의 미움을 사서 결국은 다시 로마로 갔다.

AD 36년 경 로마로 돌아온 그는 가이우스 칼리굴라와 친분을 맺었다. 곧이어 티베리우스가 죽고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황제에 대하여 불손한 말을 함부로 하다가 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나 곧 풀려나와 팔레스틴의 빌립이 다스리는 영토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가이우스 칼리굴라가 미쳐서 자신을 신격화하고 그 흉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려고 하자 아그립바는 이를 단념하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로마에 가 있는 동안 칼리굴라가 죽었다.

아그립바는 그 동안 클라우디우스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원로원에 중재를 했다. 이 공로를 클라우디우스가 인정하여 마침내 유대와 사마리아의 통치군도 아그립바에게 일임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사도 야고보를 처형했고(행12:1-2) 베드로를 옥에 가두기도 했으며(행12:4-5), 그는 유대인의 비위를 맞추는 데는 아주 명수였다.

그리하여 그런 대로 정치적인 곡예를 잘 하다가 백성들이 그를 신으로 열렬히 환호하는 소리가 날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치게 되었는데, 그래도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있다가 결국은 충이 먹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행12:20-23)

 

헤롯 아그립바 2세(AD 27-100)

아그립바 1세의 아들로서 로마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는 불과 17세였다. 그래서 그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해서 유대의 관할 구역은 총독들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가 AD 50년 경에 파레스틴 북부 칼키스(지금의 레바논지역)지방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53년에는 클라우디우스가 발립이 다스리던 땅과 교환하여 주었고, 클라우디우스가 죽고 네로가 황제가 된 후에는 티베리우스를 포함한 상당한 영토를 더 붙여 주어 상당한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별로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누나를 범해 근친상간을 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대인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가 베스도와 함께 바울의 증언을 듣다가 베스도가 바울을 향해 미쳤다고 말했던 사람이다.(행26:24-32)

그는 후에 예루살렘에 있던 하스모니아 왕국을 확장했다. 또 카이사리아에서 건축 사업을 추진했다. 66년 제 1차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진압하려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했고, 70년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그는 로마로 가서 행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는 거시서 장수하다가 약 100년 경에 죽었다. 그는 헤롯 와가의 마지막 통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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