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400년 경 사십대에 접어든 조로아스터라고 하는 이란의 가장 북쪽에서 온 은자가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산에서 내려왔다. 조로아스터는 스스로를 우주의 유일신으로 선언한 아후라 마즈다의 방문을 받았다. 여타의 다른 신들과는 달리 아후라 마즈다는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선하고, 전지전능한 존재였다. 사실 아후라 마즈다는 너무나 완벽한 존재였기 때문에 자신과 세상을 매개시켜 주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필요했다.
아후라 마즈다는 아리만과 그 수하의 악마의, 단지 말이 아니라 작용에 의해 표출되어 나오는 거짓에 대항해 싸웠다. 조로아스터는 사람이 죽으면 쉬밧교를 건넌다고 가르쳤는데 그 다리는 악인이 건너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며 선인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처녀가 나타나서 천국의 빛으로 인도해 가는 선별의 다리이다.
이에 반해 유대인들은 죽으면 사람들이 가는 땅 아래에 있다고 하는 쉐올을 믿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중요한 신화는 처녀가 세상을 구원할 존재인 사오샨트를 낳는다고 하는 것이다. 심판의 책은 천년 후에 심판의 날을 직면하여 지상천국에서 부활하게 되는 지상의 인간들의 행위를 기록하였다.
이에 반해 유대인들의 구세주에 대한 관념은 그는 미래의 왕이며 초월적인 메시아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메시아였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에서의 종말의 전 개념은 보상과 처벌 등이며 그 안에서 개개의 불멸성이 성취된다는 것은 명백히 조로아스터교에서 기원하였으며 영감을 받았다.
조로아스터가 죽은 후 그의 가르침은 조로아스터교의 유산자이자 사람과 아후라-마즈다의 매개자인 마기 혹은 독신 성직자들에 의해 변질되었다.
마기들은 조로아스터 전에 있었던 많은 신을 그 종교에 도입했다. 아후라 마즈다와 태양신 미트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천사인 스펜타 마이뉴(성령)는 거룩한 삼위일체를 형성했다. 그러나 헤로도투스가 자신의 첫 번째 저서의 131번째 문장에서 기록했듯이 페르시아인들은 그들이 믿는 신들에 대한 어떠한 상도 없었고 신상을 만들고 숭배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상징이라고 간주했다.
이에 대비하여 솔로몬의 유대교 성전은 많은 신들이 가득 차 있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입문 의식에서는 피, 소변 혹은 물로 세례를 주었다. 이에 반해 유대인들의 입문의식은 이집트의 전통적인 방식인 할례였다. 쯔바나의 조로아스터의 교리는 태양으로부터 방출되는 빛이 머리에 모여서 후광과 광선의 형태로 사방으로 빛난다고 하는 사고였다.
조로아스터교도들은 12월 25일을 미트라의 생일로 경축했다. 조로아스터교의 주요한 의식은 호마 의례였다. 호마 의례는 성직자의 기도문의 낭송 동안에 호마즙의 추출, 희생의 불에의 호마즙 추출물의 의례적인 봉헌, 집전을 하는 사제들 중 한 사람이 행하는 소량의 호마즙 소비, 그리고 숭배자들 사이의 남은 호마즙의 분배로 이루어져 있다.
호마의 즙은 추출 후에 곧바로 음용되었고 그것이 발효되기 전에는 그리 취하게 하지는 않았다. 의식은 일부분 신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고 하늘의 가호를 구하였으며 다른 부분에서는 호마에 고유한 치유의 힘을 통하여 숭배자들의 신체에 유익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여겨진 것처럼 보인다.
희생 동물은 말과 암소, 양, 염소였는데 말이 선호되었다. 성직자는 항상 동물들을 죽이면서 봉헌을 위하여 고기를 거룩한 불 앞에 놓아 두는 방법으로 희생제를 수행하였다. 희생제가 끝난 후에는 성직자와 제례에 참가한 사람들이 신성한 연회의 자리에서 고기를 먹어치웠다.
조로아스터교의 보편적인 율법은 아샤-아르타 즉 참된 기도문이었다. 수세기가 흐른 후 참된 기도문은 그리스에서 로고스 혹은 참된 명제가 되었고 페르시아에서와 같이 로고스는 불과 관련이 있었다.
믿음은 조로아스터교의 근간이었다. 만일 참된 기도문을 읊조린다면 그는 영생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유대교는 선행을 강조했다.
유대교의 멸망
BC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은 바빌론을 정복했다. 그의 통치는 조로아스터교에 입각한 신정정치였다. 키루스에게는 한 종교를 채택하는 척하다가 그것을 전복시켜 버리는 전례가 있었다. 이집트에서 그는 지상에 현현한 신으로 주장되어졌다.
바빌론에서 그가 취한 첫 번째 행동으로써 마르둑신이 찾은 공정왕이 바로 자신이라고 하면서 마르둑을 숭배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마르둑신을 능멸하여 그의 신상을 내다 버렸다. 그는 이와 마찬가지 수법으로 처음에는 바알을 숭배하였으며 그리고 나서 바알의 사제를 임명하였으며 마침내는 바알의 기념비와 사원을 파괴해 버리면서 바알신앙도 전복하였다. 키루스는 감사해 마지않는 유대인 약간을 532년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
페르시아왕은 유대인들의 땅을 돌려 주었으며 그들이 BC 516년 완공된, 후에 토박이 유대인들의 계속되는 저항에 직면하게 되는 조로아스터교 스타일의 사원을 건설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으며 도와주었다. BC 350년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의 신정(神政)에 반대했기 때문에 유대로부터 추방되었다. 여기에 유대인들을 지배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국교로부터 심대한 영향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사야 44년과 45년 키루스에 대한 복종을 명 받게 된다. 페르시아왕이 유대교의 고위 성직자를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페르시아의 마기가 유대교 성직자 노릇을 하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이 권력의 모든 요직을 장악하였으며 그들은 거룩한 책을 썼다.
에즈라와 다니엘과 같은 몇몇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녹을 먹는 제국의 대리인들이었다. 느헤미아와 에즈라는 아캐메니아 제국의 원조 하에 (본토의) 유대인들을 바빌론 유대인들의 험난한 삶에서 새로이 생겨난 단일신론과 민족주의 이념에 따르도록 만들기 위하여 후속 사명을 필요로 했다.
피지배자들의 종교에 대한 페르시아 왕들의 관심은 비단 유대인들에 한정되지 않았다. 페르시아 왕은 피지배자들이 그들 자신의 종교를 준수하는 것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제국을 하나로 묶는 아교와 같은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르며, 그들은 어쩌면 광신자였는지도 모른다. 페르시아인들은 유대인들의 신학, 역사,법률, 그리고 심지어 그들의 언어마저도 파괴했다.
다신교 VS 일신교
BC 13세기경 팔레스타인 지방에 이스라엘인들이 거주하기 이전의 모세 시대 이후로 현재의 유대인들이 지녀 왔던 유대교의 공식적인 명제는 단순히 역사적 증거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인과 유대인 역사의 진로가 되었다.
엘로힘이라는 말은 창세기 1:26의 '자 이제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라는 말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신론적이다. 창세기 3;22에서는 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 사람이 우리와 같이 되었으니.' 야훼는 신들의 모임에서 신들에 대한 판단을 하는 입장에 서 있다. '나는 말한다. 너희는 신들이요, 지극히 높은 이의 아들들이라 하더라도. '오 야훼여, 신들 가운데 주님 같으신 이 찾을 수 있나요(출애굽기 15:11).'나는 이제 야훼는 뭇 신들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출애굽기 18:11).'레위기 20장은 반(反) 몰렉(신 이름)적이다. 야훼 숭배자들의 드라빔은 '나의 신들'로 불려졌고 이는 창세기 31:19 35:2,4; 판관기 17:5; 사무엘 상 19:13,16에 나온다.
초기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들도 숭배했다. 유대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경작을 하게 되자 전쟁신 대신 바알과 같은 다산의 신이나 아낫, 이쉬타르, 아쉐라와 같은 다산의 여신을 보다 더 숭배하게 되었다. 열왕기 12:28과 에제키엘 8:10은 유대인들이 동물을 숭배한 사례를 보여준다. 탐무즈도 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면 여러분이 거기서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조상들이 모르던 우상들, 곧 나무나 돌로 만든 이상한 신상들을 섬길 것입니다(신명기 28:64).
'여러분은 주위에 있는 다른 백성들의 신들을 따라 다니지 말고 그 가운데서 어떤 신도 섬기지 마십시오(신명기 6:14 ― 신명기 6:4인 쉐마는 단일신론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다른 어떤 신들보다 위대하다(역대하 2:5).
이리 보건대 유대역사의 그 어떠한 시기, 즉 대홍수 이전부터 그 후인 아브라함의 시대, 야곱 시대, 출애굽 당시, 판관의 시대, 또는 열왕 시대를 통틀어 유대인들은 항상 다신론자였다. 여호수아 24:14는 '그대의 조상들이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에서 살 때 또 애굽에서 살 때 섬겼던 신들을 치워 버리시오'라고 말한다. 신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자신을 두려워한 사람을 10명도 발견하지 못한다(창세기 18:32). 아브라함은 그랄 또는 베르쉐바 사람들은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창세기 20:11). 아브라함도 다양한 모습의 엘을 숭배했다.
이삭도 피하드(창세기 31:42, 53)를 숭배했다. 야곱은 아비르를 숭배했다(창세기 49:24). 야곱의 가족은 다신을 믿었다. 라헬은 아버지의 신상을 훔쳤다(창세기 31; 19). '그러자 그들은 몸에 지니고 있던 이방 신상을 야곱에게 주었다(창세기 35:4). 그리고 여수아도 이야기했듯이 이집트에 있을 당시의 유대인들은 다신론자들이었다. 시나이산을 앞에 두고 황금 송아지 앞에서 발가벗고 춤을 출때 그들은 다신론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가 뱀의 모습을 본 따 신의 조상을 만들 때 다신론자였다(민수기 21: 9,2 열왕기 18:4).
이스라엘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뱀 숭배의 흔적이 남아 있다(캠브리지 고대의 역사, NY 1924, vol ⅲ, page 428). 이스라엘로 들어가기 전 여호수아는 무리들에게 신들을 내버릴 것을 요구했다. 여호수아 24:20에는 '만일 야훼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면'이라는 말이 나온다. 판관 시대는 다신론이 만연했던 시기였다. 판관기 6:25, 11:24, 17:5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주의 면전에서 악행을 일삼았다(판관기 13: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웠으나 후회스럽다. 그가 내게서 떠나고 내 명령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사무엘 15:11).'솔로몬 성전에는 야훼의 부인으로 여겨진 아쉐라의 다산 숭배를 나타내는 두 개의 40피트짜리 기둥이 있었다. BC 705년 히스기야 시대에는 모세의 구리로 만든 뱀인 느후스단이 성전에서 야훼의 법궤와 나란히 모셔졌다(열왕기하 18:4).
요시아 시대인 BC 621년 야훼는 자신의 사원을 바알, 아쉐라, 그리고 천체들, 예컨대 태양(열왕기 하 23:4∼7, 11)과 같이 나누어 썼다. 여로보암왕은 소로 만든 우상 두 개를 만들었다. 마나세는 성전 안에서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에게 제단을 지어 바쳤다(열왕기 하 21:3∼5). 바빌론 유수 바로 직전 요시아는 바알, 태양, 달 그리고 별들, 몰록, 케모쉬, 밀콤에 대한 갖가지 숭배를 때려부쉈다(열왕기 하 23). 그들은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열왕기 하 17:12). 예레미아는 바알과 몰록의 숭배에 저항했다(예레미아 2:28과 32:35).
우리는 부족신들에 대한 언급을 해석하는데 있어 신중해야 한다. 일신 숭배(다신 중 한 신만을 숭배)는 개개의 민족적 그룹을 위한 한 신에 대한 관념이다. 그러나 단일신교는 다른 신들의 존재를 명확히 인정하는 최고이며 하나의 신에 대한 숭배다. henotheisitic 또는 monolatrous란 말들은 단일신론으로 보이도록 오역될 수 있다. 단일신론적인 발언과 henotheisitic 또는 monolatrous과의 혼란의 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유대인들의 단일신론적인 소리를 내는 구절들을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되며 다신론의 증거들에 보다 비중을 두어야 한다. 또한 구약에 나오는 책들은 나중에 단일신론주의자들에 의해 편집되고 쓰여졌으며 나중에 그러한 시각에 대한 조사가 상세히 이루어져야만 한다.
모세 오경에 나오는 priestly source 사제적인 출처는 야훼 이외의 초인격적인 대리인에 대한 모든 언급을 억누르면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조상들의 율법을 기록한 것이다(Monotheism vol 10, page 527,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Mircea Eliade,ed., NY : MacMillan, 1987). 버나드 랭은 그의 1985년에 나온 'Monotheism'에서 단일신론적인 발언들은 이들 저술들이 최종적인 형태를 갖출 당시에 삽입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사야 전의 유대인들은 야훼를 모든 부족들, 심지어 모든 헤브류인들의 신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바알제법은 에크론의 신이었으며, 밀콤은 암몸의 신이며 케모쉬는 모아비트의 신이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그룹도 인종적인 그룹도 아니었기 때문에 구성원에 대한 최소한의 요구가 자신들의 신들 중 하나로서 부족신인 야훼를 숭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묶는 유일한 끈이 종교였다. 야훼는 그들을 하나로 묶는 아교이며 만일 그들이 야훼를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 이상 유대인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계약의 핵심사항이자 십계명 중 첫 번째 계명이기도 한 것이다. 사제들은 이러한 점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신명기 4:25∼28). 본질적으로 유대인은 다신교도들이었다.
그러나 그 기원이 어찌되었건간에 계약의 관념은 이스라엘인들은 그 때까지도 단일신론자들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왜냐하면 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다신론적인 환경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신은 자신의 첫 번째 계명에서 많은 신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출애굽기 20:3).' 단일신론은 십계명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과 조화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만일 한 하느님만 있다면 첫 번째 계명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하느님에 대한 완전히 단일신론적인 개념은 나중(이사야 43:10∼13, 예레미야 10:1∼16)에 나온다. 단일신론은 키루스 당시에 주님의 말씀 - 나는 세상의 주인이니 더 이상 다른 주인도 없다. 그러므로 나 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 나는 빛도 만들고 어둠도 창조하는 자이다. 나는 평화도 이루고 재앙도 불러온다 - 을 45:5∼7에서 이야기한 두 번째 이사야에 의해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이러한 이분론은 조로아스터교적인 요소가 매우 짙다는 점에 주목하라.
'이것이야말로 너의 새로운 지배자이자 지배'라고 하는 이사야의 말은 최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사야는 키루스를 44장에서 거룩하게 지명된 목자/통치자 그리고 45장에서는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라고 불렀으며 키루스를 성서에서는 처음으로 단일신론적인 선언과 병렬해서 언급했다(이사야 45). 두 번째 이사야는 이사야 45장에 관한 앵커 바이블 주해에 따르면 성경에는 전례가 없는 보편주의를 처음으로 이야기했다.
그는 또한 거짓신의 관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는데 이는 단일신론의 근본적인 특징들이다. 신의 성질은 바빌론 유수를 통해 근본적으로 변했다. 신의 본성이 신의 배타성보다 더욱 중요해졌다. 신의 성질은 숭배하는 사람들의 수를 결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편적인 신은 당신이 다만 한 신만 숭배하게끔 한다.
많은 부족들이 있기 때문에 부족신은 당연히 다신론을 함축한다는 것을 주목하라. 보편적인 신은 단일신론을 필요로 한다. 유대교는 유대 민족주의와 단일신론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단일신론이 다신론적인 종교에 이식되었기 때문에 자신들만의 독특한 지방신을 가진 선민들과 세계적인 사명을 가진 전능한 신 사이에는 결정적인 반목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부족적인 신은 보편적인 신과 화해할 수 없다.
바빌론 유수 전 하느님은 복수심에 불타며, 피에 굶주리며, 질투하는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신인동형동성론적인 부족신이었다. 그러나 유수 후에 그는 선하고, 완전하며, 세상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따라서 중보자가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하느님은 더 이상 아브라함의 엘 샤다이; 산의 하느님도 아니었고 모세의 부족신도 아니었다. 야훼는 지금 완전하며 보편적인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마즈다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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